교 양

백점짜리 행복, 십점짜리 행복

太兄 2024. 9. 18. 17:23

[ 백점짜리 행복, 십점짜리 행복]  -엄상익변호사

오십대의 대학교수와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녀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다시 젊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요?”

교수가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여자가 얼른 대답했다.

“저는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어요. 비트코인에 투자해서 돈도 벌고.”

“에이 그건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 거지. 돌아가려면 지금 알고 있는 지식을 다 없애고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시절로 가야 하는 거죠. 만약 그렇게 돌아간다면 불안할걸요.”

“그러면 노인들은 어떨까요?”
듣고 있던 삼십대 남자가 교수에게 물었다.

“제가 칠십대 노인들을 많이 만나봤어요. 대부분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들 그래요.”

“그분들이 왜 행복한 거죠?”
삼십대의 남녀는 이해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보기에 그분들의 행복은 크기보다 빈도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백점짜리 행복보다 십점짜리 여러 개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더라구요.”

나는 그들의 연구 대상인 칠십대의 노인나라에 사는 사람이다. 그들은 노인 나라에 들어선 나 같은 사람의 삶이 궁금한 모양이다. 나는 그들같이 젊어 보았다.

그때는 노인 하면 그냥 무기력하고 행복과는 무관한 정물같이 보였다. 한편으로는 노인들이 왜 사나?하고 궁금하기도 했었다. 지금의 내가 바로 그 노인이다. 지금 나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경험을 남겨두는 것도 괜찮은 게 아닐까. 젊은 날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내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에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교수를 하다가 퇴직한 칠십대의 여교수가 있다. 그 분야에서는 최고로 간 분이다. 같이 밥을 먹을 때 그 교수가 이런 말을 했었다.

“과거로 돌아가라면 저는 절대 안 갈 거예요. 유학생활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미국대학의 교수가 되도 프로젝트의 연구비를 따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죠. 남들은 나를 성공의 상징으로 보고 부러워했지만 나는 피가 마르는 것 같았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늙어있는 지금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해요.”

삶에서 성공과 실패를 불문하고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노인을 거의 보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인생의 필름을 과거로 돌려놓으면 겨울저녁의 하얀 눈밭에 서서 어디로 갈지 몰라 망연해 있는 내가 보일 것만 같다.

젊은 교수는 노인들이 백점짜리 행복보다 십점짜리 자잘한 행복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럴 것 같다. 그 교수에게는 총장이 되는게 백점짜리 행복일지 모른다. 노인의 나라에 이제 그런 건 없다. 늙으니까 이제야 보이는 작은 행복들이 엄청 많다.

통풍이 왔었다. 하룻밤 사이에 사소한 일들이 굉장한 일로 바뀌었다. 한 걸음이 내게는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가 아프니까 몸 속 여기저기서 삐걱거리는 소리들이 들려 왔다. 손목도 아프고 눈도 쓰리고 맥이 빠졌다. 낡은 기계가 된 몸의 나사들이 헐거워지고 붉은 녹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내 마음대로 될 줄 알았던 몸이었다. 걷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큰 행복인 줄을 이제야 깨달았다. 한쪽 눈에 녹내장이 왔다. 세상이 좁아지고 흐려 보인다. 다른 눈도 시력이 약해졌다. 이제야 아름다운 꽃들, 봄날 산에 물감같이 번지는 부드러운 연두색의 나뭇잎들, 바람이 강 위에 만들어 내는 미세한 물결들을 볼 수 있다는 게 행복이라는 걸 깨닫는다. 내가 있는 실버타운에서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는 내 또래의 남자를 보았다. 혼자 사는 그는 부자라는 소문이었다. 그런 그가 실버타운의 정원을 걸어가는 모습은 마치 산악인이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것 같아 보인다고 할까. 그가 원하는게 뭘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 혼자서 걷고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고 얘기하는 아주 사소한 것이 아닐까. 그런 소소한 일상이 행복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어떤 노인의 죽기전 마지막 소망은 평소 산책길에 자주 들리던 커피점에서 재즈를 들으며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시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 나는 주위에 널려있는 그런 작은 행복들을 알았던가. 백점짜리 행복만 찾느라고 그런 것들을 놓친게 아닐까. 작은 행복을 아는 노인의 지혜를 그때 가지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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