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래 칼럼] '주 52시간'이 반도체 산업보다 중요한 야당
중국에도 쫓기는 한국,
30년 전 일본 반도체의 몰락 떠올려
대만 TSMC는 불이 꺼지지 않는
24시간 3교대 R&D로 위기 극복
한국은 한시적 근무제 완화도 제동
대통령 탄핵이 모든 이슈를 덮지만
반도체 위한 결정은 미래를 좌우
반도체 특별법이 R&D(연구 개발) 인력의 주 52시간 근무제 완화 문제로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R&D 인력 중 희망자에 한해 한시적으로 주 52시간제를 완화해 달라고 해도 민주당은 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며 반대한다는 것이다. 지금 연구실에서, 해외 영업 현장에서 죽기 살기로 뛰어야 할 경영진이 힘센 야당 의원들을 찾아다닌다는 이야기에 한 번 더 열이 오른다.
워크 스마트(work smart) 시대에 농업적 근면성을 되살리는 게 경쟁력 강화 방안이냐고? 직장 다니는 자녀를 둔 부모로서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지금의 삼성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된다. 그런 논쟁을 벌이는 시간마저 아깝다. 2007년 애플 아이폰이 등장했을 때 삼성 휴대폰이 망한다고들 했다. 그러나 그때는 반도체가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그 돈으로 전국의 소프트웨어 인력을 수혈해 아이폰을 따라잡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캐시카우(cash cow·현금 창출원)가 휘청거린다.
삼성의 미국 텍사스주 파운드리(위탁 생산) 공장은 건설 비용을 33조원이나 들이고도 가동을 2년이나 미뤘다. 대만 TSMC가 애플·퀄컴 등 대형 고객사의 주문을 싹쓸이한 탓이다. 공장 가동이 더 늦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더 무서운 것은 주력 사업인 메모리에서도 중국의 추격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중국 창신메모리(CXMT)는 자국 반도체 사용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애국(愛國) 소비를 등에 업고 D램 점유율 10%를 돌파했다. 내년엔 세계 3위인 미국 마이크론을 따라잡을 태세다. D램 가격이 4개월 새 36%나 폭락한 것도 중국발(發) 가격 전쟁이 시작됐다는 뜻이다. 30여 년 전 삼성이 가성비를 앞세워 일본 반도체를 추월한 것과 판박이다.
게다가 대만과 중국의 반도체는 태생부터 한 핏줄이고 한통속이다. 중국 대표 기업인 SMIC는 TSMC의 2중대나 다름없다. 대만 엔지니어들이 설립했을뿐더러 대만 출신들이 차례대로 CEO를 맡고 있다. TSMC는 ‘칩의 마술사’라고 했던 량멍쑹이 삼성전자로 이직했을 때에는 눈에 불을 켜고 소송전을 벌였지만 그가 삼성을 나와 SMIC로 옮기자 못 본 체했다. 대만이 앞을 가로막고 중국이 뒤에서 쫓아오면 삼성이 어떻게 견딜지 걱정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삼성은 대만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삼성은 모리스 창 TSMC 창업자가 주도적으로 설립한 뱅가드 등 대만의 메모리 기업들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대만 언론에서 ‘삼성의 대만 죽이기’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2014년 무렵엔 파운드리 공정 기술에서도 TSMC를 앞선 적이 있다. 위기를 느낀 모리스 창은 차세대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R&D를 하루 24시간 체제로 풀가동하는 ‘나이트호크 프로젝트’였다. 기본급 30%, 성과급 50% 추가 지급이라는 파격 조건을 내걸고 400여 지원자를 모집해 24시간 3교대로 릴레이 R&D를 진행했다. 대만의 반도체 전문 저널리스트 린훙원은 저서 ‘TSMC, 세계 1위의 비밀’에서 “TSMC가 R&D에서 세계 정상에 설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이 나이트호크 부대였다. 24시간 문을 닫지 않는 세븐일레븐 R&D를 누가 따라잡겠는가”라고 평가했다.
반면 삼성은 잃어버린 10년을 겪었다. 앞으로 2~3년 새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하면 클린룸(반도체 생산 시설)에서 채소를 키우는 일본 반도체 신세가 될 수 있다. 여기엔 이재용 회장 등 삼성 전·현직 경영진이 8년 넘게 재판 중인 것, 문재인 정부의 편향적 노동 정책으로 평균 연봉 1억원이 넘는 귀족 근로자들 사이에서 “일은 당신이, 보상과 워라밸은 똑같이” 문화가 팽배해진 것이 결정적 요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은 삼성에 빚이 있다.
지금 정치권 머릿속에는 온통 ‘윤석열 탄핵’만 있겠지만, 긴 시간을 놓고 보면 반도체야말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명운과 위상을 좌우하는 보물이다. TSMC는 대만에서 호국신산(護國神山·나라를 지키는 신령스러운 산)’이라고 한다. 주 52시간제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반도체 산업을 망가뜨리는 우(愚)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이재명 대표의 실용(實用)을 기대한다.
'사회,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尹대통령, 진솔한 사과 없이 사태 피하는 건 동업자인 당 버리는 것" (4) | 2024.12.25 |
---|---|
'조기 대선'을 전제로 현수막 단속 나선 선관위 (1) | 2024.12.24 |
탄핵 정국이라고 불법이 용인되어선 안 돼 (0) | 2024.12.24 |
오세훈 "이재명, 무투표 대통령인가...국무회의 무력화는 헌정파괴" (0) | 2024.12.24 |
與 비대위장 권영세 "당의 화합·안정·쇄신 모두 필요" (0) | 2024.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