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경제

청년 의사 박은식 “與는 광주 망월동이 아니라 광주 산업단지로 가야”

太兄 2024. 5. 5. 15:22

청년 의사 박은식 “與는 광주 망월동이 아니라 광주 산업단지로 가야”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입력 2024.05.05. 06:00업데이트 2024.05.05. 10:25

제22대 총선에서 광주광역시 동구·남구을(이하 동남을)에 출마한 박은식(39)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인재영입위원 겸직). 1984년생으로 고향 광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한양대 의대를 졸업하고 소화기내과 전문의가 됐다. 호남 출신 대다수가 갖는 ‘호남=민주당=진보’라는 정서 속에 성인이 됐다.

1. 지난 3월 20일 오전 광주 동구 학동거리에서 국민의힘 박은식 후보가 출근길 시민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2016년 군의관이 돼 강원 철원 3사단 GOP부대에서 복무했다. 평화의 소중함만이 강조된 세태에서 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안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호남에서 나고 자라며 몸에 밴 생각과 관념이 현실과 충돌할 때면 무엇이 맞는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사이버대에 등록해 법학과 경영학도 공부했다. 그러면서 보수의 가치, 정신을 알게 됐다.

사회로 복귀하고는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며 호남의 맹목적 민주당 지지를 비판했다. 시민단체 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를 맡아 ‘호남 보수’를 재조명하며 “호남이 변해야 한다”고 외쳤다. 특히 정율성 기념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기념 사업 반대 운동도 했다. 그러던 중 김기현 전 국민의힘 대표의 권유로 현실 정치에 참여하게 됐다.

박 전 비대위원은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 참여하며 이번 총선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희생하겠다”며 고향인 광주로 내려갔다.

공식 선거운동 시작일인 지난 3월 28일 광주를 찾았다. 박은식 후보의 선거사무실은 옛 전남도청 광장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빌딩의 5층이었다. 5·18 당시 시민군이 최후 저항한 곳이 전남도청이다.

오후 5시 조선대병원 인근 남광주역 5번 출구 앞 교차로에서 공식 선거운동 출정식을 가졌다. 빨간 옷을 입은 선거운동원(선거사무원) 사이에 키가 185cm쯤 돼 보이는 훤칠한 젊은이가 야구 점퍼를 입고는 행인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유세차에 오른 송기석 전 의원은 “박은식 후보는 어느 정당에서든 비례대표 당선권에 들어가는 후보다. 하지만 동남을에 출마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광주의 정치 구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신념을 갖고 나왔다. 보수 정당 불모지인 광주의 변화를 위해 박은식 후보를 선택해달라. 우리가 박은식 후보를 잘만 쓰면 호남을 대표하는 보수 대권 주자로도 키울 수 있다”고 했다.

“제가 당선되면 역사교과서에 실릴 일”

이어 박은식 후보가 마이크를 잡았다. 후보 오른편에는 어머니 조현정씨가 서 있었다.

“광주의 아들 박은식입니다. 대성초, 금남중, 문성고 나왔습니다. 서울에서 의사로 일하며 광주 시민이 민주당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을 볼 때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광주의 변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고 이를 인정받아 국민의힘 비대위원이 됐습니다. 광주를 바꾸고 발전시키기 위해 쉽고 편한 길보다는 직접 지역구로 출마해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광주는 어떻습니까. 충장로에는 공실이 넘쳐나고 젊은이들은 광주를 떠나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을 피 흘리게 한 공산주의자 정율성을 위해 광역시 재정자립도 꼴찌인 광주가 세금을 퍼붓고 있습니다. 정율성 기념 사업도 완전히 폐지하겠습니다.

실현 가능한 공약을 말씀드립니다. 아름다운 무등산 경치를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케이블카를 설치하겠습니다. 충장로에서 케이블카가 출발하도록 해 많은 사람이 충장로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광주 시민이 저 멀리 대전까지 쇼핑 가는 일 없도록 이케아(IKEA), 코스트코를 반드시 유치하겠습니다.

광주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선되면 이는 역사교과서에 실릴 일입니다. 큰 정치인이 될 수 있도록 저를 찍어주십시오. 그래야만 광주가 발전하고 민주당도 더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은식 비대위원의 어머니 조현정씨는 점퍼 뒷면에 흰색으로 ‘엄마’라고 적었다. 조씨는 “온 가족이 아들의 출마를 말렸다”면서도 “아들 덕분에 생전 처음 선거운동을 하고 유세차에도 올랐다”고 말했다.

