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급사(給仕)였다.
황해도에서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서울에 왔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는 대중목욕탕 심부름꾼부터 모자가게 점원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의학강습소의 급사 자리를 얻게 됐다.
등사기를 밀어서 강습소 학생들이 볼 강의 교재를 만들어내야 했다.
“자연스레 교재를 들여다봤죠.
용어가 어려워 옥편을 뒤져가면서 독학을 하다 보니 ‘나도 한 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는 의대에 다니지 않아도 시험만으로도 의사 자격증을 딸수 있었거든요.”
주경야독으로 의사고시에 매달린 지 꼬박 2년,그는 20세에 의사고시에 합격했다.
주변에선 국내 최연소의사라고 축하해줬다.
시험에 합격한 해인 1937년 서울 성모병원의 의사가 됐다.
병원 생활은 평탄했지만 수십 년 뒤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사건이 생겼다.
뼈가 앙상하고 배만 볼록 솟아오른 갓난아기 환자가 병원에 온 것이었다.
“아이 엄마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아이를 업고 꼬박 하루 걸려 왔다고 했어요.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며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요.
차트를 보니 병명이 ‘소화불량’이었는데,아이는 끝내 세상을 떴습니다.”
어떤 의사도 아이를 살릴 수 없었다.
이후에도 복부 팽만으로 병원을 찾은, 적지 않은 신생아들이 설사만 하다가 무력하게 죽어갔다.
의사가 된 청년은 자책과 의문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가는 이 아이들을 언젠가는 고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 이제는 유학을 가보자.’
당시 43세였던 그는 의사 초년병 시절에 접했던, 소화불량에 걸린 신생아들을 고칠 방법을 찾기 위해 의학 선진국으로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때가 가장 큰 선택의 기로에 놓였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주변에서는 반대했다.
그에게는 아내와 6남매가 있었고, 의사로서의 안정된 삶도 보장돼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살려내야겠다는,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떨칠 수 없었다.
“영국 런던대에 공부하러 갔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어요.
곧장 미국샌프란시스코의 UC메디컬센터로 건너가 미국에도 비슷한 증상이 있나 샅샅이 뒤져봤지요.”
1964년, 그는 도서관에서 소아과 교재를 읽다가 무릎을 쳤다.
바로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lactose intolerance)’이 소개된 대목이었다.
20여 년간 지녀온 의문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유당불내증은 우유나 모유의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 증상을 가진 신생하는 모유나 우유를 소화하지 못해 영양실조로 죽고 만다.
우유 대용식을 만드는 게 급선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줬던 콩국을 떠올렸고, 그 길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서울 명동에서 ‘정소아과’를 운영하며 아내와 함께 우유 대용식 개발에 매달렸다.
아내가 콩을 맷돌로 갈아 콩국을 만들면 그는 콩국의 영양이 충분한지 분석했다.
병원 지하에 실험용 흰 쥐를 잔뜩 갖다 놓고 콩국을 먹인 쥐에게 유당불내증이 나타나는지 등을 실험했다.
주변에선 “정소아과 원장이 미국에 다녀오더니 이상해졌다” 고 수군댔다.
이렇게 3년 남짓 연구한 끝에 두유를 개발해냈고 이것을 설사병에 걸린 신생아들에게 줬다.
병상의 아이들은 눈을 뜨면서 기력을 차렸다.
콩에는 필수영양소(단백질 40%, 탄수화물 35%, 지방 20%)가 들어 있지만 유당은 들어 있지 않다.
“인생에서 최고로 기뻤던 순간”이었다.
설사병을 앓는 아이의 부모들 사이에서는 ‘정소아과가 용하다’는 입소문이 났다.
전국 각지에서 그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환자가 몰리자 두유 수요가 달렸다.
자연히 아픈 아이들에게 부족함 없이 두유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결국 정재원은 1973년 ‘정식품’이란 회사를 세워 두유 대량 생산에 나섰다.
콩국이 식물성 우유라는 점에 착안해 식물(vegetable)과 우유(milk)의 영문명을 합쳐 ‘베지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당시 56세였던 그는 다시 한번 도전의 길에 접어들었다.
“개인 병원만 운영하다 기업을 이끄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지요. 하지만 신생아들을 살리려면 창업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어요.”
그가 사명감을 갖고 만든 베지밀은 지금도 두유업계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다.
창업후부터 올해(5월말 기준)까지 만들어진 두유는 총 130억 개다.
이를 나란히 세우면 서울∼부산을 1630차례 오갈 수 있다.
‘인류 건강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고저’를 정식품의 창업이념으로 정한 그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충분한 고민과 성찰이 있어야 기업이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진정한 성장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의 이야기다.
그는 생존해 있는 한국 재계의 창업주 중 최고령이다.
우리 나이로 99세인 그는 올 1월 ‘백수연(白壽宴)’을 치렀다.
백수연을 한자로 쓸 때는 ‘일백 백(百)’에서 ‘한 일(一)’을 뺀 ‘흰 백(白)자’를 쓴다.
100세보다 한 살이 적은 99세 생일을 기념하는 자리다.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은 아내인 고(故) 김금엽 여사와 사이가 각별했다.
그는 서울 성모병원에서 의사생활을 하던 시절 아내를 만났다.
고아였던 아내는 수녀원에서 자랐고, 성인이 된 뒤 가톨릭 계열인 성모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내로라하는 집안에서 중매가 여러 건 들어왔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박꽃처럼 예뻤던’ 아내 때문이었다.
공부하는 여성이 드물 때였지만, 그는 아내에게 유학을 권했다.
아내가 일본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해인 1942년 두 사람은 부부가 됐다.
정 명예회장은 “선 봐서 결혼했더라면 처갓집 눈치가 보여 40대에 유학도, 50대에 창업도 선뜻 하지 못했을 것“
이라고 말했다.
그와 함께 두유를 개발한 아내는 정식품의 ‘각자대표’ (1973∼1987년)를 맡아 사업에서도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줬다.
그런 아내는 2004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정 명예회장은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턱시도를 차려 입고 조문객을 맞이했다.
그의 턱시도는 황해도 고향에서 올린 결혼식 때 입었던 예복이었다.
부부는 반세기 넘게 ‘결혼의 징표’인 턱시도와 면사포를 간직했다.
턱시도를 입은 정명예회장은 아내의 관(棺) 속에 흰색 면사포를 넣어줬다.
백발의 노신사는 아내에게 예(禮)를 다해 그렇게 작별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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