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터키.핀란드 기원은 고구려
2016-06-23 23:48:37
헝가리.터키.핀란드 기원은 고구려
스크랩: http://blog.daum.net/dosu92
글: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 최병문(010-4607-3746)
■ 헝가리(Hungary)와 훈족(Hun族) 및 고구려(高句麗)
미국의 다큐멘터리 채널 디스커버리(Discovery)에서 방영한 내용인데, 외국 특히 독일(獨逸)에서는 훈족(Hun族)이 한국의 고구려(高句麗)에서 뻗어나온 세력으로 교육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선 훈족(Hun族)을 이민족(異民族) 취급을 하고 있다. 한국 역사학계는 친일파(親日派)들이 주류(主流)로 대접받았고, 식민지(植民地) 사관(史觀)에 의해 우리의 역사는 힘없고 약해빠진 쓰레기 역사라고 교육시키는 현실이니, 우리 나라의 역사에 자긍심을 키우기 보다는 패배주의(敗北主義)에 빠지게 하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夫餘 BC 239-58), 고구려(高句麗. BC 37-AD 668), 흉노족(匈奴族), 훈족(Hun族)은 거의 같은 계열이다. 서양인들이 말하는 훈족(Hun族)은 고구려(高句麗) 민족을 말한다.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단군(檀君) 제왕은 후국(侯國)에 왕족을 보내거나 부족장을 제후(諸侯)로 임명해 통치했다. 이 때문에 후국(侯國) 호칭에는 단(檀)씨가 많았다. 예컨대, 흉노(匈奴)의 왕 호칭은 단후(檀后), 선비족의 왕은 단석괴(檀石槐), 유연은 대단(大檀) 등이었다.
흉노족(匈奴族)의 기원은 북방 초원에서 배달(倍達. BC 3,898-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제후국(諸侯國)들이 몽골 고원 및 중앙 아시아 일대를 떠돌며 형성되었다. 흉노(匈奴)라는 글자 뜻은 흉악한(匈) 오랑캐 노예(奴)라는 것인데, 중국인들은 훈족(Hun族)에 대한 열등감과 악(惡)감정을 곁들여 그들의 이름을 오랑캐 보다 더 폄하하여 흉노(匈奴)라고 하였다.
BC 318년 무렵 흉노족(匈奴族)은 중국 전국시대의 진(晉). 한(韓).위(魏).조(趙) 나라를 공격했으며, 이에 중국내의 여러 나라들은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각 성벽(城壁)을 쌓았는데, 이것이 뒷날에 진시황(秦始皇)의 만리장성(萬里長城)으로 완결되었다. 흉노족(匈奴族)은 먼저 BC 54년 동서로 갈린다. 그 후, 서기 48년에 남북으로 갈리고 남흉노는 후한에 항복하고, 북흉노는 2세기 중엽에 중앙 아시아 초원 지대로 이동하였다.
환단고기(桓檀古記) 기록에 따르면, 흉노족(匈奴族)은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의 진한(辰韓). 번한(番韓). 마한(馬韓) 중 번한(番韓)에 속한 북방 동이족(東夷族) 계통이며,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의 제후국(諸侯國)이었다. 또한 중앙아시아 투르크족을 지배한 투르크족의 지배 계급이었다.
흉노족(匈奴族)은 나중에 고구려(高句麗) 민족과 연합하여 훈족(Hun族)을 형성하였고, 훈족(Hun族)은 남으로 이동하여 돌궐족(突蹶族)과 서로 연합하면서 투르크족(Turk族)을 형성하였다. 그래서, 흉노족(선비족)이었던 신라(新羅) 김씨 왕족들이 중앙 아시아 투르크족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중앙 아시아인들(투르크인들)이 경주(慶州)에 많이 거주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고구려(高句麗) 민족은 서기 4세기 초 무렵, 극동 아시아에서는 수년동안 기온이 평시보다 떨어지는 이상(異常) 기온 현상이 발생하였는데, 그들은 이상 기온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들은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중앙 아시아의 흉노족(匈奴族)의 잔류 세력을 규합하였고 훈족(Hun族)을 형성하였다.
