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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대통령을 떠나보내는 법… 정파 초월, 존중 그리고 유머

太兄 2025. 1. 11. 17:12

미국이 대통령을 떠나보내는 법… 정파 초월, 존중 그리고 유머

국가 화합의 장 된 카터 장례식

입력 2025.01.11. 01:05업데이트 2025.01.11. 11:10
한마음 추모… 美 정치의 품격 - 9일 미국 워싱턴 DC의 국립 대성당에서 열린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장례식에서 전현직 대통령 부부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관 속의 카터에게 예를 표하고 있다. 장례식에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전현직 대통령 다섯 명이 참석했다. 분열된 정치권이 화합한 모습을 보였다는 반응이 나왔다. /UPI 연합뉴스

“지미가 제 신경을 건드린 적이 없다고는 말 못 하지만, 정치하는 사람 중에 상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사람이 있던가요.” 미국 워싱턴 DC의 국립 대성당에서 9일 오전 열린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선 특별한 추도사가 낭독됐다. 100세로 지난해 말 세상을 뜬 카터보다 18년 먼저 이승을 떠난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이 생전에 써놓은 추도사였다. 그의 아들이 이를 대독(代讀)하자 조문객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공화당인 포드는 부통령이었던 1974년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워터게이트(정적 도청 시도) 사건으로 사임하면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후 1976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카터와 맞붙었지만 패배했다. 정치적 경쟁자였던 둘은 하지만 퇴임 후엔 깊은 우정을 쌓았고, 생전에 서로의 추도사를 미리 써놓았다. 포드의 아들 스티브 포드는 “아버지가 인생의 ‘황혼기’에 추도사를 작성했다”고 했다.

카터와 포드, 政敵에서 오랜 벗으로 - 1984년 11월 한 심포지엄에서 제럴드 포드(왼쪽),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AP 연합뉴스

포드는 이 추도사에서 “이제 지미가 저보다 10년은 더 오래 살 것 같으니(실제는 훨씬 더 살았다), 저는 제 추억을 아들에게 맡겨두려 한다”고 했다. “저와 지미 둘 다 선거에서 패배하는 고통을 겪었고 그것이 얼마나 쓰라린 경험인지를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적 패배가 가져다주는 ‘자유’를 깨닫기도 했지요.” 솔직하고 유머 섞인 추도사에 조문을 위해 성당을 찾은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조 바이든 등 전현직 대통령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이 중 셋은 카터와 같은 민주당(클린턴·오바마·바이든), 다른 둘은 공화당(부시·트럼프)이었지만 서로를 향했던 평소의 독기 어린 비방은 없었다.

포드는 “이제 작별 인사를 건넬 시간이 왔나 봅니다. 우리는 이 훌륭한 분을 알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쁨과 감사로 조금이나마 위로받고 있습니다”라고 추도사를 이어갔다. “(이미 세상을 뜬) 제 입장에서 말하겠습니다. 지미, 나는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네. 우리에겐 나눌 이야기가 여전히 많지. 오래된 벗이여, 이제 집으로 돌아오게.” 조문객들과 함께 웃음을 터트리며 생전 아버지가 써놓은 글을 읽어 내려가던 포드의 아들은 잠시 울먹이는 모습을 보이며 추도사를 마무리했다. 이후 카터는 조지아주(州) 플레인스의 자택 정원에 묻혔다. 77년을 해로하다 2023년 11월 앞서 세상을 뜬 배우자 로절린 카터 여사 옆자리다.

카터는 세계 분쟁의 중재자를 자처하면서도 대통령 재임 당시 베트남전 반대 여론을 의식해 주한 미군 철수를 추진하고 퇴임 후에도 인권 탄압국인 북한과 밀착 행보를 보여 많은 논란을 남긴 인물이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미국 외교사에 큰 비극으로 남은 이란 인질 사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안이한 대처 등으로 인기를 잃어 1980년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에게 선거인단 489명 대 49명이라는 압도적 차이로 패배했다. 그럼에도 장례식장에서만큼은 조문객과 민주·공화 양 진영의 전직 대통령들이 한마음이 돼 떠나는 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품위를 보여줬다. 미 언론은 “세상을 뜬 카터가 살아 있는 모두를 하나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9일 미국 워싱턴 DC의 국립 대성당에서 열린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장례식에서 전현직 대통령과 그 배우자들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추도사를 들으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①조 바이든 대통령 ②배우자 질 바이든 여사 ③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④배우자 더글러스 엠호프 ⑤빌 클린턴 전 대통령 ⑥배우자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 장관 ⑦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⑧배우자 로라 부시 여사 ⑨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⑩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⑪배우자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 /NBC

전현직 대통령 다섯 명 외에도 지난해와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와 경쟁했다가 분패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트럼프 지지층 의사에 반한 행동을 했다가 트럼프와 척을 진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도 앞뒤에 모여 앉았다. 생전에 카터를 ‘최악의 대통령’이라 비판한 트럼프도 민주당을 상징하는 푸른색 넥타이를 매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AP는 “극도로 분열된 미국 정치에서 목격된 이례적 화합의 모습”이라고 했다.

전현직 대통령들은 이날 장례식 전에 비공개로 만났다고 한다. 트럼프가 지난해 11월 대선에서 승리한 뒤 생존한 전현직 대통령들의 비공식 모임인 이른바 ‘대통령 클럽’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카메라에는 붙어 앉은 트럼프와 오바마가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포착됐다. 트럼프는 과거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출생 음모론에 열을 올렸고, 오바마는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를 ‘민주주의의 위협이자 적’으로 규정해 경합주를 다니며 해리스를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2021년 당연직 상원의장(부통령)으로 트럼프가 패배한 대선 결과를 인증해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트럼프 구호) 지지자들에게 살해 협박까지 받았던 펜스도 이날은 트럼프와 웃으며 악수를 했다. 미 언론들은 “아마도 4년 만에 처음 조우한 것”이라고 했다.

카터와 반세기 가까운 인연을 맺은 바이든도 생전 카터의 부탁으로 이날 추도사를 했다. 자신이 1976년 대선에 출마한 카터를 지지했던 이유로 ‘변하지 않는 인격’을 꼽으며 “카터와의 우정을 통해 훌륭한 인격은 직함이나 우리가 가진 권력 이상이라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증오를 받아들이지 않고 가장 큰 죄악인 권력 남용에 맞서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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