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19세기말 만민공동회 주도… 왕정 허물고, 민주공화정으로 나가다
① 최초의 자발적 민중집회… 지도자로서 두각 드러내
연재를 시작하며
조선의 근대화는 개항(開港)이라 불린 변혁으로 시작되었다. 본질적으로, 개항은 우세한 유럽 문명의 도래라는 도전(challenge)에 대한 조선의 대응(response)이었다. 중세 사회였던 조선이 현대 사회로 진화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대응이 성공적이었음을 뜻한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근대화 과정을 이해하는 일에선, 중요한 고비들에서 활약한 인물들의 행적을 살피는 것이 좋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거의 모든 고비들에서 활약한 인물을 가졌다.
이승만은 공식적 개항 전년인 1875년에 태어났고 1890년대 말엽부터 1960년까지 정치 지도자로 활약했다. 조선 역사의 변곡점들에서 그가 한 일들을 살피면, 우리는 우리 역사를 줄거리가 뚜렷한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
‘선구자이자 스승’ 서재필과의 만남
위대한 인물이 나오려면, 그가 가야 할 길을 열어주는 선구자가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대한 업적을 남길 사람이 길을 여는 데 매달려서 자신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승만의 경우, 그런 선구자는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손에 피를 묻힌 혁명가였다. 1884년의 갑신정변에서 그는 병력을 지휘해서 수구파 대신들을 처형했다. 청군(淸軍)의 개입으로 정변이 실패하자, 그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물론 그의 집안은 참화를 입었다.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갑오경장을 추진하자, 서재필은 개화파 정부의 초청으로 귀국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인민들의 지식 수준이 사회 발전을 결정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했다. 그래서 먼저 ‘독닙신문’을 발행했다. 1896년 4월에 처음 나온 타블로이드판 4면의 이 작은 신문은 조선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조선 부인네도 국문을 잘하고 각색 물졍과 학문을 배화 소견이 높고 행실이 졍직하면 무론 빈부 귀쳔 간에 그 부인이 한문은 잘하고도 다른 것은 몰으는 귀족 남자보다 높은 사람이 되는 법이라.” 창간호 논설의 이 한 구절은 남녀 차별과 신분 차별에 바탕을 둔 전통적 질서에 대한 힘찬 도전이었다. 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혁명가가 세상은 글로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었다.
이어 서재필은 정치적 개혁을 위한 조직으로 ‘독립협회’를 세웠다. 바쁜 가운데서도 그는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의 강의에 감화된 학생들 가운데 여럿이 조선의 지도자들로 자라났는데,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이 특히 두드러졌다.
당쟁의 폐해를 경험한 터라, 서재필은 건전한 토론 문화를 함양하는 데 힘을 쏟았다. 스승의 뜻을 받들어, 학생들은 ‘협셩회(協成會)’라는 토론 모임을 만들어서 일반인들까지 참여시켰다. 이 모임이 크게 성공하자, ‘협셩회보’가 발행되었는데, 이승만은 주필이 되어 토론을 이끌었다.
당시는 아관파천(俄館播遷) 직후라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러시아는 부산항 입구의 절영도(絶影島)를 조차해서 급탄항(coaling station)을 만들겠다고 조선을 압박했다. 정부가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줄 기미를 보이자,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에 종로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었다. 1만여 명이 모인 이 집회는 쌀장수 현덕호를 회장으로 뽑았다. 이어 이승만을 비롯한 연사들이 정부 정책을 거세게 비판했다. 결국 인민들은 러시아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을 내보내라고 정부에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틀 뒤엔 서울 남촌의 평민들이 스스로 2차 집회를 열어 자주 독립의 기초를 놓자고 결의했다. 독립협회는 월미도의 일본 급탄항도 회수하라는 서한을 외부(外部)에 보냈다.
두 차례의 만민공동회 집회에서 조선 민중의 뜻이 뚜렷이 드러나고 다른 나라들의 반응도 부정적이 되자, 러시아는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절영도의 급탄항 계획도 취소했다. 이런 상황에 떠밀려서, 일본도 월미도 급탄항을 조선에 반환했다.
회장은 쌀장수… 신분제 틀을 깨다
평화로운 집회였지만, 두 차례의 만민공동회는 진정한 혁명이었다. 인민들이 스스로 모여 정부에 잘못된 정책을 시정하라고 요구해서 관철시킨 것도 혁명적이었지만, 쌀장수를 회장으로 뽑은 것도 엄격한 신분제를 허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급탄항 설치를 막았을 뿐 아니라 이미 설치된 일본의 급탄항도 회수했다.
실질적 성과에 고무되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지도자들은 의회 설립을 정부에 요구했다. 정부가 거부하자, 그들은 10월 1일부터 친로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궁궐 앞에서 철야 시위를 했다. 이때는 고종과 러시아의 미움을 받은 서재필이 미국으로 추방된 터여서, 인민들의 집회는 이승만을 비롯한 소장파 지도자들이 이끌었다. 결국 고종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박정양과 민영환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정권이 출범했다.
승기를 잡은 개혁파는 10월 하순에 종로에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열어 대신들과 정무를 협의했다. 이 회의에서 고종에게 올리는 ‘헌의(獻議) 6조’가 채택되었는데, 핵심적 요구는 실권 없는 중추원을 실질적 의회로 만드는 개혁이었다. 고종은 이런 요구를 받아들였다. 인민들이 국왕에게 의회 정치를 펴라고 요구해서 뜻을 이룬 것이었다.
