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종군 기자 3인이 전한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 (2)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27회>
지난 회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1)에 이어서 이번 회에서도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반 한강 인도교가 폭파될 때 현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났던 미국인 종군 기자 3인의 기록을 꼼꼼히 읽어보자.
1993년 KBS 역사 다큐멘터리, 상상으로 신화를 창작
1993년 KBS에서 제작·방영한 다큐멘터리극장 “한강 인도교 폭파와 부산 정치파동”의 첫 장면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반 경의 상황을 “재현”한 영상으로 시작된다(전체 재현 영상, 26분 40초~28분 01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비가 쏟아지는데, 한강 인도교 상판 위에는 인파에 밀린 피난민들이 봇짐을 인 채로 소걸음을 하고 있다. 지게에 실려 가는 한 어린 소녀가 힘없이 왼손에 든 주먹밥을 먹으려는 순간, 다리 위로 노란 화염이 치솟는다.
다큐멘터리는 배경에 깔리는 두 군인의 대화로 폭파 직전의 상황을 묘사한다. 현장에서 폭파 단추를 누르기 직전 병사는 폭파할 수 없다고 울부짖지만, 상관은 “명령이다!” 외치며 폭파를 종용하고, 피난민 다수가 폭살될 것임을 알면서도 병사는 어쩔 수 없이 폭약 펌프를 누른다. 이 대화에는 피난민들이 가득 차 있는 한강 다리를 군인들이 뻔히 보면서 상부의 명령에 따라서 다리를 폭파했다는 주장이 깔려 있다. 혼비백산 달아나던 국군이 피난민이 몰려드는 사실을 알면서도 폭탄을 터뜨렸다는 소위 “양민 학살”의 신화다.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임에도 이 재현 장면은 정확한 자료 분석도, 현장 답사도, 증언 수집도 없이 거친 상상력을 발휘하여 지어낸 허구일 뿐이다. 이 영상을 보면 당시 한강 인도교 위에는 차량이 단 한 대도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피난민이 인파를 이루고 있다. 반면 여러 증언을 취합해 보면 그 순간 인도교 상판 위에는 군용 차량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군용트럭은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있었으므로 폭파 직전 다리 위가 칠흑 같은 어둠일 수도 없었다. 폭파 지점은 중지도 남단 한강 인도교의 제2, 제3 상판이었다.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누구든 가장 중요한 1차 사료를 우선 정독해야 한다. 당일 발파 지점에서 불과 20야드(19미터) 떨어진 제1 상판 위에서 지프차를 타고 있던 3인의 미국 종군 기자들의 기록이 바로 그러한 1차 사료이다. 이제 다시 그들의 기록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인도교 북쪽 진입로 상황
6월 27일 저녁 7시경 김포 공항에 도착한 4인의 미국인 종군 기자들은 공항에 방치돼 있던 미국인 차량 3대를 몰고서 용산의 주한 미 군사고문단으로 갔다. 그 4인 종군 기자 중에서 유일한 여성 마거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5-1966) 기자는 군사고문단의 스털링 라이트(Sterling Wright, 1907-2009) 대령과 함께 움직였다. 나머지 3인은 군사고문관 건물에서 잠시 눈을 붙이려는데 한 군인이 황급히 달려와서 빨리 한강 다리를 건너서 수원으로 피난을 가라고 했다. 긴급한 상황에서도 3인의 종군 기자는 취재를 위해서 한국 육군사령부에 잠시 들렀고, 결국 그 때문에 한강 인도교 폭격 현장의 증인이 되었다.
육군사령부 건물에서 세드베리(George Sedberry) 소장에게 북한군 탱크가 서울로 진입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3인의 종군기자는 황급히 건물을 나와서 지프를 거칠게 몰며 한강을 향해 달려갔다. 이때는 도시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발길은 모두 한강 쪽을 향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컴컴한 밤중이었다. 다음은 비치의 원문 번역이다.
“우리는 더 빨리 가기 위해서 큰길 왼편으로 차를 몰았다. 정체는 거의 없었지만, 길이 다리로 좁혀 들 때(as the street narrowed into the bridge) 우리는 갈수록 더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몰려드는 피난민들, 소달구지들, 트럭들, 자전거들 사이에 끼었다. 우리의 지프는 거의 멈춰 있는 듯 느리게 움직였다(Our jeep could move no faster than the slowest). 걸어가도 더 빨랐을 것이다.”
