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대법관의 가벼운 처신

천대엽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지난 13일 충남 부여에서 열린 전국법원장간담회에서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에서 사법부와 법관의 생명과도 같은 객관성과 중립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지극히 옳은 말이지만, ‘12·3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한 그의 잇따른 발언은 스스로에게도 이런 원칙을 적용하고 있는지 의심하게 한다.
천 대법관은 지난 1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나와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재판장 지귀연)의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 구속 취소 결정에 대해 “검찰이 즉시항고해 대법원 판단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즉시항고를 할지 말지는 행정부 소속인 검찰의 업무 영역이다. 사법부 최고위직이 행정부에 ‘소송 사주’를 한 셈이다. 대검찰청은 다음 날 “검찰총장이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라며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검찰은 천 대법관 말만 믿고 즉시항고를 했다가 상급심이 “1심 판단이 맞다”며 기각하는 상황까지 고려했을 것이다. 현직 대법관의 ‘말의 무게’가 떨어진 순간이었다.
검찰 내부에서는 천 대법관이 “법원이 윤 대통령을 석방시켰다”는 비난의 화살을 검찰에 돌린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 부장검사는 “검찰은 법원의 보석과 구속 집행 정지 결정에 대한 즉시항고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판례가 이미 나온 만큼, 피고인의 신병과 관련해 더 중요한 결정인 구속 취소에 대한 즉시항고는 위헌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면서 “일반인도 아닌 현직 대법관이 위헌 결정이 뻔히 예상되는 즉시항고를 하라는 건 매우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만약 검찰이 즉시항고를 하고, 상급심이 1심 결론을 뒤집는다면 대법관이 ‘가이드라인’을 줘 재판의 공정성이 훼손됐다는 비판이 나왔을 테다. 어떤 결론이든 천 대법관의 발언은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 대법관의 발언과 반대되는 일은 비상계엄 사태 초기에도 있었다. 천 대법관은 작년 12월 9일 국회에서 “검찰이 (내란죄에 대해) 수사권을 가지고 있는지 (법원) 내부적으로도 많은 논란이 있다”고 했다. 2021·2022년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이 직접 수사할 수 있는 범죄가 제한됐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남천규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검찰에 이번 사건 수사권이 있다고 했다. 검찰이 앞서 청구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조지호 경찰청장 등 김 전 장관의 공범인 경찰공무원 범죄는 검찰의 직접 수사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천 대법관은 “경찰이 (이 사건에) 수사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말도 했었는데 여기서 그쳐야 했다.
법원행정처장은 대법관 14명 중 한 명으로, 국회 또는 국무회의에 출석해 발언할 수 있다. 국민은 대법관의 말과 처신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에 알게 됐을 것이다. 천 대법관 스스로도 새삼 절감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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