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맺음말
- 반란이 남긴 것 -
1) 6.25 남침 실패의 두 가지 교훈
전쟁이 끝난 후 북한 김일성이 땅을 치고 후회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가 6.25 때 서울을 점령하고 3일을 머문 일이다. 서울 점령 후 무려 3일. 만약 그 기간에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곧바로 부산으로 진격하였더라면, 미군과 유엔군은 군대를 파견할 시간을 벌지 못하였을 것이고, 남한은 말 그대로 적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서울에서 3일을 기다렸다. 남침만 한다면, 30만 남로당원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박헌영의 말만 믿은 것이다. 김일성은 이 폭동이야말로 인민군의 남한 침략이라는 전쟁 범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3일 동안 제주 4.3 사건 같은 폭동을 기다렸음이다. 그리고 이승만의 항복을 기다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誤判)이었고 실패였다.
또 하나는 ‘왜 남로당이 합법적인 의회 진출을 꾀하지 않고, 제주 4.3 폭동과 여순반란 사건을 일으켰던가.’ 라는 자기반성이었다.
만약 남로당이 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에 참여하였더라면, 최소한 제주에서만도 2석은 차지하였을 것이고, 전국을 통틀어 남로당 의석수는 제1당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남한은 전쟁 없이도 적화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사가(史家)들의 판단이다.
당시 정치 상황을 살펴보자. 남로당은 46년 10월 대구폭동 사건을 즈음하여 폭동을 지휘하던 주요 간부들이 잠적하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결성한 정당이다. 46년 11월 23일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이 연합하여 남로당을 결성하여 이를 박헌영이 주도(主導)하였고, 북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로당이 탄생하였다.
그 후 박헌영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월북하였고, 남로당은 불법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평양으로 가지 않고 해주에서 강동정치학원을 열었다. 그리고 수많은 월북자들을 빨치산으로 양성하는 한편 남한 좌익들의 파업과 폭동을 지휘하였다.
특히 6.25 전쟁 전(前),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헌영이 남파한 유격대의 활약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눈앞에 마을을 바라보면서 얼어죽은 여빨치산의 최후도 바로 그 당시의 일이었다.
그런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刻印)시켜주기 위해, 그리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 제주 4.3사건이었다. 제주 4.3 사건의 주모자 김달삼은 남로당 중앙당 선전부장 강문석의 사위이자,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출신이었다.
2) 전교조와 남로당
여기에서 잠시, 당시의 상황 속에서 오늘날 학생을 세뇌시키고 남한 적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전교조라는 존재와 관련된 문제를 지적해 보자. 해방 이후 남로당에는 적화사업으로 수많은 붉은 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포섭하여 세뇌시켜 폭동의 중심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 예로써, 제주 4.3에 이어 여순반란사건에도 ‘붉은 교사’들이 양성한 학생들이 국군과 싸웠다. 당시 기록을 보면 김지회, 지창수를 비롯한 반란군에 가담한 남로당 무장 세력은 모두 1,000여명, 여기에 학생을 비롯한 동조자가 무려 1,200명이었다. 도합 2,200명이었다.
“국군 아저씨, 잠깐 이리 와 보세요.”
다가간 국군에게 치마폭 속에 숨긴 권총을 꺼내든 여학생들. 총이 발사되고, 사망한 동료를 본 국군들. 이어 여수가 탈환이 되고, 국군은 이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그 청순한 여학생에게 총을 들려준 이들이 바로 ‘붉은 교사’들이었다. 혹자(或者)는 여학생들의 국군사살 사건이 거짓이라 하나, 국방부 전사(戰史)는 이를 사실로 규정하고 있다.
그 후 지리산으로 백암산으로 선생님을 따라 입산(入山)하여 빨치산이 되어 비참하게 죽어간 학생들. 이들을 누가 비극의 나락으로 끌어갔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너와 내 자식을 가르치는 교사들이었고, 지금도 그런 교사들이 학교에서 우리 학생들 곁에 있다고 보면 된다. 그들이 바로 지금의 전교조라는 것은 이젠 널리 알려진 상식(常識)이다.
여담(餘談)을 더해 본다. 전교조는 태극기에 대해 경례를 하지 않는다. 소위 민중의례를 한다는 것인데, 그러나 묵념은 한다. 웃기게도 그 묵념의 구호가 바로 이렇다.
“통일을 위해 순국하신 선배 교사 선생님들께 묵념을 올립시다.”
그 선배들이란, 김달삼 이하 여순반란 때 활동하던‘붉은 교사’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김달삼은, 1948년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박헌영의 지령을 받아 3월초 제주 조천면 신촌리에서 19명의 간부들과 폭동을 모의하였다. 그리고 김달삼은 제주 경비를 위해 파견된 9연대 안에 침투해 있던 프락치들과 남로당 유격대원들을 동원, 4월 3일 새벽 두 시에 제주 도내 12개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그 비극을 시작하였다.
