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경제

中企 직원 “여기선 결혼도 출산도 모두 불가능할 것 같아”

太兄 2024. 3. 6. 15:49

中企 직원 “여기선 결혼도 출산도 모두 불가능할 것 같아”

전태일 재단-조선일보
창간 104주년 공동기획
‘12대88의 사회를 넘자’
[2] 대기업·중소기업 격차

<특별취재팀>
입력 2024.03.06. 03:00업데이트 2024.03.06. 13:45
 
지난달 27일 평소 국내 주요 박람회나 전시 등 대규모 행사가 열리는 서울 코엑스에서 김정화(27·가명)씨가 전시관 위치가 적힌 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직원이 5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기업에서 2년간 행사를 기획하는 업무를 하다 그만두고 대기업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김씨는 “적은 월급에 복지도 없어 결혼이나 출산 모두 불가능할 것 같았다”고 했다./오종찬 기자

우리나라 기업 중 근로자가 5인 미만인 기업은 약 124만개. 전체 기업의 62%에 달한다. 이런 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는 약 314만명으로 전체 근로자의 17%다. 작은 기업이라도 적잖은 청년들이 큰 꿈을 품고 처음 사회로 나오는 통로가 된다. 여기서 꿈을 이루는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는 금세 좌절하곤 한다. 법에서 보장하는 줄 알았던 당연한 복지의 사각지대에 자신이 서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대기업보다 소득이 낮은 데다, 야간·휴일 근무 수당이나 연차휴가 등 직장인들에게는 기본 중의 기본인 권리들이 현재 5인 이상 사업장에만 적용되고 있다. 거듭 불합격 통지를 받으면서 “대기업 아니면 안 된다”는 청년들이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태일재단과 본지는 이런 사각지대의 근로자 처우를 개선하는 게 12대88의 이중 구조를 극복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보고 해법을 찾아봤다.

서울의 유명 사립대를 나온 김정화(27·가명)씨는 지난 2022년 초 한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공공기관 등에서 의뢰를 받아 행사를 기획하는 일이 주된 업무인 직원 4명짜리 연 매출 20억원 안팎의 작은 회사였다. 입사 때 부모님이나 친구들은 “너무 작은 회사는 이직할 때도 쉽지 않다”며 말렸다. 경험을 쌓아 국제적인 대형 행사를 기획해보는 게 꿈이었던 김씨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기만 잘하면 여기서 경력을 쌓아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그는 최근 회사를 그만뒀다. “다시는 중소기업에 다니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대기업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김씨의 첫해 연봉은 세전 3000만원이었다. 4대 보험 등을 제하고 매달 200만원쯤이 입금됐다. 연차휴가나 야간·휴일 근무 수당 같은 기본적인 복지는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만 하면 연봉이 오를 거고, 젊기에 시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난달 27일 오전 김정화(27·가명)씨가 서울 강남구 코엑스의 복도를 걷고 있다. 첫 직장으로 직원 4명짜리 전시 기획사에 취직했다 최근 퇴사한 김씨는 “고된 일을 하다보니 언젠가 나아질 거란 기대만으로는 계속 회사를 다니기 힘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월급날이 고정돼 있지 않아 어떤 달은 20일에, 어떤 달은 25일에, 대표 내키는 대로 입금이 됐다. 매주 3~4차례 이상 밤늦게까지 반복되는 야근과 주말 근무를 했던 김씨는 “대학생 시절 과외를 할 때도 시급 8만원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한 달 내내 일하는데도 월 200만원 받으니 꿈이고 뭐고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고 했다. 대표에게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우리는 ‘5인 미만’이라 그런 거 없다”는 말, “코로나 사태가 한창이라 행사 의뢰가 크게 줄어서 우리도 힘들다”는 답만 돌아왔다. 김씨는 “여기선 결혼과 출산 모두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픽=김성규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대기업 직원 평균 소득은 월 591만원이지만, 중소기업 직원들은 절반이 안 되는 286만원만 받는다. 여기에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휴가나 보육 지원 등 복지 격차가 더해지는 게 현실이다.