훈족(Hun族)은 결국 4세기 중엽에 알타이 산맥(Altai Mountains)을 넘어 유럽으로 이동하였으며, 훈족(Hun族)의 일부는 우랄 산맥(Ural Mountains)을 건너 에스토니아(Estonia)를 경유하여 바다를 통해 핀란드(Finland)로 건너가 8세기 무렵에 이 지역에 정착하였다.
고구려(高句麗) 민족이 서양 역사 무대에 훈족(Hun族)의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다. 훈족(Hun族)은 남으로 이동하여 돌궐족(突蹶族)과 서로 연합하면서 투르크족(Turk族)을 형성하였고, 552년 지금의 알타이(Altay) 산기슭에 투르크(Turk) 제국을 건설하였고 나중에 서방(西方)으로 이동하여 터키(Turkey)가 되었다.
알타이(Altay) 어족(語族)은 지금의 알타이(Altay) 산기슭에 고구려(高句麗) 민족이 세운 바로 훈족(Hun族)의 투르크(Turk) 제국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민족의 뿌리인 배달(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夫餘 BC 239-58), 고구려(高句麗. BC 37-AD 668)의 언어와 문자 체계가 널리 중앙 아시아 일대로 퍼져 나간 것이다.
서양인들의 훈족(Hun族)에 대한 두려움은 엄청났다. 고구려(高句麗) 민족의 기마 전투와 로마(Roma)의 서양식 전투는 전혀 차원이 달라서 그들은 번번히 저항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징기스칸(Genghis Khan) 이전에 유럽 지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소수 영웅 집단이 바로 고구려(高句麗. BC 37-AD 668) 민족에서 기원한 훈족(Hun族)이었다.
훈족(Hun族)은 4세기 중엽에 알타이 산맥(Altai Mountains)을 넘어 유럽으로 이동하여 서기 375년 다뉴브 강(도나우강) 일대의 헝가리(Hungary) 지역과 흑해(Black sea) 북부 지역에 그들의 왕국인 훈(Hun) 왕국을 세웠으며 오늘날 헝가리(Hungary)가 되었다. 헝가리(Hungary)라는 국명은 훈(Hun) + 땅(gary)의 합성어이다. 훈족(Hun族)이 375년 흑해 연안에 훈(Hun) 왕국을 세우자 그곳에 살던 게르만(germane) 민족이 훈족의 압박을 피하여 동로마로 이주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게르만(germane) 민족의 대이동이다. 게르만 민족의 이동은 결국 로마(Roma) 붕괴(崩壞)의 발단이 되었다.
■ 터키(Turkey)와 돌궐족(突蹶族) 및 고구려(高句麗)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은 다수의 부족을 후국(侯國) 제도를 통해 통치했다. 제1형(직할) 후국은 부여(夫餘). 옥저(沃沮). 구려(句麗). 예맥(濊貊). 숙신(肅愼) 등이다. 제2형(변방) 후국은 돌궐(突蹶). 오손(烏孫). 선비(鮮卑). 유연(柔然). 동호(東胡). 오환(烏桓). 해(奚). 산융(山戎). 실위(室韋. 몽골) 등이 포함된다.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숙신(肅愼)족은 만주 북동 방면에 거주하였는데, 나중에 말갈족(靺鞨族)으로 호칭되었다. 이들 말갈족(靺鞨族)은 베링 해협(Bering strait)을 건너 아메리카(America)로 건너가 인디언(Indian) 부족을 형성하였다. 중앙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피라미드(pyramid) 문명을 건설한 민족은 배달(倍達. BC 3,898-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후예들이다.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오손(烏孫)족은 서방으로 이동하다가 강거(康居)족과 융합하여 카자흐(Kazakh) 민족을 형성하였으며, 오늘날 카자흐스탄(Kazakhstan)이 되었다.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돌궐족(突蹶族)은 후국(侯國)의 형태로 있었지만, 고조선(古朝鮮)이 멸망한 후에는 부여(夫餘 BC 239-58) 및 고구려(BC 37-AD 668)와 혈맹 관계에 있었다. 고구려(BC 37-AD 668)는 돌궐(突蹶)과 동맹 관계를 통하여 중국의 수(隋)(581-618), 당(唐)(618907)을 방어해 낼 수 있었다.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夫餘 BC 239-58). 고구려(BC 37-AD 668) 계열의 부족들이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쪽으로 이동하여 고구려(高句麗) 민족인 훈족(Hun族)과 함께 돌궐족(突蹶族)이 연합하여 투르크족(Turk族)을 형성한 후, 552년 알타이 산(Altai Mountain) 기슭에 투르크(Turk) 제국을 세웠다. 투르크(Turk) 제국은 나중에 서방(西方)으로 이동하여 1299년 오스만 투르크(Osman Turk. 1299-1922) 제국이 되었고, 결국 오늘날 터키(Turkey)가 되었다.