이때 김달삼에 의해 학살(虐殺)당한 사람 중에는 14살(문숙자), 12살(문정자) 소녀들도 있었다. 학살 대상은 우익인사들과 그 가족, 경찰과 대청단원들의 가족들이었다. 살해 도구는 모두 죽창이었다. 어린 소녀들의 순결한 이름과 여린 목숨까지 그들은 처단해야할 적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 후 김달삼은 9연대장 김익렬과 평화 협상을 맺고, 북한 정부 수립을 위한 8.25 선거일에 맞춰 판문점을 넘어 북으로 갔다. 이때 김달삼이 가지고 간 것이 제주도민들이 인민공화국 수립을 찬성하는 투표용지였다. 당시 제주도 8만 유권자 중에서 무려 5만이나 되는 숫자였다.
이후 제주도는 이덕구에게 맡겨지고, 이 자가 1949년 6월 7일 사살될 때까지 1,700명에 이르는 우익 계열의 제주도민들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육지 사람들이 우리 형제를 죽인다.’고 선동하여, 그 결과 선량한 제주도민들이 지역적 온정(溫情)에 합세하였고, 수많은 군경을 습격하여 죽였다. 그리하여 그 보복으로 무려 1만 이상이 죽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로 파견될 14연대가 마침내 제주도 파견을 거부하면서 여순반란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이 토벌되면서 대한민국은 형제 동포들이 적과 적으로 나뉘어 6.25가 끝날 때까지 죽이고 죽이는 지옥도(地獄道)를 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주의 비극이 6.25 침략을 좌절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한 살극(殺劇)을 경험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로당과 빨치산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남로당을 탈당하였다. 그리고 군대는 정풍운동이 일어났다. 군대 내의 좌익들을 모두 색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6.25가 일어났어도 군대와 국민들은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게 6.25는 끝났고, 북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3) 좌익들의 제도권 진출 음모
남침 전쟁의 실패 이유를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김대중 이후의 좌익들의 행보(行步)이다. 김대중은 집권 초기에 자생(自生) 빨갱이로 이름이 높은 민노당을 합법화시켰다. 그리고 날치기를 하면서까지 전교조도 합법화시켜 주었다. 제주 4.3 사건의 실패를 거울삼은 것이다. 그 결과 좌익들은 모두 정치 제도권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어 국가보안법 폐지 및 미군철수와 연방제 통일운동이 이들에 의해 결합되고 진행되었다. 더구나 이 모든 것들은 법과 권력의 보호를 받으며 펼쳐졌다.
정치권력뿐만이 아니었다. 교육 문화 행정부까지도 좌익들의 무대가 되었다. 반미 정서를 유발시키기 위해 그들은 영화도 만들고 문학작품도 주도하게 되었다. 교육은 전교조가 장악하여 빨치산을 추모하였다. 통일부는 김정일 정권의 선군정치를 돕기 위해 인민군을 먹여 살릴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400만석 보내기 법제화 운동도 펼쳐지고 있었다.
좌익 세상을 위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6.25 당시 빨치산이었거나 동조하였던 당사자들에 대한 명예도 신원도 회복시켜 주었다. 빨치산과 내통한 천씨 일족에 의해 무려 50여명이나 학살당한 전북 무장 죽림마을 사건 주모자 신원회복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영암 금정에 세워진 추모비도, 제주 4.3사건 기념공원도 바로 다름없는 ‘빨갱이들의 명예 회복’ 그것이었다.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은 더욱 정교한 공작을 펼쳤다. 그는 민주의 이름으로 가장(假裝)한 모든 사건에 명예를 부여하였다. 남민전과 같은 대한민국 내 폭동음모 사건도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하고, 정부 부처 각 요로(要路)에 이들 386 주사파 좌익들을 배치하였다. 이들이 지금 대한민국 행정부와 각부 부처(部處)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왜 김대중이 민노당과 전교조 같은 무리들을 합법화 시켰는가.’에 대한 답을 남로당의 실패에서 찾았다. 만약 제주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5.10선거에 참여했더라면? 그리고 결정적인 시기에 정치권력과 남로당 유격대, 그리고 국군과 경찰에 침투한 프락치들을 동원했더라면?
그래서 김대중은 이를 깨닫고, 한총련으로부터 출발한 주사파들을 합법화시켜 살려내어 정치권으로 인도해 왔다. 그리고 이들이 성장하여 오늘날 결정적 시기를 노리며 암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좌파 척결의 시작
6.25 남침의 비극과 제주 4.3 폭동, 여순반란사건의 주모자 박헌영은 1956년 3월, 소련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하기 직전 대성산 임시 사형장에서 김일성에 의해 총살됐다. 죄명(罪名)은 ‘미 제국주의 고용간첩과 정부 전복 음모’였다. 그때 그의 나이 53세, 참으로 죄 많은 최후였다.
