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일반상식

1부, 훈요십조는 조작되었다

太兄 2024. 1. 20. 15:19

- 호남해법을 위한 제언 -

 

1, 훈요십조는 조작되었다

 

모름지기 한()이란 것은 이성으로 다스릴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이다. 한이 깊다는 것은 마음 가장 깊숙히 박힌 슬픔을 뜻한다. 고로 행복한 한은 없으며, 슬픔의 한은 영혼마저 잠들지 못하게 한다.

 

()이 깊은 영혼은 인간의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고 하였다. 한을 해결하지 못하면 이승을 떠나지 않고 인간 사이에서 헤맨다 했으니, 한은 슬픔의 뿌리라 할 만하다.

 

한반도엔 8도가 있다.  8도에 사는 사람들은 각기 자연환경에 따라 풍속이 다르고 인심이 다르며 기질이 다르다. 그걸 지역특색이라 하며, 이 특색들은 민족의 다양성에 이바지한다.

 

그러나 8도민 중 유일하게 한을 간직한 곳은 호남이다. 차별과 멸시가 무려 1000년을 이어온 곳이다. 그리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분란과 저항과 배척의 원인이 되었다.

 

근현대에 이르러 해결을 위한 수많은 노력이 있었으나, 그러나 호남의 한은 풀어지지 않았다. 섣부른 해결책은 오히려 분열을 향해 꼬여갈 뿐이었다. 또한 이를 이용하기 위해, 적대국가와 적대세력들은 더 많은 갈등을 조장하였다.

 

문제는 한의 성격과 깊이를 모르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메꾸고자 하는 임시방편의 정책이었다. 농림부장관 자리나 하나 주면 될 줄 알았던 우매한 정치인들은 오히려 호남차별을 이용하고 있었다.

 

풀어지지 않는 한의 깊이에는 많은 요인들이 있겠으나, 한의 시작은 고려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 있었다. 소위 한()의 근인(根因)이었다. 따라서 호남해법은 이 근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는 일이라고 본다.

 

훈요십조는 고려태조 왕건이 승하할 때, 박술희장군에게 전한 내용이라 전해진다. 상당히 많은 분량이었고, 그 훈요십조 제8조에 호남차별의. 근본원인이 된 '차령이남은 배역지이니 그 지역 사람들은 등용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다.

 

배역지란 개성도읍을 겨눈 활의 형세를 지닌 땅을 말한다. 그러니까 강이 활처럼 구부러져 개성을 겨눈 곳. 바로 금강을 활로 하여 차령이남 지역이 겨누고 있는 형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역지 사람들은 반역을 할 사람들이니 조정에 쓸 인물로 등용하지 말라는 것이 훈요십조 제8조의 골자다.

 

그러나 가소롭게도 그런 식의 배역지는 얼마든지 있다. 한반도는 대부분의 강이 동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북의 청천강, 대동강부터 한강, 금강도 영산강도 활의 형세를 띤다. 그 중 낙동강은. 남으로 흐르면서 엄청난 크기의 배역지를 만든다.

 

그러므로 훈요십조 8조는 정통 풍수사상에 바탕을 둔 이론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풍수는 왕건의 스승 도선국사에 의해 비보풍수(裨補風水)로 발전한다. 그 도선국사가 호남차별을 위해 배역지를 그런 식으로 가르쳤을 까닭이 없다. 도선국사는 전라도 영암사람이다.

 

더구나 고려 창업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들이 호남에 모여있다.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피신시킨 뒤 왕건의 투구를 쓰고 전사한 신숭겸장군은 곡성사람이다.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장군은 목이 없는 시신으로 묻혔다. 머리를 황금으로 만들어 장례를 치렀기에 도굴을 피하고자 무덤을 세 개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고려 창업은 나주인들의 헌신적인 도움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주 인근의 마한세력들이 재물과 곡식, 인재들로 왕건을 보필하지 않았으면 고려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나주의 호족세력인 나주오씨 가문은 그 중심세력이었고, 후일 고려제1대 왕후인 장화왕후가 바로 나주오씨 가문이었다. 그후 무려 7대 목종까지 핏줄이 이어진다.