박은식 후보는 공식 선거운동 첫날을 맞아 지지 요청 문자 메시지를 주민들에게 보냈는데 욕설이 담긴 답장도 받았다.

박은식 후보는 호남에서 보수 정당, 국민의힘은 “무관심 그 자체”라며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힘에 관심 자체가 없다. 이곳에선 제2당이 진보당이다. (안철수 의원이 이끌었던) 국민의당도 보수 정당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의힘과 국민의당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아직도 ‘국민의힘’보다는 ‘한나라당’이라는 명칭이 입에 익다. 행사장에 가면 진보당 사람이 앉을 자리는 있어도 국민의힘은 없다.”

—왜 하필 지역구가 동남을인가.

“동남을은 제가 나고 자란 곳이다. 부모님도 산다. 정율성 문제도 거론하고 싶었다.”

정율성 생가 앞을 지날 때였다.

—정율성을 알리는 시설과 표지가 많다.

“바로잡아야 한다. 광주 시민을 피 흘리게 한 공산주의자를 광주 시민의 혈세로 기념할 순 없다.”

박은식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3수를 해 대학에 갔고 그 뒤로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유행할 땐 코로나19 전담 병원에서 근무했다. 호남의 변화를 위한 문제 제기를 열심히 한 덕분에 현실 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당장 감당해야 할 손해 같은 건 생각지 않고 ‘3개월 동안은 나라를 위해, 고향을 위해 한번 부딪혀보자’는 각오로 출마했다.”

—자체 여론조사는 해봤나.

“선거비용 보전 때문에 여의도연구원에 요청했는데 안 해줬다. 득표율을 알아야 선거비용을 어디에, 얼마나 쓸지 계획할 수 있다. 다행인 건 후원금은 다 채웠다.”

오후 9시쯤 선거사무실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는 명함을 돌리기 위해 남구 백운동으로 갔다. 백운동은 박 후보가 태어난 동네다. 술집과 식당을 돌며 인사했다. 명함을 돌리기 전에는 업주나 종업원의 허락을 받았다. 대체로 명함 돌리는 걸 허락했는데 거절하는 곳도 있었다. 매장이 바쁘거나 적대적인 곳은 명함을 돌리지 못하게 했다.

“안녕하세요. 말씀 나누시는데 죄송합니다.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박은식입니다. 고향 발전시켜보고자 서울에서 의사 그만두고 내려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화나 식사 흐름이 끊기길 원치 않는지 명함만 받고는 절반쯤은 본체만체한다.

곧이어 정율성 거리에 있는 고깃집에 들어갔다. 50대 여성 3명이 앉은 한 테이블에 다가가 박 후보가 명함을 건네자 한 여성은 “국민의힘이냐?”고 묻고는 명함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10분 뒤 한 카페에서 만난 중년 여성 3명은 명함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박 후보에게 “젊고 미남”이라며 “힘내라”고 격려했다. 당구장에서 만난 60대 남성 두 명은 “프랑(플래카드)으로만 봤는디 인물 좋네” “나가 찍을 테니 할 말은 꼭 하고 사쇼”라고 했다.

지난 3월 28일 공식 선거운동 첫 날 박은식 후보가 조선대병원 앞에서 출정식 유세를 하고 있다. 왼편에는 조씨의 어머니 조현정씨.

“잘생긴 청년이 어찌 어려운 길을 택했을까나”

《조선일보》를 27년째 보고 있다는 횟집 여주인은 박 후보를 반갑게 맞으며 격려했다. 안쪽으로 들어가 보라며 손짓했다. 한창 술기운이 도는 40대 남성 7명이 앉은 테이블 앞에서 박 후보는 ‘이케아’ ‘코스트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테이블에선 ‘우리는 쇼핑 난민이다’는 말이 나왔다.

명함을 돌리며 민주당 당원부터 조국혁신 당원까지 다양한 이들을 만났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특히 저녁 시간대에 술집을 돌며 인사를 할 때면 박 후보는 ‘욕받이’가 돼야 했다.