그 전에 여순반란사건부터 실질적인 지도를 하였던 이현상도 지리산에서 김일성이 보낸 밀사에게 사살당했다. 한국판 마타하리라는 김수임의 애인이며 박헌영의 오른팔이었던 이강국도 고문 끝에 총살됐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일으킨 박낙종은 목포감옥에서 각각 사형당했다.
그 후 60년, 그러나 악명(惡名) 높았던 남로당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재기를 노리고 깊이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드디어 김대중 시대를 맞아 그들은 민노당으로, 실천연대로, 한총련으로, 전교조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국회로 진출하여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활동을 벌이는 한편, 나라 전체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으로 물들이기 시작하였다. 민노총은 당시 남로당 소속으로 전국 노동자를 이끌던, 전평(全平)의 후예라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으며, 온갖 노동자 농민단체를 껴안고 좌익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이들이 반드시 폐지시키고자 노리고 있는 ‘국가보안법’은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 당시는 남로당이 합법적인 정당이므로 처벌할 수가 없었다. 미국도 오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어리석게도 좌익들의 활동을 묵인하고 있었고, 살인 파업과 같은 극렬 노동운동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라 안팎에서 소요(騷擾)와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처벌하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 1948년 12월에 제정된 것이 ‘국가보안법’이었다.
이 국가보안법은 6.25 전부터 좌익들이 철폐를 주장하던 것이었고, 미군철수 역시 소련군의 북한 퇴각 이후부터 줄기차게 주장하던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주장이 모두 지금도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북의 지시를 받는 남로당의 후예들, 살아있는 주사파 좌익들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날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거짓보도를 통해 발생한 엄청난 좌익들의 음모와 광란(狂亂)을 보았다. 그리고 동맹국 미국을 적으로 알고 있는 세뇌된 학생들이 군에 입대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최근 정부에 반기를 든 해병대 대령도 보았다. 국군에 좌익들이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사법부에 침투한 좌익운동권 판사들의 만행도 지켜보았다.
이들은 모두 14연대 반란 당시 군에 좌익들이 침투하던 방법과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젠 좌익정권 10년 동안 적화된 대한민국 국군을 정화(淨化)해야 한다. 6.25 이전 정풍운동의 재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이 길러놓은 제도권 내에 있는 정치좌익들을 반드시 척결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민주화를 가장(假裝)한 ‘진보라는 이름의 민중민주 좌익’들도 걸려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좌익들은 치열하게 탄핵을 노리고 있다. 필자(筆者)는 이번 정권에서 밀려난 전교조를 비롯한 좌파들이 정체를 숨기고 정부 안으로 기어들고 있음을 제보 받은 바 있다. 후일 이들로 인해 발생할 불행은 촛불시위를 능가할 것이다.
그리하여 좌파들은 끊임없이 남남갈등을 획책하고 있었다. 정부의 모든 정책을 반대하여 나라를 파탄 내놓고 그 책임을 물을 것이었다. 세상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고, 국군을 적으로 호도하고, 양민 학살을 주도한 빨치산 동지를 ‘감싸주어야 할 동포’로 위장시키고 있었다. 심지어 문재인은 빨치산에 의한 양민학살까지 국군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보상을 해 주었다.
여순반란이 진행되면서, 여순 인근 지역에선 비합적으로 지하에서 활동하던 "민애청(民愛靑)", "민주여성동맹(民主女性同盟)", "합동노조(合同勞組)", "교원노조(敎員勞組)", "철도노조(鐵道勞組)" 등이 나타나 제각기 간판을 내걸었다.
우리는 여순반란사건 당시에도 교원노조가 있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여순지역만 이러했으니,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은 단체들이 있었겠는가.
철없는 어린 학생들은 교실에서 전교조 교사들에게 의해 빨치산 추모제며 촛불시위 집회에 동원되고 있었다. 좌익들은 미국을 적으로 취급하면서도 자식들만큼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남의 자식들은 반미운동이나 진단평가 반대, 반정부운동에 동원하면서 사상의 노리개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김대중 이후 노무현에 이르러 엄청나게 번식한 좌익들이 결정적 시기에 벌일 폭동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의 아이들도 여순반란사건에 등장한 학생들처럼 좌익 엄호세력으로 이용당할 것인가.
필자(筆者)는 지금 마치 참혹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이럴 수가 어디 있겠는가.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라는 자들이 대한민국을 부정한다? 어디 이럴 수가 있는가. 이제 우리는 2024년을 보내고 있다.그리고 북한 김정은은 통일포기선언을 하였다. 임종석에 이어 문재인도 통일을 포기하고 두 국가체제로 가자고 한다. 그리고 헌법 영토조항도 고치자고 한다. 반역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남한 내 민주당 자생간첩들이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 다만 추상같은 단죄(斷罪)를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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