지프가 용산 방향에서 인도교 북쪽 진입로까지 가는 상황의 묘사다. 비치는 북쪽 인도교가 시작되는 지점을 “도로가 다리로 좁혀 들 때”라고 적었다. 바로 이 지점에 피난민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길이 다리로 좁혀” 든 곳은 다리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아마도 아래 지도의 “A” 지점 부근으로 추정된다. 1980년대 한강의 36km가 준설되면서 한강의 수량이 대폭 늘어나서 지금은 노들섬(중지도) 북쪽으로도 수량이 가득하지만, 1950년 당시엔 물은 없고 넓은 모래톱이 펼쳐져 있었다. 비치와 기브니 두 명 다 중지도를 지나 인도교 남쪽 다리 제1 상판 위에 차가 정차된 바로 그 지점(아래 지도의 B)을 다리 중간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기브니의 1950년 7월 10일 자 타임지 기사 속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서 피난민들이 등장한다. 그는 “큰 철제(big steel) 한강 인도교를 향해 남쪽으로 가는 길에서 체증이 심했다(Traffic was heavy on the road running south to the big steel Han River bridge)”고 했다. 위의 지도에 표시된 A 지점쯤으로 추정된다. 바로 다음 문단에 중요한 대목이 등장한다.
“군사적 궤멸 흔적은 없었다. 후퇴 병력을 포함해 대다수 병사는 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헌병 지시에 따라 차량들은 엄격하게 줄을 맞추고 있었다(Guided by MPs, automobiles kept strictly in line). 무질서는 오직 행진하는 군대 행렬 밖의 수천 명 가난한 피난민들, 머리에 봇짐을 인 여인들, 가사용품들을 지게에 맨 사내들, 그들 사이에 있었다. 김포 공항에서 서울로 갈 때 느껴졌던 시민들의 침착함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이어지는 문단에서 기브니는 다시 상황을 되짚어 묘사한다.
“다리에 이를 때까지는 교통이 원활했다. 다리에서 속도가 느려지더니 곧 멈춰 서버렸다. 우리 지프차가 군인들을 가득 태운 거대한 2.5톤 트럭(6 by 6)과 다른 지프차들 사이에 바싹 끼어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미 거의 다리 중간에 와 있음을 알게 됐다. 우리는 지프에서 내려서 대체 왜 막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앞으로 걸어갔지만, 다리 위로 쏟아져서 밀려드는 피난민들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우리는 지프로 가서 기다렸다. 경고도 없이 역겨운 오렌지색 거대한 불길이 하늘을 밝혔다. 우리 바로 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우리가 탄 지프가 폭풍(爆風)에 들려서 15피트(4.5미터) 뒤로 밀려났다.”
기브니의 기록에 오류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그는 “거의 다리 중간(almost halfway over the bridge)”에서 정체가 심해져서 상황 파악을 위해 차 밖으로 나갔다가 “다리 위로 쏟아져 들어오는 시민들”에 휩싸였다는 얘기다. 이 문단에선 “거의 다리 중간” 지점이 중지도로 보인다. 중지도까지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는 증언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기브니의 기록이 비치의 증언과 어긋난다는 점이다. 비치는 인도교 진입로에서 몰려드는 피난민을 보았고, 그 장면을 “소달구지들, 트럭들, 자전거들”을 열거하며 상세하게 묘사했다. 기브니가 “쏟아져서 밀려드는 피난민들”을 중지도가 아니라 위의 지도 A지점에서 보았다면 비치의 기록과 부합한다. 만약 기브니의 말대로 중지도에 피난민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다면, 왜 비치와 크레인은 그들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을까? 상식적으로 그런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종군 기자라면 피난민의 동향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다. 상식적으로 전쟁 상황에서 전사하는 군인들보단 희생당하는 민간인의 모습이 더 특종감이기 때문이다.