한국과 언어 구조가 동일한 어족을 알타이어족(Altay language)이라 하는데, 알타이 산(Altai Mountain) 기슭에 세워진 투르크(Turk) 제국이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돌궐족(突蹶族)과 고구려(高句麗) 민족인 훈족(Hun族)이 중앙 아시아를 이동하면서 많은 지역에 문화를 남겼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돌궐(突蹶)은 서기 580년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뉘고, 동돌궐은 당(唐)의 회유 정책에 굴복하다가 멸망하였다. 그 후 돌궐족은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면서 우즈베크(Uzbekistan). 타지크(Tajikistan). 투르크멘(Turkmenistan). 위구르(Uyghur). 핀족(핀란드) 등 다수의 국가와 민족으로 분화되었다.
터키(Turkey)는 우리 한국(韓國)을 형제국(兄弟國)으로 역사 교과서에 기록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들의 조상인 투르크(Turk) 제국이 돌궐족(突蹶族)과 고구려(高句麗) 민족인 훈족(Hun族)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1950년 6.25 한국 전쟁 당시 한국전 참전 국자 중에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군인을 한국에 파병시킨 나라가 바로 터키(Turkey)이다. 2002년 월드컵(world cup) 축구 경기 때에도 그들은 한국이 축구 경기에 출전할 때마다 우리 한국(韓國)을 응원했었다.
고구려(高句麗)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들이 돌궐(突蹶)로 귀속해 들어갔는데, 돌궐(突蹶)은 특히 고구려 유민(遺民) 가운데 여성을 뽑아 종교의 수장(首長)인 제사장(祭司長)에 임명하였다. 이를 탕구르(당굴래=단군)라고 했는데, 고조선 시대 제사장의 수장(首長)을 단군(檀君)이라고 한 것과 같은 개념의 말이다.
한국인이 바이칼호(Baikal lake), 알타이 산맥,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로 왔다는 가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가설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상호 교류는 있었지만, 역사적 진실은 반대로 배달(倍達. BC 3,898-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夫餘 BC 239-58), 고구려(高句麗. BC 37-AD 668) 문명이 서방으로 이동한 것이다. 고조선(古朝鮮) 국가 붕괴로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서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문명 후예들이 서방으로 이동함에 따라 유럽과 중앙 아시아 대륙의 고대(古代) 역사가 격동하게 된 것이다.
■ 핀란드(Finland)와 훈족(Hun族) 및 고구려(高句麗)
핀족(Finns)은 훈족(Hun族) 계열의 기마 민족이다. 고구려(高句麗) 민족은 서기 4세기 초 무렵 이상(異常) 기온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할 때, 중앙 아시아의 흉노족(匈奴族)의 잔류 세력을 규합해서 훈족(Hun族)을 형성하였다. 훈족(Hun族)의 일부는 4세기 중엽에 알타이 산맥을 넘어 흑해(Black sea) 연안의 유럽으로 이동하여 게르만(germane) 민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후, 오늘날 헝가리(Hungary)가 되었으며, 일부는 우랄 산맥(Ural Mountains)을 건너 에스토니아(Estonia)를 경유하여 바다를 통해 핀란드(Finland)로 건너가 8세기 무렵에 이 지역에 정착했다.