위기를 느낀 수구파는 ‘개혁파가 공화정을 시도한다’고 모함했고, 고종은 음모를 꾸민 자들을 체포하고 독립협회를 해산하라고 명했다. 11월 5일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되었다. 고종의 배신에 분노한 인민들이 거리로 나오자, 이승만은 그들을 이끌고 경무청으로 가서 독립협회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시간이 지나자, 추위와 배고픔으로 시위대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승만은 찾아온 아버지의 애원도 외면하고 고종이 파견한 관리들의 회유도 물리치면서, 열정적 연설로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았다. 둘째 날 밤엔 군악대를 앞세운 군대가 행진해왔다. 이승만은 혼자 그들에게 다가가서 고수(鼓手)들을 발길로 걷어찼다. 놀랍게도, 그 군대는 순순히 물러갔다. 마침내 11월 10일 고종은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모두 석방했다.
이런 성공에 고무되어, 인민들은 해산하지 않고 종로로 옮겨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다시 설립하고 ‘헌의 6조’를 시행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고종은 전국의 보부상들을 불러들여 이들을 탄압했다. 몽둥이를 든 보부상들의 공격에 많은 사람이 다쳤다. 당시 정동에서 집회를 주도하던 이승만은 사람들을 이끌고 보부상들과 싸웠다. 그가 보부상을 이끈 황국협회 회장 길영수를 발길로 걷어차는데, 누가 뒤에서 껴안으면서 소근거렸다, “이승만씨, 빨리 피하시오.” 이승만이 돌아보니, 그 혼자 남아 있었다. 순간적 판단으로, 그는 피하는 대신 보부상 대열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보부상 대열을 헤치고 나와 배재학당으로 들어서자, 그의 친구가 울면서 “이승만이 죽었다”고 외치고 있었다. 신문들도 이승만이 보부상들과 싸우다 죽었다고 보도했다. 이 일화는 앞에서 이끄는 이승만의 지도력을 보여준다. 6·25전쟁에서 그는 최일선을 자주 찾았고, 위험한 전선을 찾은 대통령의 모습에 장병들은 감격해서 환호했다.
불행하게도, 마포나루에선 신기료 장수 김덕구가 실제로 맞아 죽었다. 이 사건에 격발된 인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보부상들과 싸웠다. 그리고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정부를 규탄했다. 결국 고종은 인민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
상해 임시정부 ‘정신’의 밑바탕으로
12월 1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김덕구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다. “대한제국 의사 광산김공 덕구지구(大韓帝國義士光山金公德九之柩)’라 쓰인 명정(銘旌)들을 앞세운 장례 행렬은 종로에서 숭례문을 거쳐 갈월리 묘지로 향했다. 많은 인민이 학교와 동리의 깃발들을 들고 행렬에 참여했다. 헌 신 깁는 신기료 장수를 ‘의사’로 추앙한 이 장례 행렬은 만민공동회가 지향한 ‘신분 평등’과 ‘민주주의’가 이미 조선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렸음을 세상에 알렸다.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세워질 때, 누구도 왕정복고를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 민주공화국을 지향했다. 조선 왕실에 대한 깊은 실망이 왕정복고를 막았다면, 만민공동회의 기억이 민주공화정을 향한 첫발을 선뜻 내딛도록 했을 것이다.
[이승만의 ‘결정적 순간’]
‘워싱턴 밀사’의 임무…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반세기 만에 결실 봐
러일전쟁 초기에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바다와 육지에서 잇달아 격파하면서, 한반도는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앞날을 걱정한 민영환과 한규설은 주조선 미국 공사를 지낸 휴 딘스모어 하원의원에게 조선을 도와달라는 밀서를 보내기로 했다. 그들은 이승만을 밀서를 지니고 갈 밀사로 뽑았다.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한 죄로 여섯 해를 감옥에서 보내고 나온 이승만은 두 우국 대신의 제의를 선뜻 수락했다. 1904년 11월에 그는 밀서를 품고 제물포에서 기선에 올랐다. 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평화 협상을 주선하던 루스벨트에게 약소국 조선은 중요한 변수가 되지 못했다.
그 뒤 이승만은 해외에서 힘든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어 새로 세워진 대한민국을 이끌었다. 한국전쟁에서 휴전 협상이 시작되자, 그는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 공산군과 휴전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주장하면서 거세게 반대했다. 결국 그는 휴전에 대한 동의의 대가로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냈다. 1904년에 부여받은 호국의 임무를 반세기 만에 이룬 셈이다.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냉혹한 현실에서 실제로 나온 이런 시적 정의(poetic justice)가 이승만의 길고 힘들었던 삶을 위대한 서사시로 만든다.
이승만의 삶이 곧 한국 근대사
‘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오늘부터 새 연재 시작합니다
소설가 복거일(77)이 쓰는 새 연재 ‘이승만 오디세이’를 시작합니다. 진영 논리에 따라 엇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우리나라 근대화의 거의 모든 고비마다 이 풍운아의 성공과 실패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자신이 혼란스런 조국 근대화와 하나였던 삶.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그는 조선의 개항 직전 해인 1875년에 태어났고, 1890년대 말부터 1960년까지 정치 지도자로 활약했습니다.
지나친 이념 논쟁 때문에 그의 업적이 곡해되거나 간과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승만 기념관’ 하나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최근 이승만 전기소설 ‘물로 씌어진 이름’을 펴낸 복거일이 담담한 필체로 이승만의 모험을 함께 합니다. 민주공화정을 향한 첫발을 내딛게 만든 만민공동회부터 농지 개혁, 반공포로 석방, 한미 상호 방위조약 체결, 공업 발전 등 대한민국 탄생 과정에서 보여준 이승만의 결정적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승만 오디세이’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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