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일반상식

4. 반란의 심화

太兄 2024. 10. 11. 18:19

4. 반란의 심화

- 이현상의 등장과 반란군 순천 점령 -

 

10 20일 오전9시 반란군은 여수역 광장에 모였다. 이때 남로당 중앙당 연락부장 이현상(후일 남부군 지도자.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짐이 될 것을 두려워 한 북한의 지령으로 등에 총을 맞고 사살됨)의 지령으로 김지회 중위가 반란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반란군을 지휘하던 지창수는 1개 대대로 여수에 남아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김지회는 중앙당으로부터 순천을 점령하고 학구와 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북상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반란군 2개 대대는 열차를 타고 20일 아침9 30분 순천을 향해 출발하였다. 이들이 탄 열차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순천은 남로당 출신 좌익 홍순석 중위가 반란군을 기다리고 있어 순천 점령은 시간문제였다.

 

10 20일 여수에서, 14연대 반란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입수한 양계원 순천 경찰서장은 경찰을 동원하여 삼거리에서 반란군을 저지하게 하였다. 전 경찰을 순천역 동쪽 봉화산 밑에서 14연대 병력이 기차에서 내릴 때 공격하게 하고, 호를 깊이 파게 지시하였다. 10시 경찰배치가 끝나자 순천 시내 여러 곳에서 총성이 요란하였다.

 

10 30분 순천에 온 반란군에 의해 삼거리 경찰은 순식간에 돌파되었고, 10여 명의 경찰은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반란군이 순천역 동쪽 고지를 향해 바람처럼 진격하자 이것을 본 경찰은 싸움 한번 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급보를 받고 광주 4연대 2대대 1중대를 순천에 급파하였는데, 1중대 좌익들이 또 중대장과 우익을 죽이고 반란군에 합세하였다.

 

반란군과 진압군은 서로 구분하기 위하여 진압군은 철모에 흰 띠를 둘렀는데 이제는 반란군도 흰 띠, 진압군도 흰 띠여서 도대체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혼란이 가중되었다. 순천에 파견된 홍순석에게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하였지만 홍순석은 남로당원이었고, 그에 의해 이미 2개 중대가 반란군에 합세한 상태였다.

 

10 20일 오후 3시경 반란군은 순천을 완전히 점령하여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올렸다. 이어 남로당원들은 우익과 경찰들을 잡아죽이기 시작하는 한편, 반란군은 순천중학교에 연대본부를 설치하고 참모들과 대대장 중대장들을 더욱 보강하여 조직을 튼튼히 하고 순천방어준비를 하고 있었다.

 

10 20일 오후 3시 순천중학교에 있는 반란군 연대본부에서 김지회 사령관은 1대대는 순천을 방어하게 하고 2대대는 벌교, 학구와 광양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홍순석중위가

부대를 분산하면 각개격파 당하므로 순천은 입구만 봉쇄하면 여수까지 자연 봉쇄되어서 여수와 순천을 해방구로 만들어 철저히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몇 년이고 버티는 작전과, 아니면 즉시 지리산으로 들어가 유격대가 되어 장기전을 해야 합니다. 이유는, 곧 광주의 4연대, 군산의 12연대, 전주 3연대, 대전 2연대, 마산 15연대가 올 것인데 벌교, 학구, 광양을 공격하여 부대를 분산하면 절대 우리는 각개격파 당하고 북진해서 서울도 가지 못하고 패하고 말 것입니다.”

하고 김지회의 작전을 반대하였다.

 

만일 김지회가 홍순석의 작전대로 순천 입구의 고지를 점령하고 철통같이 방어전을 한다면 국군이 방어진지를 뚫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한다고 공포하였고, 이미 미24군은 일본에서 해체 중이었으며, 한국에 있는 미군 3개 사단은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의 전차를 동원하지 않고는 공군도 해군도 여수 순천을 탈환하기는 어려웠다.

 

김지회가 홍순석의 작전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큰 실수였지만, 김지회는 중앙당에서 학구를 거쳐 남원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당에서는 광주 4연대 일부, 군산12연대, 전주 3연대, 마산15연대 내의 남로당원 등에게 반란을 일으켜 이들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하라는 명령이어서 내일이 최대 고비라고 설명하였다. 결국 2개 대대는 별교, 학구, 광양을 점령하기 위해 순천을 출발하였다.

 

이때 남로당 연락부장 이현상은 순천에 도착하여 작전을 지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