핀란드(Finland)의 핀족(Finns)은 원래는 아시아인들처럼 검은 눈. 검은 머리였다. 하지만, 14세기 중엽부터 덴마크. 스웨덴. 네덜란드 등 바이킹족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잇따라 핀란드를 지배하면서 혼혈(混血)이 생기기 시작해 머리 색깔은 짙은 금발로 바뀌고, 겉모습 역시 지금의 북부 유럽인들처럼 변했다. 동양인과 서양인이 결혼해서 3대만 내려가면 유전적으로는 동양인의 형질이 더 많이 남아 있게 되지만, 동양인의 외관과 흔적은 사라진다.
핀란드(Finland) 사람들은 한국(韓國) 민족과 핀족(Finns)이 같은 계통이고, 핀족 전통 언어와 한국어가 문장 구조도 비슷하며, 핀란드의 핀족, 터키의 돌궐, 헝가리의 훈족, 흉노 위구르. 몽골 등등이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Ural Altay language) 계통으로 같은 뿌리이며 형제국(兄弟國)이라고 역사 시간에 배운다고 한다. 우랄 알타이 어족(語族)은 돌궐족. 흉노족. 터키족. 몽고족. 만주족 등 알타이어 계통과 헝가리어. 핀족(핀란드). 에스토니아어. 위그르족 등의 우랄어 계통으로 나뉘어 진다.
핀란드(Finland)의 핀족(Finns)은 우랄 알타이 어족(語族)에 속하는 인종이다. 언어는 현재 핀란드어(Finland language)를 사용하며, 현재도 핀란드 북쪽에서는 검은 눈에 검은 머리를 가진 종족들을 흔히 볼 수 있다.
■ 불가리아(Bulgaria) 왕국은 부여족(夫餘族)이 건설했다!
신채호 선생은 한민족(韓民族)을 부여족(夫餘族)이라고 하였다. 부여(夫餘 BC 239-58)는 고조선(古朝鮮, B.C2,333-238) 다음으로 만주(滿洲)를 중심으로 약 1000여년간 존속된 나라이다. 백제 성왕이 백제의 국호를 잠깐 남부여(北夫餘)로 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북부여(北夫餘)라고도 부른다. 부여(夫餘) 멸망 이후, 부여족(夫餘族)의 일부인 가(加)씨족은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하여 중앙 아시아의 카스피해(Caspian Sea)와 흑해(Black Sea) 사이에 도착했으며, 5-7세기 초까지 이 지역에 거주했다. 이때부터 서양사에서는 부여족(夫餘族)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씨족이라는 뜻이다.
635년 불가(Bulghar)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 연합을 결성하여 흑해(Black Sea) 연안에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쿠브라트(Kubrat)의 둘째 아들은 북으로 이동하여 불가강 즉 지금의 카스피해(Caspian Sea) 볼가(Volga)강 유역에 고추 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으며, 현재 타타르(Tatar) 공화국이 되었다. 그들의 언어와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 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되어 한국인의 모습이다.
쿠브라트(Kubrat)의 셋째 아들은 서방 흑해(Black Sea) 연안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Balkan) 반도에 도착하였으며, 681년의 비잔틴 로마(Roma)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발칸 반도에서 로마군을 모두 축출하고 그 해에 불가리아(Bulgaria) 왕국을 건국했다. 불가리아(Bul+garia)는 불가족의 땅(Bul+garia)이라는 뜻이다. 불가족은 귀족 신분이 되어 보야(Boyar)라고 불렸는데, 보야(Boyar. 부여의 변음)는 그들이 부여족임을 뜻하며, 그들은 슬라브(Slav)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그들은 단군(檀君)에게 제사를 올리고, 산 이름을 발칸 산(밝안산, 白山 고대 한민족이 제천 의식을 행한 산)으로 정하였다. 발칸 산은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붙어 있는 높지 않은 산이다.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등 다수의 지명이 남아 있다.
