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반란의 시작
당시 남로당에서는 군 장교에 대한 침투공작은 주로 사관학교 내에 이미 침투하였거나 포섭된 조직망을 통해서 남로당이 추천한 자를 무조건 입교시키는 경우와 이미 임관된 장교로 지인(知人), 동창(同窓), 혈연(血緣), 지연(地緣)등의 인간관계를 이용하여 포섭하였다.
제14연대의 경우, 남로당 전남도당위원회는 도당부(道黨部)에 군사부(軍事部)를 설치하고 군(軍)과 야산대(野山隊) 공작을 담당하고 있었다. 도당군사부에서 광주(光州), 목포(木浦)를 비롯한 각 시.군당 군사부에 사병추천 지시를 하달하면 이들은 면. 리까지 다시 지시를 하여 입대자 명단을 받아 도당 군사부에 제출하였다. 도당에서는 이 명단을 제14연대 공작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조직책(일명, 오르그) 박태남(朴泰南)에게 주고, 박(朴)은 제14연대 연대조직책인 연대인사계 지창수 상사에게 지시하여 대대, 중대, 소대로 배치한했. 후일 반란군 사령관 김지회도 함흥 출신으로 이때 침투된 좌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대 인사계에 대한 침투 및 포섭공작이 무엇보다 선행(先行)되었고, 제14연대의 경우 약 절반의 사병이 전남도당에 의해서 침투되었다고 한다.
김지회 중위는 이북 함남출신으로 함흥농고를 졸업한 후 월남하여 1947년 육사 3기로 졸업했고, 1948년 6월 1일자로 14연대에 전속된 자였다. 그는 당시 남로당 중앙당에서 관리하는 조직원인 연대장 오동기 중령의 신임이 두터운 장교였다.
1948년 5월 4일 여수에 제14연대가 창설되자 제1대대장 이영준 소령이 연대장으로 보임되면서 안영길 대위 이하 1개 대대병력이 제14연대로 전출되었다. 제14연대 기간요원 중 하사관 출신 50여 명이 14연대 근간이 되었다. 국방부가 지목한 여순사건의 주동자 지창수 상사도 그 중 한 사람이었고 그 역시 광주 제4연대 모병 때 입대한 자였다.
제14연대를 창설할 때, 제4연대 대원중 평소에 까다로운 행동을 하거나 사상이 의심스러운 구성원들 대부분이 제14연대의 창설요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14연대의 창설요원으로 뽑힌 800여명의 병사들은 차출케이스로 뽑혔다는 사실만으로도 동료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사상적으로도 연대의식과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
제 14연대 병영위치는 여수시에서 4km 떨어진 구 일본군 항공기지에 자리하였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농민들의 논밭과 마을을 강제로 징발하여 사용하고 있던 곳이었다.
여순사건 당시 연대장은 제4연대 연대장으로 있던 일본군 출신 박승훈(일본육사 제26기 출신)중령으로,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12일 전인 10월 7일자로 제14연대장으로 부임했다.
2. 반란의 그날
1948년 10월11일 제주도 4.3폭동이 악화되자, 육본에서는 제주도에 진압 사령부를 신설하고, 대구 6연대 1개 대대, 부산 5연대 1개 대대를 증파하였다. 그리고 10월15일 여수 14연대장에게 “제주도에 파견할 1개 대대를 조속히 편성하여 대기하라”고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사령부는 여수 14연대 1개 대대를 10월 20일까지 제주도에 도착시켜 작전에 임하라는 진압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14연대장은 즉시 1대대에 출동준비를 지시하고, 일본군이 쓰던 88식이나 99식 소총을 반납케하고 M1소총을 지급하였다. 이 소식은 즉시 14연대 남로당 책임자 지창수 상사를 통해, 여수 인민위원장에게, 여수인민위원장은 전남도당 책임자 김백동에게 보고하였고, 김백동은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에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이재복은 “즉시 출동을 저지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지창수 상사는 10월 16일 즉시 정락현, 유창남, 김근배, 김정길 들을 만나 반란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고, 이 내용을 부대 안의 식당에서 일하는 연락책 박태남에게 알려 주었다. 박태남은 즉각 여수 인민위원장에게 보고하였다.