박 후보는 “100명 중 2명은 ‘빨간색 싫다’며 적대적이다. 눈앞에서 명함을 버리는 사람, 찢는 사람도 있다. 내게 침을 뱉는 사람, 손가락으로 욕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100명 중 3명은 응원해 주는데 정말 큰 힘이 된다”고 했다.

2일 차(3월 29일)에는 계림오거리에서 출근 인사로 시작했다. 등굣길 여고생 두 명 중 한 명이 유세차 뒤를 지나며 “국민의당에서 나왔네”라고 하자 옆에 있던 친구가 “국민의힘”이라고 바로잡아줬다.

이날 아침 유세에서 박 후보는 보수의 유산인 건국, 호국, 산업화, 민주화를 주제로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성수, 송진우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설은 15분씩 두 차례 반복했다.

오후에는 경로당을 찾았다. 노인들은 젊은 청년을 만나 반가우면서도 박 후보를 걱정했다.

“잘생긴 청년이 어찌 어려운 길을 택했을까나… 의사나 할 것이지… 하필 왜 2번으로….”

그러면 박 후보는 “고향을 발전시키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라며 “제가 표를 많이 받아야 민주당도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일부 시민은 박은식 후보의 젊은 외모로 인해 후보 본인이 아닌 선거운동원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박 후보는 밥을 먹을 때도 “회장님~”하며 전화를 걸고 받았다. 한창 바쁠 때는 밥 한 끼를 먹을 동안에도 소속을 알 수 없는 ‘회장님’ 네댓 명과 통화했다. 여기에 수시로 기자들이 전화를 해왔다. 선거 운동하기도 바쁜데, 의료대란에 대한 해법을 밝혔다. 이와 함께 의료계의 입장을 정부와 당에 전달하는 역할도 해야 했다.

저녁에는 동구 동명동으로 갔다. 이곳은 식당과 카페, 주점이 많아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 지역구를 가리지 않고 광주의 젊은이들이 모인 곳이라 동남을 유권자 비중은 적다. ‘어디 사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두 명함을 전했다. ‘(박 후보) 지역구가 아니다’고 밝히면 박 후보는 “주변에 좀 많이 알려달라”고 말했다.

카페 야외 좌석에서 명함을 받은 이는 “우리 동네네. 근데 나는 빨간색은 안 뽑아”라고 했다.

술집으로 들어가 대학생 8명이 앉은 한 테이블에서 명함을 돌렸다. 전남대 의예과에 다니는 한 남성이 ‘의대 증원’을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물리적으로 2000명은 수용할 수 없어요. 전남대병원에서도 한 해 받을 수 있는 인턴이 70~80명쯤 될 텐데 나머지는 서울로 가 수련을 받아야 해요. 보건복지부도 1000명 이상은 불가하다고 했죠. 대통령이 고집을 부렸어요”

한 족발집에선 30대 여성 두 명이 명함을 유심히 본 뒤 공약 중 하나인 “이케아!”라고 말했다. 광주에 사는 젊은층의 소비 기반 시설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박 후보는 호남에 출마하는 후보치고는 선거운동원(약 28명)이 눈에 띄게 많았다. 그간 광주에 출마한 보수정당 후보들은 득표율이 저조해 선거 운동 비용 보전도 힘들었다. 지출을 최소화하고자 선거운동원을 고용하지 않는 출마자도 있었다.

유세팀장인 서양길씨는 “선거운동원이 부족하면 후보가 유세차에 올라 연설할 때 초라해 보인다”며 “선거운동원이 많을수록 후보에게 심리적으로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피로회복제는 22개월 딸과의 영상 통화

빨간 옷 입은 박은식 후보가 다가가니 “워메, 왜 나한테 오는 것이여”라고 하며 몸을 뒤로 빼거나 손사래를 치는 일도 있었다.

힘든 선거운동에서 박 후보에게 가장 큰 위로이자 피로회복제는 서울에 있는 22개월 딸 제이와의 영상통화다. 아내는 “아빠”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려고 딸에게 ‘제이는 누구 딸?’과 같은 질문 두세 개를 계속 물었다.

박 후보의 선거를 돕기 위해 어머니 조현정씨도 지역구를 누비며 인사했다. 조씨는 2023년 2월 한 중학교의 교감으로 정년 퇴임했다.

