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일반상식

3. 반란의 진행- 반란군 여수 점령과 학살-

太兄 2024. 10. 10. 20:29

3. 반란의 진행

- 반란군 여수 점령과 학살-

 

지창수가 반란에 완전히 성공한 시간은 20일 새벽 1시로 약 5시간이 걸렸다. 반란 소식을 듣고, 고인수 여수경찰서장은 200여 명으로 방어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은 여수경찰서를 순식간에 점령하고, 20일 오전 9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세상을 만들고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걸었다. 여수시 남로 당원 600여 명은 무장을 하고 여수시를 이 잡듯이 뒤져 경찰과 우익을 찾아 21일까지 400여 명을 죽였다고 전해진다.

 

반란군들의 순천 학살 당시, ‘울밑에선 봉선화를 부르고 숨진 한 성악가의 최후가 상징적으로 남는다. 조정래는 그의 소설 태백산맥에서 바로 이 장면을 그린다. 조정래는 덤덤하게 이 장면을 그렸으나, 이것은 반란군의 학살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당시 이 반란군에 가담한 학생들이다. 철없는 어린 남녀 중학교 학생들이 반란군에 가담한 것은 당시 학교에 침투해있던 좌익교사들에 의해 세뇌된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특히 여수중학교는 교장부터 좌익이었다. 이름이 송욱이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순천중학교 역시 다수의 학생들이 반란군에 가담하였다. 이는 좌익들의 군중선동에 의한 결과였지만, 혁명에 대한 막연한 동경(憧憬)과 순천 여수 지역을 휩싸던 군중심리에 의해 휩쓸린 결과였다. 이를 증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 좌익이념은 유행 같은 것이었습니다. 혁명과 투쟁이란, 모험과 영웅을 꿈꾸는 젊은 피를 자극하기에 얼마나 좋은 소재입니까. 뭔가 멋있어 보이는 공산혁명이라는 극악한 독물(毒物)을 우리는 동경하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후일 진압군이 순천과 여수로 진격할 때, 골목길에 숨어있던 여학생들이 국군을 유인하여 총으로 쏘아 죽였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그 철없는 여학생들. 사람을 죽인다는, 그것도 동포를 죽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몰랐던 여학생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죄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을 가르치지 않고, 어린 것들을 이용하여 그런 무서운 일을 저지르게 한 자들이 바로 빨갱이라 불리우는 좌익들이었다.

 

그리고 더 가증스러운 것은 당시 반란군들이 지리산으로 후퇴할 때, 이 어린 것들을 엄호세력으로 이용하였다는 점이다. 모두가 도망친 여수 순천 시내에 남아서 국군에게 총을 쏘던 학생들은 반란군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죽어갔다.

 

순박해 보이는 여학생들도 국군에게 총을 쏘아대는 마당에서 토벌이 평화로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시 좌익들은 여수 순천에서 엄청난 숫자의 우익인사들을 학살하였다. 그런데도 그 빨치산 학살은 묻어두고, 학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국군과 경찰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반란군 진압과정, 반란군 토벌과정에서 발생한 빨치산 부역자 처형을 양민 학살로 둔갑시키고, 모든 죄를 경찰과 국군의 범죄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다음은 여수 순천지역 학살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에 대한 신뢰를 의심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에 그 출처를 밝힌다.

 

이날 17:00경 반란군은 순천의 전 시가지를 완전 점령하고 좌익분자들과 중고등학생을 선동하여 무장시키고 이들로 하여금 반동분자를 색출하게 하여 500여 명을 인민재판 아래 학살하였다.


특히 순천지역 일대에서는 경찰관 400여명이 반란군 진압작전을 펼치던 중에 전사하거나 반란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이렇게 반란군의 횡포가 극에 달하게 되자 민심은 동요되고, 소박한 주민들은 실제로 공산정권이 출현한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으며, 반란군의 선동과 강압으로 이들에게 가담하는 자가 속출하여 무장폭도들의 수는 수천 명에 달하였다.

순천에서 세력을 확장한 반란군은 3개 부대로 재편성하여 1천여 명으로 편성된 주력은 북쪽의 학구(鶴口) 구례 방면으로, 1개 부대는 동쪽의 광양(光陽)방면으로, 1개 부대는 서남쪽의 벌교(筏橋), 보성방면으로 분진(分進)하면서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경찰관을 살해하였다.

한편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반란군의 일부는 지방 좌익세력과 합류, 인공기를 게양하고 순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인민행정(人民行政)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모든 우익인사들을 즉석에서 살해하거나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400여명을 처단하였다.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구판 1), 1967, p 458)

한편 여수에 "인민공화국"을 만든 좌익세력은 20 15:00시경 인민대회(人民大會)를 중앙동광장에서 열고 약 4만여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이용기(李容起)를 비롯한 5명의 의장이 대회를 진행하였다. 이 대회에서 좌익단체인 노동조합대표, 농민조합대표, 여성동맹대표, 청년대표의 "인민공화국 수호"를 외치는 연설이 있었고 5개 항목의 결정서를 채택했다.( 김남식, 위의책, p 452)

ㅇ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ㅇ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ㅇ 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
ㅇ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ㅇ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이러한 내용의 결정서를 채택한 인민대회는 막을 내리고 인민대회에 모였던 시민들은 곧이어 군중시위에 들어갔다. 좌익 군중들은 여수 군청을 비롯한 각 기관들을 접수함으로써 하루 만에 여수시내는 좌익세력에 의한 인공치하(人共治下)가 되고 말았다.

한편 비합적으로 지하에서 활동하던 "민애청(民愛靑)", "민주여성동맹(民主女性同盟)", "합동노조(合同勞組)""교원노조(敎員勞組)", "철도노조(鐵道勞組)" 등이 나타나 제각기 간판을 내걸었다. 그 이튿날(10.21) 여수시내 좌익분자들은 한독당(韓獨黨)을 제외한 한민당(韓民黨),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등의 간부와 단원들을 반역자로 적발, 체포하였으며 이들은 이날 인민재판을 개최하고 제일먼저 여수경찰서장 고인수(高寅洙)를 비롯한 사찰계 직원 10여명을 처형한 것을 필두로 수십 명을 숙청하였다.

특히 이들은 여수경찰서 소속의 여순경 2명을 붙잡아 대낮에 발가벗긴 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부분에 총을 쏘아 죽이고, 한명은 총알이 아깝다면서 죽창으로 국부를 찔러 죽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엔터프라이즈, 1988 5월호) 그리고 그들은 "여수일보"를 접수하고 "여수인민보"라는 좌익신문을 발간하였다.

이들의 우익세력에 대한 인민재판은 계속되어 처형된 수가 첫날만 4백여 명을 넘었다. 여수 지역 통틀어 반란군에 희생당한 사람은 모두 1200여 명이었다.

좌익 반란군이 저지른 학살 및 피해 상황
피해 내용 여수 순천 ()
학살당한 경찰 및 우익 인사와 그 가족 1,200 1,143 2,343
부상자 1,150 모름 1,150
가옥 피해 154 18 172
행방불명자 3,500 818 4318
국군피해 장교 21, 하사관 및 사병 42

반면, 반란군은 모두 392명이 사살되었고, 포로는 1,512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