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兄思想

치우(蚩尤)는 우리의 조상

太兄 2023. 3. 28. 19:20
 
 

치우(蚩尤)는 우리의 조상

太兄思想

2016-06-19 08:29:48


치우(蚩尤)는 우리의 조상

2002년 월드컵 때 축구응원단 '붉은 악마'가 치우천왕을 공식 캐릭터로 정하고부터 치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신화시대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영웅으로 전쟁의 신으로 다시 부활되면서 이제 친숙한 이미지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치우는 '중국인의 적'으로 생각하며 부정적인 시각이 강했다. 중국의 많은 역사서들은 치우를 포악무도한 도깨비 형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조상으로 받들고 있는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를 미화하기 위해서 치우를 야만인으로 비하시킨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권1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치우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와 있다.

   "신농씨(神農氏)의 나라가 쇠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툴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사납게 짓밟았으나 신농씨는 이를 휘어 잡지 못하였다. 이때 헌원(軒轅)이 무력으로 제후를 치니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그러나 치우(蚩尤)가 가장 사나워 칠 수가 없었다. 염제(炎帝: 神農)는 제후들을 쳐서 복종시키려 하였으나 이들은 모두 헌원에게로 돌아갔다. 헌원은 이에 덕으로 다스려 병사들의 전력을 떨쳤으며 오기(五氣 : 비[雨]·햇빛[陽]·더위[暑]·추위[寒]·바람[風])를 다스리고, 오곡(五穀 : 쌀·수수·보리·조·콩)을 심게하여 백성을 어루만졌다. 판천(阪泉) 들에서 염제와 세 번 싸운 후에야 이길 수 있었다. 이 때 치우가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키므로 헌원은 여러 제후들을 불러모아 탁록( 鹿)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이고 제후들이 헌원을 높이므로 신농씨를 대신하여 천자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측 기록은 이와 전혀 다르다. 조선 숙종1년(1675)에 북애노인(北厓老人)의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치우가 단군왕검의 고조선 보다 300여년 앞선 신시(神市)시대의 우리 조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 「태시기(太始記)」에는 황제헌원과 치우와의 싸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치우는 황하 북쪽에 살면서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을 관망하고 있었다. 이때 황하유역을 차지했던 염제 유망씨(楡罔氏)는 무도해서 제후들이 배반하고 민심은 떠났다. 치우는 씨족 내 장수 81명과 병사를 이끌고 직접 출전하여 유망의 본거지인 공상을 공격하였다. 1년 만에 12제후국을 얻고 이 곳에서 황제(皇帝)의 자리에 올랐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헌원이 난을 일으키니 치우와 탁록에서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은 치우는 대승으로 끝났다. 그리하여 지금의 희수 유역, 산동, 북경, 낙양을 모두 차지하였다. 황제헌원은 그 후 10여년간에 70여 회나 치우에게 도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황제헌원이 치우를 잡아서 죽였다고 한 기록은 치우의 한 부장이 공을 탐내 무리하게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잡혀서 죽은 것을 마치 치우가 잡혀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

   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 일본인에게 피살된 계연수(桂延壽) 선생이 1911년에 편찬한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치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영웅은 치우천황이다. 신라시대의 도깨비 기와는 치우천황의 얼굴이다.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치우천황은 5천년 전에, 이미 철제무기를 사용했던 인물로 전쟁의 신으로 전해지고 있다. 머리는 구리로 두르고 이마를 쇠로 가린 모습이었으며 쇠로 무기를 만들어내니 온 천하가 두려워하여 치우천황이라고 불렀다. 중국의 헌원황제가 치우천황과 수십 번을 싸웠으나 단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민족의 얼 속에는 치우(蚩尤)에 대한 유형 무형의 유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것들을 정리 해보았다.

▶ 도깨비상·귀면상(鬼面像)
   민족의 무신(武神)이다. 치우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도깨비상은 오래 동안 국난을 당할 때마다 어떤 침략자에게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우리 민족의 얼굴로 여러 곳에 새겨져 전해 왔다. 도깨비상들은 무서운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악의 없이 호탕하게 웃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우리 민족의 근엄하고 강건하고 호탕한 기상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 도깨비 이야기
   우리나라 도깨비는 복을 주는 신으로 도깨비가 사람을 해친다는 이야기는 없다. 부드럽고 친근하며 왕도깨비는 귀신을 쫓는 벽사신으로 인식되어 왔다. 치우가 황제와 싸울 때 치우부대는 도깨비로, 황제부대는 귀신으로 기록되었는데 치우부대가 황제부대를 제압하고 이긴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 녹유귀면와
   녹유귀면와는 신라 30대 문무왕 15년에 8년 동안 힘겨운 싸움 끝에 이 땅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3년 후인 서기 679년에 당나라가 다시 넘보지 못하게 해 달라는 염원으로 경주 배반동 낭산 밑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을 때 지붕에 얹은 도깨비상을 새긴 기와이다.
   한국문자학회 부회장 김대성씨는 한배달 특집 부록 ‘치우는 살아있다’에 기고한 ‘우리의 웃음’이란 글에서 이 녹유귀문와의 도깨비를 "눈을 부릅뜨고 있다. 입을 활짝 벌려 호호탕탕하게 웃고 있다. 눈썹도 콧구멍도 웃고 있다. 섬뜩하게 무서운 칼날 같은 송곳니와 이도 입과 함께 웃음을 머금고있다. 얼굴 전체가 자신만만한 힘이 넘쳐 있다. 힘은 넘쳐 있지만 해치려는 살기가 없다. 당당하고 흔쾌한 모습이다. 얼굴 주위에 구름모양, 불꽃모양의 무늬를 둘렀다. 그리고 바깥에는 알이 박힌 둥근 원으로 죽 둘러 새겨 놓았다. 알은 태양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고 태양의 알, 불의 알은 신농계(神農系) 동이족(東夷族)을 의미한다. 도깨비상은 전쟁의 신이자 우리 민족의 수호신인 치우(蚩尤) 장수"라고 설명하고 있다.