“아들의 명함을 줄 때면 반드시 90도로 인사해요. 국민의힘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아들이라고 소개하면 반응이 좀 부드러워지죠.

‘엄마가 예쁘니 아들도 예쁘다’ ‘아들이 엄마를 영락없이 닮았다’고 하셔요. 그러면서 ‘(국민의힘 후보가) 한 사람이라도 돼야 쓸 것인디’라고 말해요. ‘의사나 하지 왜 2번으로 나왔어…’라고도 하시고요.”

 

조씨는 차를 운전해 무등산 입구로 갔다.

“안녕하세요. 선거운동하러 왔습니다. 동구에 멋진 후보가 나왔습니다. 제 아들입니다.”

등산을 마치고 막걸리를 마시는 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탁자를 돌며 명함을 돌렸다.

“어짜쓰까. 우린 민주당인디. 무등산 케이블카 공약은 좋다.”

“의사나 할 것이지…. 어머니가 마음을 굳게 먹으쇼!”

“아이고 엄니가 열심이네. 안 되는 거 뭣 하러 나왔는지 모르것소. 15%는 받아야 쓰는디.”

명함을 건네고자 다가가니 “나는 민주당 당원이오”라고 하며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조씨는 “자기 생각을 밝혀주면 오히려 고맙다”며 명함을 받지 않는 이들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아들이 정치를 한다고 했을 때 어떠셨습니까.

“‘기껏 고생해 의사가 됐는데 왜 하필 우리 아들이 총대를 메야 하나’라고 생각했다. 정치를 한번 시작하면 계속 정치를 해야 하니까 걱정도 됐다.”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아들이 출마한 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아들의 선거 포스터로 바꿨다. 10명 중 8명은 응원을, 2명은 ‘굳이 (국민의힘으로) 출마했느냐’며 걱정 섞인 반응이었다.”

—땅에 버려진 아들 명함을 보면 어떻습니까.

“속상하지만 그대로 놔둔다. 그것도 아들을 알리는 방법이니까.”

조씨는 자신이 다니는 무등산의 한 사찰도 들러 아들을 소개했다. 민주당 모 의원의 팬이라는 50대 여성은 이런 반응이었다.

“국민의힘은 역적인디. 의사 허지 왜 전라도서 국민의힘이여. 지역감정은 대대손손 안 없어질 거요. 우리 자식도 서울 사는디 민주당만 뽑아. 민주당도 하는 짓이 똑같아서 난 선거 안 해부러요. 그래도 어머니 힘내쇼.”

3일 차 주말에는 박 후보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장인과 처제, 동서가 광주를 찾았다. 주중에는 직장에 다니는 박 후보의 아내와 딸 제이도 함께했다. 아시아문화전당(옛 전남도청)에서 어머니 조씨가 명함을 건네면 다른 이들은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조씨만 선거운동원으로 등록돼 있어 행인들에게 명함을 전했다.

장인, “출마 반대”

장인은 대구 출신이다. 그는 “출마하는 것을 내심 반대했다. 굳이 하겠다면 비례대표나 서울에 출마하길 권했다”며 “그런데도 당선이 목적이 아니라 도전에 목적을 뒀다. 기백이 대단하다. 양분된 정치 지형을 타파하려는 사위의 도전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선거운동 시작 후 두 번째 맞은 주말부터 목 상태도 나빠졌다. 일상적인 대화는 괜찮았지만 고음을 내기 힘들었다. 목이 잠기는 바람에 힘겹게 연설했다. 몸이 좋을 때는 한 번 유세할 때 15분씩 2번을 했던 것도 5분씩 하는 걸로 줄였다.

선거 조직이 탄탄한 후보는 이른바 찬조 연설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박은식 후보는 많은 부분을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박 후보는 “사전투표로 자신을 찍었다는 사람을 만나면 힘이 된다”면서도 “지역구에선 민주당이 싫어 저를 찍고, 비례는 조국혁신당에 투표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선거 후반부가 될수록 박 후보의 선거운동은 ‘하소연’으로 바뀌었다.