본지가 최근 인터뷰한 20~40대 중소기업 직원 20명은 “결혼부터 출산과 육아, 내 노후까지 생각하면 중소기업을 피하는 게 당연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월 소득 격차는 나이가 들수록 더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20대 때 125만원에서 50대에는 452만원까지 벌어진다. 처음부터 대기업만 고집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의료 기기를 개발하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박모(36)씨는 “결혼도, 자녀도 포기했다”고 말한다. 그는 경기 화성의 한 보증금 1억원짜리 빌라에서 살면서 세전 연봉 4000만원쯤 받고 일한다. 월 생활비로 60만원만 쓰는 등 빠듯하게 지내며 180만원가량을 저축한다. 고향인 경북의 부모님도 노후 준비가 부족한 상태라 도움을 받기 어렵다. 박씨는 “회사에서 1시간 걸리는 15년 된 아파트도 79㎡ 기준으로 3억원 안팎인데, 1년에 2000만원 간신히 모으는 형편에 가정을 꾸리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요행을 바라며 산다”는 중소기업 직원들도 있다. 경기도의 한 100명 규모 IT 중소기업에 다니는 4년 차 직원 유모(30)씨가 그중 하나다. 유씨는 경남의 한 금융권 기업 직원인 남편과 합하면 세후 월 600만원 정도를 번다. 결혼을 결심했을 때 양가에서 지원받을 수 없어 신혼집을 못 구할 뻔했다. 하지만 운 좋게 3대1의 경쟁을 뚫고 LH 신혼희망타운 55㎡짜리에 당첨이 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를 갖게 돼 또 고민이 생겼다. 유씨는 “지금 직장을 계속 다니면서 교육비에 남편과 내 노후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경기도의 200명 규모 회사에 다니는 윤모(41)씨도 올봄 자기 운이 좋길 바란다. 8살 아이의 새 학기 방과 후 돌봄 교실 추첨을 앞두고 있다. 맞벌이라 오후 2시쯤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돌보기가 어렵다. 추첨에서 떨어지면 학원에 보내거나 도우미를 써야 하는데 빠듯한 가계에 수십만원의 비용이 얹어질까 걱정이다. 윤씨는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전체 임금 근로자 2195만명 중 86%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정규직+비정규직) 근로자의 이런 상황을 해결하지 않으면 국가 전체의 저출생 문제도 풀 수 없다고 지적한다. 정승국 고려대 노동대학원 객원교수는 “젊은 층이 첫 직장으로 대기업만 보면서 취업을 늦추다 보니 결혼·출산을 늦추거나 포기하는 상황이 되는 셈”이라고 했다.

그래픽=김성규

부모 직장이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에 따라 자녀 수 격차가 커지고 있다는 연구도 있다. 부경대 경제사회연구소 문영만 교수가 작년 말 한국복지패널을 이용해 사업체 규모별로 결혼한 가구의 자녀 수를 분석한 결과다. 2021년 기준 대기업 가구주는 자녀를 1.34명 두는 반면, 중소기업 가구주는 1.02명의 자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녀 수 차이는 2005년 0.2명에서 2021년에는 0.32명으로 커졌다. 문영만 교수는 “유아부터 성인이 되는 20년 안팎의 막대한 사교육비와 양육비를 감안하면 고용·소득·복지가 불안한 중소기업 직원은 아이를 갖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5인 미만 사업장은 왜 사각지대?

근로기준법 제11조에는 ‘이 법은 상시 5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한다’고 돼 있다. 이 법에서 보장하는 연장·휴일·야간 근로에 따른 가산수당이나 연차 휴가 관련 조항이 5인 미만 기업에 적용되지 않는 이유다. 법을 개정해 적용 대상을 모든 기업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자영업자나 영세기업 등에서 “경영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반대해 번번이 법 개정이 무산됐다.

☞12대88 사회

12대88은 국내 전체 임금 근로자의 12%인 대기업 정규직(260만명)과 나머지 88%인 중소기업, 비정규직 근로자(1936만명)로 나뉜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상징한다.

<특별취재팀>

팀장=정한국 산업부 차장대우

조유미 사회정책부 기자, 김윤주 사회정책부 기자, 김민기 스포츠부 기자, 한예나 경제부 기자, 양승수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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