세 사람의 기록을 세밀하게 대조해 보면, 기브니의 기록보다는 비치의 기록이 더 정확해 보인다. 기브니가 중지도가 아니라 인도교 북쪽 진입로에서 길이 막혀버렸을 때, 차 밖으로 나가서 목격했던 장면을 사후에 착각하여 중지도 부근처럼 묘사했을 수도 있다. 세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 라이프지에 게재한 축약본에서 기브니는 자신이 쓴 타임지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좀 더 분명하게 요약했다. “교통이 빨리 움직였지만, 다리에서 멈춰섰다. [다리를] 반쯤 지났을 때, 지프가 2.5톤 트럭 뒤에 끼어 있게 되었다(Traffic moved quickly, but at the bridge it stopped. Half-way across, our jeep was wedged behind a huge six-by-six truck full of soldiers).”
기브니 스스로 차가 정차했던 위치가 인도교 북쪽 진입로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도록 기록했다. 기브니가 “다리에서 멈춰섰다”고 말한 그 지점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비치는 “우리는 몰려드는 피난민들, 소달구지들, 트럭들, 자전거들 사이에 끼었다”고 썼다.
둘째, 기브니의 묘사가 진정 정확했다면 비치는 왜 1954년 “서울 탈출기”를 출판할 때 최종적으로 기브니의 기록을 반영해서 기록을 수정하지 않았을까? 1954년 최종 기록을 남길 때 비치는 기브니의 타임지 기사를 반영하여 자신의 기록을 바꾸기보단, 더 분명한 언어로 북쪽 진입로가 막혔음을 밝혔다.
셋째, 만약 중지도 폭파 현장 부근에 그토록 많은 민간인이 운집해 있었다면, 어떻게 그 중요하고도 놀라운 장면에 대해서 비치와 크레인과 같은 베테랑 종군 기자들은 일언반구 언급조차 하지 않았겠는가? 상식적으로 중지도에 피난민들이 몰려 있었다면, 세 사람 모두 그 피난민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기록했어야 정상이지만, 비치와 크레인은 중지도 지나 인도교 남쪽 상판 위에선 피난민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중지도 지나 인도교 상판 위의 정체
비치는 “다리 중간(in the middle of the bridge)”에서 차량 행렬이 완전히 멈춰 선 상황을 다음과 같이 쓴다. 여기서 다리 중간이란 문맥상, 또 정황상 인도교 전체의 중간 지점, 곧 중지도를 가리킴이 틀림없어 보인다.
“다리 중간에서 전체 행렬이 완전히 멈춰섰다(the entire column came to a halt). 우리는 지프 안에 앉아서 기다렸다. [북쪽에서 북한군이 쏘아대는] 중화기의 괴성이 더 가깝게 들렸다. 그 소리는 심히 고통스러웠다. [막힌 차량의] 행렬(the column)이 움직일 수만 있다면, 안전한 곳은 불과 100야드(91.44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공산 세력의 탱크가 만약······
크레인은 격하게 핸들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사령부를 들르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다리를 다 건넜겠다.’
그건 사실이었다. 내가 사령부에 들르자고 했었다.
‘지금은 뭘 했는지를 생각할 때가 아니라 대체 뭘 해야 할지 생각할 때잖아.”
나는 뒷자리에서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앞의 크레인 옆자리에 앉은 기브니는 슬기롭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 우리 앞에서 온 세상이 폭발하는 듯했다. 오렌지색 불빛이 솟는 장면과 그 불빛을 배경으로 트럭 가득한 한국 군인들을 본 기억이 난다. 트럭이 허공으로 들렸다. 우리가 탄 지프도 뒤로 밀려났다.”
여기서 완전히 멈춰 선 전체 행렬(the entire column)이란 용어에 주목해야 한다. “행렬(column)은 군사용어로서 정연하게 이어지는 군용 차량의 행렬을 의미한다. 같이 현장에 있던 크레인은 1950년 6월 29일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우리와 함께 다리를 건너가던 “트럭 행렬의 군인들(the soldiers in the truck columns) 허둥대지 않았다”고 했다. 중지도를 지났을 때는 차량들이 다리를 관통해서 가기 위해 길게 줄을 맞춰서 늘어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93년 KBS 다큐멘터리가 재현한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반의 한강 인도교 장면, 곧 차량은 단 한 대도 없는 다리 위에 피난민들이 인파를 이루고 멈춰 서 있듯 느리게 걸어가는 그 영상은 역사적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폭파 직후 3인은 지프에서 내려서 일단 상판 위에 엎어졌다. 더는 폭음이 이어지지 않았고, 야릇한 정적 속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잠시 후 3인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지프를 몰고 다시 다리를 건너가려 했다.