불가리아(Bulgaria)는 11세기부터 약화되어 도리어 비잔틴(Byzantine) 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속주(屬州)로 떨어졌다. 그 사이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Slav)족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Slav)족 모습을 많이 갖게 됐으며, 12세기 후반 다시 독립하였다. 불가리아(Bulgaria)의 언어와 문법 구조도 한국어와 비슷하다. 전통 문화와 전통 양식(정월 달집 놀이, 굿거리 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한 몽고 반점(갓난 아기 엉덩이의 반점)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몽고 반점(蒙古斑點)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Bulgarian)뿐이다.
■ The Huns and the forgotten Korean (훈족과 잊혀진 Korean)
→ 미국 디스커버리(Discovery) 채널 방송 내용
Europeans called them "Huns". Originating from the main land of Korea(Koguryo), they invade d the Roman empire during the 4th century.
고려(Korea. 고구려의 준말) 땅에서 일어난 그들은 4세기 기간 중에 로마(Roma) 제국을 쳐들어왔다. 유럽인들은 그들을 "훈족(Huns)"이라고 불렀다.
Around early 4th century, the temperature fell lower than usual for many years in far East Asia. It caused grains not to ripen, grazing grass land for animals was scarce.
4세기 초 무렵, 극동 아시아(고구려 일대)에서는 수년 동안 기온이 평상시 보다 떨어지는 이상 기온 현상이 발생하였는데, 그로 인해 곡식은 영글지 못하고 동물들에게 풀을 뜯어 먹일 수 있는 땅은 부족하였다.
For these reasons a large number of semi-nomadic tribes left from what is known today as the Korean mainland
이런 이유로 인해 상당수의 반(半)유목 종족은 오늘날 Korea라고 알려져 있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이탈하여 떠나게 되었다.
Gathering other tribes along the way they proceeded to the Central Asiatic step. From there, the mass of tribes went westward.
길을 따라 이민족(異民族)들을 규합하면서 그들은 중앙 아시아 쪽으로 발걸음을 계속했다. 그곳에서 종족 대부분은 서쪽으로 향했다.
Around AD 375 these nomadic people arrived upon the Horizon of the Roman empire. They established a kingdom along the Danube, on the prairies that are present day Hungary.
서기 375년 이 방랑민들은 로마(Roma) 제국 국경선에 도착하여 다뉴브 강(도나우강) 일대의 헝가리(Hungary) 지역과 흑해(Black sea) 북부 지역에 그들의 왕국인 훈(Hun) 왕국을 세웠다. 헝가리(Hungary)라는 국명은 훈(Hun) 왕국을 기념하기 위해 Huns에서 비롯된 것이며, 훈(Hun) + 땅(gary)의 합성어이다.
About AD 443, Attila, the son of King Ruga assassinated his brother Bleda and united all the Hun tribes. He lead the warriors onto ruthless and savage conquests, destroying anything in sight, looting and merciless killing of innocent people.
서기 443년 경, 루가왕의 아들 아틸라는 그의 형제 블레다를 암살하고 전(全) 훈족을 통일하였다. 그는 전사들을 이끌고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정복을 감행하였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닥치는대로 파괴하고 약탈을 하였을 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다.
He conquered Germany, Eastern Europe and most of southeastern Europe.
그는 독일, 유럽 동부 및 유럽 남서부 일대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였다.
The Huns were superior horseman and combined with their archery skills were the bane of the Romans.
훈족(Hun族)은 기마술(말타기)에 능한 이들로 궁술 또한 겸비하였는데 그것은 로마(Roma) 제국을 파멸시킨 큰 원인이었다.
They used a short, inverted bow made from few different materials glued together. An iron arrow head was able to pierce any European armor.
그들은 서로 강하게 접착된 다른 재료들을 가지고 제작된 짧은 역궁(逆弓. 맥궁)을 사용하였으며, 쇠로 된 화살촉은 유럽 군인들의 어떤 철갑옷도 관통시킬 수 있었다.
Their horses were short in height, but had speed and endurance, they were also agile and smart.
그들의 말은 키가 작았지만 빠른 속도와 강한 지구력이 있었으며, 훈족(Hun族) 또한 동작이 민첩하고 영민하기 짝이 없었다.
Hun warriors, while twisting their upper body, were able to shoot arrows behind them while their horses were running forward.