▶ 옛 치우 도깨비상 유물
- 창덕궁 교각에 새겨진 귀면상
- 창덕궁 안을 지나는 개울을 건너는 다리 중심부 귀면상
- 육사박물관에 소장된 무장의 투구에 장식된 도깨비상
- 육사박물관에 소장된 쇠도리깨와 쇠몽둥이 손잡이에 새겨진 도깨비상
- 도깨비상 깃발
- 막새기와
- 창덕궁교각(우)과 다리중심부(좌)에 새겨진 도깨비상
- 무장의 투구 장식품에 도깨비상
- 쇠도리깨 손잡이와 쇠몽둥이 손잡이에 새겨진 도깨비상
- 치우기 도깨비상(육사박물관 소장)              

▶ 붉은악마 축구응원단 깃발
   축구응원단 붉은 악마는 1999년 치우천왕을 공식 캐릭터로 정하고 그 해 3월 29일 한국-브라질 경기가 열린 잠실경기장에 가로 4m, 세로 3m의 대형 깃발로 첫 선을 보였다. 4500여년 만에 깨어난 치우천왕은 세계 최강 브라질을 1:0으로 이기면서 불패의 신화를 보여 주었다. 붉은 악마는 치우천왕에 대해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 축구의 빛나는 승리를 지켜주는 상징’이라고 자랑한다. 승리를 목표로 하는 축구경기에서 전쟁의 신, 승리의 상징 치우를 캐릭터로 선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깊이 내재한 치우의 발로인 것이다. (2002. 6. 15일자 한겨레)

▶ 장승
   장승의 특징은 왕방울 눈인데 이는 모든 악귀에게 위협하여 겁을 주고 접근을 막는 액막이 역할을 하는데 치우천황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 치미(蚩尾)
   치미는 궁궐, 능원, 사찰 등 건물의 지붕 위에서 용마루를 지키고 있는 새의 날개처럼 생긴 망새라는 장식물을 흔히 치미라고 부른다. 원래 용(龍)의 아홉 아들 중 불을 제압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이문(?蚊)인데 언제부터인지 치우(蚩尤)를 말하는 치미라 불러왔다.

▶ 둑=독(纛)
   이의실록(貳義實錄)에 의하면 둑(纛, 독이라고도 발음함)은 치우 형상을 넣어 만든 깃발인데 마름모꼴의 뿔이 달린 투구 형상을 중심으로 활 모양의 받침대를 그린 것으로 치우를 가리키는 또 하나의 표상이다. 둑기를 세워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둑제라 하는데 둑제는 물을 다스리는 신에게 올리는 제사다. 이순신 장군은 상강(霜降)과 경칩(驚蟄)에 물 가에서 둑제를 지냈다.
   서울의 뚝섬은 원래 둑제를 지내던 둑신사가 있었는데 뚝섬은 이 둑신사에서 온 이름이다. 둑신사에는 높이 6자 폭 36자의 벽화가 있었는데 치우와 황제와의 싸움 탁록전을 그린 그림이었다.왜정 말기까지 있었으나 분실되었다. 둑신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둑신이 곧 치우신이고 둑신을 표상하는 둑신기(纛神旗)가 있는데 이 둑신기가 태극기의 원형이다.

▶ 둑신기
   조지용 저「三神民考(삼신민고)」에 실린 둑신기. 저자는 이 둑신기를 안곽(安郭)의 ‘황제전쟁의 전설 벽화’에서 얻었다고 기록하고있으며 치우천황을 모신 사당인 둑신사에 그려진 것으로 이 둑신기가 태극기의 원형이라고 말하고 있다.
   논둑, 밭둑의 어원이 이 둑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치우라는 말이 산림과 하천을 관리한다는 말로도 통하고, 둑기에 치우가 그려진 것은 둑을 만든 주인공이 치우임을 말하는 것이다.
   또독(纛)자에 독(毒)자가 들어 간 것은 두꺼비가 독을 품고 있어 자가 방어를 한다는 뜻이 되며 독(纛)은 두꺼비를 말하면서 치우를 가리키는 글자이다.
   튼튼한 몸에 씩씩한 기상이 있는 사람을 뚝심이 있다고 표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때 독하다고 말하는 것 등은 모두 치우를 말하는 독 또는 둑 (纛)에서 유래된 말이다.