이 사정을 모르는 육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을 14연대장에게 보냈다.
“14연대 1개 대대는 10월 19일 20시에 여수항을 출발 제주도에 도착하라. 육군참모총장 이응준 대령”
그러나 이 전보는 14연대장 박승훈이 보기 전에 우체국에서 일하는 남로당원에 의해 여수 인민위원장이 먼저 알게 되었다. 곧 인민위원장은 여수 지역의 남로당원을 동원하였고, 김백동과 이재복도 계속 지령을 내렸다. 이에 지창수 상사 등은 부대 내에서 반란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지창수는 부대 안의 남로당원 40명을 즉시 소집하여 제주도 출발을 위해 연병장에 모일 때 부대를 장악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계획을 식당에 있는 박태남을 시켜 여수 인민위원장에게 보고하게 했다. 여수 인민위원장은 ‘여수 남로당원을 동원하여 부대 앞 식품점 근처에서 모여 있을 테니. 식품점 주인에게 물건을 사는 척하면서 반란이 성공하면 신호를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신호가 ‘개는 잘 짖고 있다’였다. 인민위원장은 즉시 부대에 들어가서 합세하겠다고 하면서 암호는 “처녀”, “총각”이라고 알려 주었다.
48년 10월 19일 작전명령을 접수한 14연대 박승훈 연대장은 만약을 염려하여 ‘남로당에서 이 정보를 입수하여 저지할지 모르니, 19일 20시 출발을 21시로 연장해서 출발하라’고 지시하였다. 군장 검열은 2시부터 식사는 오후 6시, 부대 출발은 오후 9시에 하기로 하였다. 부대는 60밀리 박격포로 무장시켰다. 1대대장 김일령 대위는 출동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오후 7시 식사를 마친 연대장과 참모들은 여수항 군함에 군수물자를 선적하느라 부대를 출발, 여수항에 도착하여 선적을 감독하고 있었다.
오후 8시 집합 나팔이 울렸다, 1대대 장병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완전 무장을 하고 연병장에 모였다. 모든 전화선이 끊겼다. 남로당원인 40여명의 장병들이 서서히 1대대 장병들을 포위하였고, 일부는 탄약고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일부는 정문을 출입 통제하기 위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여수 남로당원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부대 앞 식품점에 모여 들었다.
19일 오후 8시 지창수 상사가 연단에 올라가 인원보고를 받고 있었다. 1중대 – 2중대 – 3중대 - 중화기 중대 순으로 집합하여 보고를 하고 있었다. 장병들의 실탄은 연병장에서 지급하기로 해서 실탄이 없었으나, 반란자들에게는 사전(事前)에 2크립씩 실탄이 지급되어 있었다.
원래는 김일령 대대장이 집합 보고를 받고 훈시를 하고 출발명령을 해야 하는데, 장교들은 9시에 집합한다고 해서 연병장에 나와 있는 장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를 의심하는 장병은 전혀 없었다.
이윽고 지창수 상사가 사열대에 올라가 선동을 시작하였다.
“지금 밖에는 경찰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고 있다. 이 때문에 비상소집을 한 것이다. 즉시 응전할 준비를 갖추어 경찰을 타도해야 한다. 지금부터 경찰은 우리들의 적이다. 총을 들고 저주스런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들은 동족이 상쟁하는 제주도로 출동하는 것을 절대 반대 한다. 경찰을 타도하게 되면 우리들은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위하여 궐기(蹶起)한다.
실은 지금 북조선 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38도선을 돌파하여 남쪽으로 진격 중이다. 우리들도 여기에 호응 북진하여 미국의 괴뢰를 소멸시켜야 한다. 지금부터 우리들은 인민해방군이 된다. 그래서 조국통일을 볼 때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연설을 마치자, 좌익들이 “옳소!”하며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탄약고에서는 탄약고를 점령하였다는 신호탄이 올랐다. 이때 하사관 2명과 사병 1명이
“안 된다! 우리가 어떻게 해방군이 된단 말인가? 경찰은 타도하고 제주도는 안 간다 해도 해방군은 안 된다!”