훈족(Hun族) 전사들은 말이 전방으로 달리고 있는 상태에서 말(馬) 위에서 상체를 뒤로 틀면서 그들 뒤편에 있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쏠 수 있었다.
Atilla invaded Italy in 452 with Germanic tribes.
아틸라는 452년에 게르만(germane) 민족들과 함께 이탈리아(Italy)를 침략하였다.
His army advanced to Venice (today's) and negotiated with a Roman representative Pope Leo for 10 hours.
그의 군대는 오늘날의 베니스로 진격하여 로마 교황 Leo와 장장 10시간동안 협상을 벌였다.
Atilla received tribute from Rome, and would thereafter retreat from Italy. Pope Leo received the title "The great" from the church for his successful negotiations with Atilla.
아틸라는 로마(Roma)로부터 공물을 받았으며 그 후 이탈리아(Italy)로부터 회군하게 된다. 로마 교황 레오는 아틸라와의 이 성공적인 협상으로 인해 교회로부터 대제(The great)라는 칭호를 받았다.
Atilla married to a German princess, Ideco in AD 453. After his wedding celebration he died that wedding night, possibly from alcohol poisoning.
아틸라는 453년에 독일 공주 Ideco와 결혼을 하였다. 그는 불행히도 결혼식날 밤에 사망하게 되는데 아마도 그의 사인은 주독(酒毒)인 듯하다.
After his death, the Hun kingdom crumbled and his people scattered from the Europe. He would be known as "the scourge of god" by the Roman Empire because of his cruel acts.
그가 죽은 후 훈(Hun) 왕국은 멸망하였으며 그의 백성들 또한 유럽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살아생전 잔인한 행위로 인해 그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신의 천벌"이라고 알려지게 된다.
The Huns left a number of legacies in Europe especially the Ch?eau area of France, all children born there have a blue round mark in their hip as the Mongolians do today.
훈족(Hun族)은 유럽에 특히 프랑스 Chateau 지역에 많은 유산을 남겼으며, 그곳에서 태어난 모든 어린 아이들은 엉덩이 부위에 오늘날 몽골인들과 동일한 파란 몽고 반점을 가지고 있다.
Funeral cultures of Europe are also deeply influenced from the Hun.
유럽의 장례 문화 역시 훈족으로부터 깊이 영향 받은 것이다.
★ 동양(東洋)과 서양(西洋)의 장례(葬禮) 문화 차이점
동양(東洋)에서는 삶은 잠시 머무는 것이며, 죽으면 다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한다. 생(生)과 사(死)는 낮과 밤과 같다고 생각하여 윤회(輪廻) 사상과 제사(祭祀)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장례 복장도 광명(光明)의 상징인 흰 옷(白衣)을 입는다.
서양(西洋)에서는 죽음을 삶에 대한 이질적인 개념으로 보고 아주 심각하게 여겼다. 그래서, 서양 기독교(基督敎)는 윤회(輪廻)를 인정치 않으며 제사(祭祀)도 지내지 않고, 장례 복장도 암흑의 상징인 검은 옷(黑衣)을 입는다. 이러한 차이를 모르고 현대인들이 서양 풍속과 정신을 따라 장례 복장으로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넥타이를 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원래, 로마(Roma) 사람들은 죽음을 패배와 슬픔으로 보고 그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화장(火葬)을 했었다. 고대 그리스(Greece) 시대에는 먼 곳까지 원정을 했던 그리스 병사들이 전사(戰死)한 동료들의 시신을 불태우고 철수하면서 유골(遺骨)만 본토까지 운구하는 화장(火葬) 방식이 생겨났다. 시신을 불에 태워 유골을 운반하면 부패의 염려도 없고 적은 인원과 장비를 가지고 효율적인 장례(葬禮)를 치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太兄思想'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우, 칭기즈칸, 인디언도... (0) | 2023.03.29 |
---|---|
음양사상 한국고유의것 (0) | 2023.03.29 |
산해관(山海關)의 비밀 (0) | 2023.03.29 |
치우(蚩尤)는 우리의 조상 (1) | 2023.03.28 |
삼황오제 (0) | 2023.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