 

만약 훈요십조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었다면, 그 내용이 후대로 전해질 까닭이 없다. 역대 왕들이 외가를 배척하는 내용을 담은 훈요십조를 가만 놔두었으리라 볼 수 없다.

더구나 창업의 기틀을 닦은 인물 중에는 천재 최지몽도 있다. 그 역시 영암 출신이다. 그 최지몽이 훈요십조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 또한 가만 놔두었을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도선국사, 나주오씨가문, 신숭겸, 최지몽으로 판단해 볼 때 훈요십조는 가짜일 가능성이 짙다.

 

훈요십조는 8대 현종 때 등장한다. 거란의 1차 침략, 그리고 강조의 목종 살해 사건을 핑계로 2차 침략이 있었다. 그때 목종을 이은 현종이 피신한 곳이 나주였다. 그리고 개성은 불타버렸다. 물론 고려사를 비롯한 기록들도 모두 불에 타서 소실되었다.

 

3차 침략 때 강감찬 장군에 의해 거란군은 전멸을 당하지만, 고려가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하여 고려 현종은 복원에 힘을 쓴다. 이 복원과정에서 훈요십조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 훈요십조의 존재를 알리고 고려사에 기록한 이가 최제안이다. 경주 출신 최제안이라는 사람이 같은 경주출신 최항의 집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비밀리에 전해진다는 이 훈요십조가 왕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반 사가()에서 발견된 것이다. 물론 박술희와도 관계없다. 박술희 사후(死後)100여년이 지난 인물이다.

 

최제안은 최치원의 후손으로 신라계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나주오씨 문중과 마한계 인물들을 몰아내고, 고려 현종을 등에 업고 정권을 잡는다. 쉽게 말하면, 정권이 나주지역 마한계에서 신라계로 옮겨갔다는 뜻이다. 그게 가능했던 것이 현종의 조모가 바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딸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현종이 2차거란침략 때 피난길에서 전북 삼례역에서 모반에 해당하는 수난을 당했던 것도 정권이 옮겨간 이유 중 하나라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따라서 훈요십조는 신라계 집권을 뒷받침한 이용물이 분명해 보인다.

 

조작으로 만들어진 훈요십조를 이용하여 차령이남 인재등용을 막고. 신라계가 집권할 수 있도록 정당성을 제공한 것이다. 이후로 무려 1000년을 이어오고 있는 사실에서 음모의 깊이를 추정할 수 있다.

 

신라계가 백제계에 원한을 품은 것은 견훤에 의한 것이다. 경주를 침략해서 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하고 경주를 초토화시킨 역사의 복수를 가슴 깊이 품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원한이라면 백제 성왕의 목을 참수한 역사는 어디로 갔는가.

 

더구나 전남지역 중 나주지역은 고려 창업을 도운 마한계이다. 신라계가 원한을 품을 이유가 없는 곳이다. 설령 정권을 잡기 위해 훈요십조를 조작했다 하여도, 그것이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와야 할 이유가 없다.

 

훈요십조 조작의 흔적은 곳곳에 있다. 왕건의 유언을 받아적은 박술희. 그는 무인출신이다. 그 많은 내용을 받아적을 위인이 못된다. 조선시대로 따지면 비서실장 도승지도 있고 행적을 기록하는 사관도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학문이 부족한 박술희겠는가.

 

왕건으로선 박술희가 가장 신뢰할 만한 인물이었다치더라도, 그토록 비밀을 유지하라는 훈요십조가 최항이란 인물의 사가()에서 발견된다?

 

더구나 훈요십조는 어느 것 하나도 지켜진 것이 없다. 지켜지지 않는 훈요십조는 사장(死藏)된 사료이다. 그럼에도 유독 8조만 진실처럼 내려온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훈요십조를 바탕으로 고려조정에서는 마한계는 물론이고. 백제계는 모조리 도태된다. 신라계의 정권 장악이 참으로 오래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차별은 조선으로 이어진다.

 

2024. 1. 20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