그러나 좌익하사관들이 이 세 명을 끌어내어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하였다.
우익 장병들이 이에 대항하려고 하였지만 좌익들은 실탄을 갖고 있는데, 실탄이 없어 대항할 수 없었다. 결국 한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모두 지창수와 함께 반란군이 되었다.
탄약고를 점령한 반란군은 신속하게 실탄을 운반하여 1대대 장병들에게 실탄을 공급하였다. 반란에 소요된 시간은 불과 10분이었다. 그리고 지창수는 의무장교만 빼고, 장교는 모두 사살하라고 명령하였다.
5중대 주번사관 박윤빈 소위(육사6기)는 9시에 비상나팔을 불어야 하는데, 8시에 불리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연병장으로 가는데 “누구냐?”하는 수하(誰何)를 당하였다. “나 주번사관이다. 무슨 일이 있는가?” 하자 반란군은 박윤빈 소위를 확인하고 총을 쏘았다.
박윤빈 소위가 쓰러지고, 1중대 주번사관 김정덕 소위도 똑같이 반란군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 구병모 소위는 반란군의 총격으로 창자가 밖으로 쏟아졌다. 그러나 박윤빈 소위는 극적으로 생명을 건졌다.
이를 알아챈 전용인 소위(육사5기)가 1대대장 김일령 대위에게 출동부대가 반란군이 되었다고 보고하니, 김일령 대위는 전용인 소위에게 “여수항에 있는 연대장에게 빨리 가서 보고 하라. 여기는 내가 수습하겠다”고 명령하고 권총을 빼들고 사무실을 나가려 했다.
반란군 20여 명은 2대대와 3대대 중대장실을 다니며 장교는 무조건 사살하고, 1대대장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너희들 누구냐?”하며 대대장 김일령이 일어서며 외쳤다. 그러자 반란군들은 총을 난사하여 죽였다.
총소리에 놀란 2대대와 3대대 장병들이 내무반에서 밖으로 나오려 하자, 반란군들이 막사를 점령하였다. 그리고는
“경찰이 부대를 공격하려 하고 있다. 빨리 탄약고에 가서 실탄을 가지고 집합하라!”
고 명령하자, 2대대와 3대대 장병들은 영문도 모르고 실탄을 지급받아 연병장에 모여 반란군이 되었다. 여기에 반항하는 자는 무조건 사살하고 장교들을 죽이니 장병들은 영문도 모르고, 지휘할 장교들도 없어 겁에 질려 모두 반란군이 되고 말았다.
반란군은 1대대장 김일령 대위, 2대대장 김순철 대위, 3대대장 이봉규 대위, 연대 작전주임 간성윤 대위, 1중대장 차지영 소위, 2중대장 김용관 중위, 진도영 중위 외 3명(육사3기) 김록영 중위 외 7명(육사5기), 이병순 소위 외 6명(육사6기) 이상 우익 장교 20여 명을 죽이고, 2대대와 3대대까지 반란군으로 만들어 14연대 2,300여 명이 완전히 반란연대가 되었다. 하사관과 사병도 총 40여 명이 살해되었다.
한편 14연대 정문 앞 식품점에서 반란이 성공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여수 남로당원 23명은 “개는 잘 짖고 있습니다.”하는 연락을 받고, ‘인민공화국 만세!’ 를 부르며 부대 안으로 들어가 무장하고 반란군과 합세하였다. 그 수가 약 2,200명이었다.
소결론 : 좌파들은 이상과 같은 14연대 반란을 ‘여순 봉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 순천 역사(驛舍) 앞에 안내판을 세운 자들은 분명 지창수, 김지회 등과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다.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다섯명이 여수와 순천을 찾아가 반란이 아니라 항쟁이라고 고칠 것을 강요한 일도 있다. 이런 자들이 우리와 더불어 자유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국가는 이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여야 하고, 이러한 좌익들은 모두 대한민국 국적(國籍)을 박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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