눈가에 상처를 입어 출혈이 심했던 크레인은 조수석에, 부상이 덜 심했던 기브니는 운전석에 앉았다. 전혀 상처를 입지 않은 비치가 다리 앞으로 걸어가면서 수신호로 지프차를 인도했다. 다리는 이미 파괴되었지만, 혹시나 다리 한쪽에 덜 부서진 곳이 남아 지프가 통과할 수 있을까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뒤집힌 트럭, 널브러진 시신들을 지나 다리 위로 걸어가던 비치는 마침내 절단면에 이르렀다. 상판이 잘려 나간 다리 아래로 그의 눈앞에 시커먼 강물이 보였다.
할 수 없이 3인은 지프를 버리고 인도교 북쪽 용산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누군가의 안내로 한 미군인 집으로 찾아갔다. 그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휴식을 취한 3인은 그 집 마당에 정차해 있던 두 대의 지프를 몰고서 다시 수원으로 향했다. 폭파 현장에서 북쪽으로 16킬로미터쯤 올라가서 그들은 강을 건널 수 있게 됐다. 한 뱃사람(boatman)이 손수 만든 엘에스티(homemade LST, 상륙용 수송선)가 운행 중이었다. 그들은 뱃사람에게 미화 10달러를 주고서 트럭을 엘에스티에 싣고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임시 한미사령부가 세워진 수원에 다다른 세 사람은 그 즉시 사고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 기사를 작성하여 캐나다와 미국의 본사에 송고했다. 곧바로 윤전기를 통과한 기사는 바로 당일과 다음 날 미국과 캐나다에 뿌려졌다.
인도교 폭파 사건의 가장 중요한 1차 사료
이 3인 종군 기자의 기록들이 의심의 여지 없이 한강 인도교 폭파의 상황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1차 사료(史料)다. 누구든 한강 인도교 폭파 현장의 진실을 알고 싶다면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서, 그 밖의 모든 2차 사료를 일단 제쳐놓고서, 이들의 기록을 꼼꼼히 정확하게 읽어야만 한다.
우선 이 3인은 바로 당일 폭파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생존자들이며, 목격자들이다. 사건의 진상을 규명할 때 이들의 증언에는 법적으로 최고의 중요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게다가 이들은 일반인이 아니라 전쟁 발발 후 도쿄에서 서울로 날아온 종군 기자들이었다. 잘 훈련된 전문 기자답게 이들은 육하원칙에 따라서 직접 경험한 사태를 있는 그대로 디테일을 살려서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들의 문장 하나하나엔 현장의 디테일이 꿈틀꿈틀 생동하고 있다. 한강 인도교 폭파 현장을 이보다 더 상세하게 묘사한 기록은 이 세상에 없다. 이들이 당일 작성한 기사에 비하면, 20년 후의 인터뷰나 30년 이후의 회고록 따위는 정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현장 검증과 정확한 피해자 조사도 없이 사후 작성된 유엔군 감찰관의 기록은 신빙성이 낮다. 1950년 9월 최병식 공병감에 사형을 선고한 군법회의 기록 역시 전시 즉결 재판이라서 사건의 진상 규명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와 달리 3인 종군 기자의 기사들은 육하원칙에 따라 바로 당일 작성된 기록이다.
구사일생으로 한강 인도교 폭파 현장에서 살아난 종군 기자 3인의 기록은 한강 인도교 폭파를 둘러싼 헛소문, 과장, 추측, 거짓말, 유언비어, 틀린 통계, 잘못된 통념, 정치적 음모, 허위 조작 등등 모든 거짓을 걸러내는 거름종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이 3인이 우리에게 전한 기록을 분석하여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을 둘러싼 세 가지 쟁점을 검토해 보자.
쟁점(1)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를 전후해서 과연 “군경에 의한 차량 및 인파 통제가 있었는가?”이다. 쟁점(2)는 그날 한강 인도교 폭파로 발생한 사상자 규모이다. 쟁점(3)은 민간인 희생자 발생 여부이고, 발생했다면 과연 그 수가 얼마나 되냐는 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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