▶ 민속에 남아있는 치우
- 둑신사의 치우부적
- 음력 5월 5일 단오날에 문설주에 붙이는 단오부적
   우리나라 세시 풍속에 5월 단오날에 각 가정에서는 불길한 것을 제거하는 뜻으로 주사(朱砂) 로 벽사문(僻邪文)을 지어 문설주에 붙이는데 이것을 단오부적이라 한다. 조정에서도 관상감에서 해마다 단오부적을 만들어 대궐 안 문설주에 붙여 불길한 재액을 막는다. 부적으로 지은 글에 치우가 들어있다.
<五月五日 天中之節 上得天祿 下得之福 蚩尤之神 銅頭鐵額 赤口赤舌 四百四病 一時消滅 急急如律令 (오월오일 천중지절 상득천록 하득지복 치우지신 동두철액 적구적설 사백사병 일시소멸 급급여율령)>
  - 5월5일 천중절(단오날)에 위로는 하늘의 녹을 받고 아래로는 땅의 복을 얻어 치우신의 구리머리 쇠 이마 붉은 입 붉은 혀로 사백 네 가지 병 일시에 없애라. 빨리빨리 법 데로 시행하라.

▶ 두무(兜 務아래金)=투구
   두껍의 고대어가 두무인데 오늘날의 투구를 말한다. '인두껍'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주 황당한 사람 이하의 일을 할 때 '사람이 인두껍을 쓰고 어찌 그럴 수 있나'라고 한다.
   두무 또는 두껍은 중국 역사가들이 치우를'구리머리 쇠이마(銅頭鐵額)'라고 기록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또 치우 군사는 갑옷도 만들어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두무의 두(兜)와 갑옷의 갑(甲)이 합하여 두갑이 되고, 변음하여 두껍, 두꺼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임신한 여자에게 덕담으로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라고 하는데 떡은 뚝이 변한 것이고, 뚝은 둑(纛)으로 치우를 말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민족은 은연중에 치우를 남자의 표상으로 흠모하면서 치우 같은 아들을 낳아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병사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모양이나, 투구 쓰고 갑옷 입으니 자연 걸음이 느릿느릿 한 것이 두끼비와 닮았기 때문에 두꺼비란 동물의 이름이 여기서 생겨났고다. 느린 걸음을 뜻하는 글자 치(蚩)도 생겨났다고 하는데 투구와 갑옷으로 중무장한 치우의 군사들이 느릿느릿 걷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중국측 기록에 치우의 머리에는 소처럼 두 개의 뿔이 났다 하였는데 이는 투구에 두개의 뿔이 있는 것으로 풀이 되며, 치우의 뿔 달린 투구는 고구려 군사의 투구와 고려 군사의 투구로 이어진 것이다. 소뿔 달린 투구는 용맹을 상징하고, 싸움에서의 승리를 상징하는 치우의 모습이다.

▶ 천하장사 씨름과 황소
   힘이 센 장사를 지위 즉 치우라 하였다.  소는 힘의 상징이고, 농경사회에서 제일 상징적인 짐승이기 때문에 때로는 치우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씨름에서 우승한 장사 에게 상으로 소를 로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치우상
- 강화도 마니산 환단학회(桓檀學會) 대성전에 모셔진 치우상 그림

▶ 사천왕상(四天王像)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 오면서 치우는 절의 입구에서 절과 부처를 지키고, 불법에 귀의하는 중생의 안전을 지켜주는 네 신 사천왕에 등장한다. 네 사천왕은 네 가지 형상으로 다르게 조형되었지만 공통적인 것은 배 부분에 도깨비 치우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천왕은 수미산(須彌山) 중턱 사왕천(四王天)에 있으면서 사방(四方)을 진호(鎭護)하는 네 신(神)이다. 지국천(持國天)은 동쪽, 광목천(廣目天)은 서쪽, 증장천(增長天)은 남쪽, 다문천(多聞天)은 북쪽을 맡아 지키며, 위로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고, 아래로는 팔부중(八部衆)을 지배하여 불법에 귀의하는 중생을 지켜준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나라 불교에서 사천왕에 치우상을 등장시킨 것은 절 문간 청지기로 격하한다는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처의 세계에서도 역시 치우를 강하고 싸움을 잘하는 강자로 인정한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형산 정경연>
참고자료 :
치우학회 홈페이지(http://chiwoo.org)
사월(沙月) 이성영(李盛永) 홈페이지(www.sungyoung.net) 『치우(蚩尤)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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