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일반상식

다네가시마(種子島)를 아시나요?

太兄 2025. 4. 9. 20:33

- 다네가시마(種子島)를 아시나요? -
    
1543년과 工商農士, 정치꾼 
1543년은 일본과 조선의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과 일본의 1543년을 비교해 보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사는 국민으로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일본의 역사에서 1543년은 사소하지만 일본의 역사를 바꾼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 일어난 해다.
1543년 9월 23일 포르투갈의 100명이 넘는 선원들이 일본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상륙하게 된다.
다네가시마는 가고시마 항구에서 페리선으로 약 3시간이 걸리는 작은 섬이다. 
그리고 이틀 후 9월 25일에는 다네가시마 도주인  다네가시마 도키타카 (種子島時嘵)가 포르투갈 선원들을 만났다.
    
당시 도주는 15세였다.
포르투칼 인들은 소총을 가지고 들어왔다.
도키타카는 “보기 드문 보물이다.” 라고 하면서 장래를 생각하여 총두정을 구입했다.
당시에는 이를 철포(鐵砲)라 했다. 
도주인 도키타카는 두 정 중 한 정은 수하의 승병 장군에게 보내고, 다른 한 정은 대장장이 ‘야이타 긴베’에게
하사하여 역(逆)설계토록 했다.
기베 대장장이는 총을 제작했으나 격발이 되지 않았다.
이의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 긴 베는 자신의 외동딸 ‘와카’를 포르투칼인 ‘제이모토’에 시집(상납) 보내고 나서
그 대가로 기술을 얻어 소총 개발에 성공했다.
    
그녀의 무덤이 지금 섬에 설치돼 있다. 
이후 이즈미(현 오사카) 상인들이 와서 철포제작 기술을 습득해 가서 교토주변까지 철포가 퍼져나갔다.
그로부터 6년 후 1549년 당시 열다섯 살의 미래의 일본 1대 영웅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가 500자루를 구입했다.
그 철포로 오다노부나가는 1575년 6월에 다게다가쓰요리 부대를 전멸시키고 1차 천하를 통일을 이루었다. 
이 철포를 공식적으로 조선에 전달한 것은 1589년 7월이었지만 비공식으로는 일본이 철포를 수집한 지 11년이 지난
1554년 5월에 조선에 전해져 비변사가 명종에게 총통주조를 건의했으나 거부당했다.
무지의 소치였다.

결국 1592년 일본이 시작한 임진왜란에서 일본 철포가 조선을 초토화시키고 7년간의 전쟁이 끝났다.
조선이 얻은 것이라고는 이순신이라는 명장뿐이었으나, 그 명장 영웅 역시 왜군 철포에 의해 잃었다. 
그러면 조선의 1543년은 어떤가?
조선의 1543년은 서원(書院)이 최초 설립된 해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私學)의 명칭이다.
조선 초기의 교육제도는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이루어지는 관학이 중심이었다.
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서원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존재하던 서재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원은 초기의 향촌자치의 안거강학(安居講學) 교육 틀에서 점차 벗어나 사회적 위세를 지니게 되고
그 후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대립의식이 치열해지면서 서원의 설립에 중앙 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세도가의 가문의식이 서원의 남설을 초래하기도 하고 후손이나 문중에 의해 설립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그러한 서원은 교육기구로서의 1차적 기능이 흐려지고 가문의 봉사 위주의 성향이 현저해진 상태에서 가문의 권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서원은 초기 설립 목적은 선비를 육성하는 취지였고, 선비들이 경세제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걸었지만 실제로는 스스로의 이익이나 가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들 향원들은 겉으로는 군자처럼 행동하지만 국리민복에 헌신하는 것은 뒷전이고, 패거리와 파벌을 만들고 오직 자기 이익에만 관심이 있고 도덕적 신념이나 양심이 부족하고 전문적 지식도 부족하고 신뢰를 저버리기가 일쑤이고
책임을 모면하는데 전문가인 가짜 선비들인 것이다. 
그들이 사농공상의 사(士)들이고 私의 패거리들이다.   
그들은 안거강학(安居講學)과 경세제민이 아니라 권모술수, 위계, 협잡, 모함, 위선, 거짓말, 조작, 사기, 무고 등의 시정잡배들 같이 술수를 서로 가르치는 쪽으로 타락한 것이다.
    
지금의 국회의원들의 꼴이 바로 그 전형이었다.   
정치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역사성을 가지고 뿌리 깊게 한국인들의 문화가 되어 영혼과 DNA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기에 개조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동일한 시기를 살았지만 일본이 포르투칼 선원으로부터 철포를 구입하고 개발한 것은 바로 실용이다.    
미래를 준비한 것이다.
당시 다네가시마 도주의 나이 고작 15살이었다.
철포를 개발한 대장장이는 자신의 딸을 외국인에게 시집보내며 개발을 성공시켰고,
일본을 1차 천하 통일한 오다부나가도 철포 500정을 구입할 당시 나이가 15살이었다. 
    
그에 반해 조선은 선비들의 탁상공론, 명분으로 치세를 행한 것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철포가 일본에서는 칼보다 빠르니 전쟁에 사용하면 좋겠다는 발상이라면, 조선에서는
철포가 빠르니 새잡는 데 사용하면 좋겠다고  해서 조총(鳥銃)이라 한 것이다.    
통찰이 전혀 없었고 철이 없었다.
아이들 같이 無思考이고 단견이고 낭만적이다. 
    
지금의 어리석은 감성팔이 정치도 그 연장선상이다.
그러니 조선은 아무런 준비 없이 무의식으로 지내다 7년간의 전쟁에서 강산이 초토화되고,
하얀 시체가 계곡마다 산더미로 쌓이고, 시체 썩은 물이 피범벅이 되어 냇물을
이루었다는 유성룡의 징비록을 우리는 새삼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정치판 꼴을 보라.
지금도 마찬가지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그 비극의 역사를 반복해서 당한다고 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변해야 나라가 산다.

(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