“도와주십시오. 어차피 민주당 후보가 당선됩니다. 득표율이라도 올리고 싶습니다. 한 번만 눈 딱 감고 저를 뽑아주십시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지지한 변호사에게도 찾아가 지지를 호소했다. 한 슈퍼에 들어가니 그 주인은 “어머니가 좀 전에 들러 이미 명함을 주고 갔다”고 말했다.

공식 선거 운동 마지막 합동 유세에 조선대 4학년 정현로씨가 찬조연설을 했다.

“정권을 심판하면 광주가 나아집니까? 제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바로 왔겠습니까. 박은식 후보에게 한 표 부탁드립니다. 광주 청년들은 광주에서 살고 싶습니다.”

박 후보 옆에서 스쳐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배꼽인사를 하던 어머니도 마이크를 들고 “박은식은 소박하고 부지런하며 광주 시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박은식 후보는 “9대 1인 정치 구도를 8대 2, 7대 3으로 바꿔야 젊은이들이 민주당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했다.

선거운동 마지막 날인 지난 4월 9일 오후 9시 30분경 어머니와 아들은 마지막까지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단둘이 선거사무소를 나와 백운동으로 갔다. 어머니 조씨는 이곳에서 아들을 낳아 초등학교 때까지 살았다.

30분쯤 인사를 하니 손에 쥔 명함이 다 떨어졌다. 어머니는 약 500m 떨어진 차로 뛰어가 명함을 갖고 왔다. 오후 10시24분에는 명함이 동났다. 조씨는 지나가는 이들에게 육성으로 아들을 뽑아달라고 했다.

박 후보는 이날 오후 11시 마지막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비대위원들은 선거 당일 한데 모여 개표 방송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조씨는 광주송정역에 아들을 데려다주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들 덕분에 새로운 걸 많이 배웠습니다. 흔히들 ‘소중한 한 표’라고 말하는데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선거운동하는 이들을 보곤 형식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알게 됐죠. 정년 이후 좁게 살았던 제게 아들이 공동체를 위해 사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가르쳐줬어요. 정년 후 느꼈던 우울감이 사치였던 거죠.”

—어머니가 더 고생한 것 같다.

“교사로 지내면서 아들 운동회도 못 가고, 소풍 갈 때 도시락도 제대로 못 싸줬다. 졸업식도 갈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는데 선거운동을 하며 한 3분의 1은 갚은 거 같다.”

어머니, “아들, 정말 정치하겠다면 밑바닥부터 배워야”

—비례대표로 출마했으면 어땠을까.

“쉽게 정치를 시작할 수 있었겠지만 얼마나 교만해지겠나? 사람을 직접 만나 자기 의견을 관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선거운동원들이 얼마나 힘들게 선거운동을 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정말로 정치를 하겠다면 밑바닥부터 배우는, 지금 이 방법이 맞다고 생각한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정도(正道)를 걸었으면 한다.”

어머니 조씨는 예비 후보 기간을 포함해 명함 약 1만 장을 돌렸다. 그는 아들의 도전을 계속해서 응원하겠다고 했다.

박 후보는 총선 다음 날인 지난 11일 오후 5시 광주에 도착했다. 4시간 동안 운전을 했다. 피곤한지 입술이 하얗게 떠 있었다. 아버지가 입원한 요양병원에 들른 뒤 곧바로 선거를 도운 이들을 만나 위로했다.

통상 선거 캠프에선 소셜미디어(SNS) 전담 직원을 둔다. 박은식 후보는 인건비를 아끼고자 선거운동 기간 소셜미디어를 본인이 관리했다. 이 때문에 활동상이 실시간으로 전파되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 뒤에나 이틀 치를 한 번에 몰아서 올리기도 했다. 4월 7일 활동을 8일 오후 8시45분에 올린 게 마지막 선거운동 게시물이다. 지난 4월 8~9일의 활동상은 올리지도 못했다.

—마지막 선거 운동을 마치고 9일 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에서 무슨 생각을 했나.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그날 밤도 마지막까지 투표 독려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받는 분의 이름을 일일이 입력해 한 통씩 총 200통을 썼다. 정성을 담고 싶어 전체 문자는 안 보냈다. 정말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있나.

“대의(大義)를 위해서다. 한 표라도 더 받고 싶었다. 비대위원을 지낸 사람이 10%도 받지 못하면 도대체 어떤 청년이 도전하겠는가?”

—당의 총선 전략은 어땠나.

“중도층의 선택을 받으려면 이성(理性)보다는 감성에 호소해야 한다. 저 역시 말이 너무 길었다. ‘광주가 이래선 안 된다’ ‘10%는 받아야 할 말이 있다’고 말했는데 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했나.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내세운 ‘뉴타운’처럼 선거판을 관통하는, 보수우파의 가치를 대변하는 세 음절 이하의 단어가 필요하다. ‘민생’? 너무 막연하다. 민생은 어차피 ‘대파’로 깨졌다. ‘586 청산’? 민주당은 친명으로 이미 대체했다. 이조심판? 검사들 특유의 사고방식이 담겼다.”

—'시스템 공천’이었다고 말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그 ‘시스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선거는 이기는 게 우선이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힘이 민주당보다 나았던 점은.

“이재명, 양문석, 김준혁 같은 이들은 공천에서 배제했다. 적어도 뻔뻔하진 않았다.”

—현실 정치를 겪어본 소감은.

“‘인생은 실전’이라는 말이 있다. 관찰자와 행위자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절감했다. 마음을 다하면 광주에서도 통할 줄 알았는데 현실의 벽은 높았다. ‘나이브(naive·순진)’했다.”

—비례대표를 권유받았다. 순번은.

“모르겠다. 처음부터 광주로 올 생각이었다. 서울에 좋은 곳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다.”

—이번에 당선된 곳인가.

“그렇다.”

— 인요한 혁신위원장에 앞서 위원장을 제의받았는데 거절했다. 총선 참패를 예상한 것인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왜 거절했나.

“이제 막 정치를 경험하는 내겐 너무 큰 자리였다.”

박 전 비대위원은 “5·18을 초월하는 주제를 호남에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5·18은 반미(反美)운동이 아니다. 친미(親美)운동이다. 당시 광주 시민들은 미국이 광주에 개입해 신군부를 견제하고 자신들을 보호해주길 원했다. 역사적 사실은 이러함에도 좌파 운동권은 5·18에 반미를 덧칠했다. 여기에 우파는 좌파가 왜곡해놓은 5·18과 호남을 향해 ‘인종주의적’ 비난을 일삼고 있다.”

호남 보수의 가치 담은 상징 발굴해야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결정권자라면 ‘국민의힘은 5·18묘지가 아니라 광주의 산업단지로 가자’고 할 거다. 기아자동차, 금호타이어를 찾아가 현장의 애로사항을 듣고 해결해주는 거다. 이게 혁신이다.

보수의 가치가 담긴 새로운 호남의 상징을 발굴해야 한다. 김성수와 송진우 생가(生家)에 들러야 한다. 호남인들이 독립을 위해 재산을 헌납하고, 학교를 세우고 공장을 만들고 민족 계몽을 위해 언론사를 차린 역사를 기려야 한다. 좌파가 5·18로 우파를 공격할 때면 주눅 들지 말고 ‘망월동을 누가(김영삼) 만들어줬느냐’고 당당하게 따져야 한다.”

박 전 비대위원은 “1965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윤보선을 15만 표 차로 이겼다. 호남 유권자의 60%, 35만 표가 박정희를 찍었다”며 “호남 보수, 호남 우파를 재조명하고 복원해야 한다”고 했다.

—보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무(尙武)정신으로 스스로 채찍질해야만 한다. 한반도는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충돌하는 곳이다. 지정학적 숙명이다. ‘셰셰(謝謝·고맙다)’라고 말하며 대륙에 종속되길 자처하는 이들이 의회를 장악했다.

오늘날 정치적 불안의 뿌리는 남북 분단이다. 북한을 해방시킬 때까지 잘 버텨야 한다. 이를 위해 보수우파는 좀 더 희생, 헌신해야 한다.”

—현실 정치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과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선거비용 보전도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내 호남의 보수우파 청년들의 정치 도전을 주저하게 만든 것 같아 결과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일터로, 가정으로 돌아간다. 오늘(4월 11일) 아침에 취직할 병원에서 면접을 봤다. 곧 출근한다.”

박 전 비대위원은 4월 11일 오전 비대위원 사퇴 의사를 밝혔다. 그는 “비대위원이 꽃길만을 걷지 않고 희생했다는 것도 기억해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