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경제

"메이지유신에서 배웠습니다, '인재가 바로 국운'이더군요"

太兄 2024. 11. 23. 18:46

"메이지유신에서 배웠습니다, '인재가 바로 국운'이더군요"

[아무튼, 주말]
[박종인 기자가 물어보았다]
일본사를 공부하는 CEO 수산그룹 정석현 회장

입력 2024.11.23. 00:30업데이트 2024.11.23. 11:47
서울 청계천 공구상 사장에서 출발한 정석현 회장은 지금 매출 7000억원대 수산그룹을 경영하는 기업인이다. 정 회장은 “인재를 양성하고, 믿고, 맡기면 된다”고 했다. 인재 경영 원칙을 그는 일본 메이지유신에서 찾았다고 했다. 들고 있는 책은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평전이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정석현(73)씨는 어릴 적 가난했다. 집안은 농사를 지었다. 살던 곳은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이다. 20리 떨어진 중학교는 걸어서 다녔다. 공고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낮에 일하고 밤에 대학교에 다녔다. 10년 만에 사표를 내고 공구 판매상 ‘석원상사’를 창업했다. 그게 1980년이다.

44년이 지난 2024년, 석원상사는 8개 계열사를 가진 ‘수산그룹’으로 성장했다. 2004년에 인수한 수산중공업 이름을 그대로 쓴다. 고향 ‘장수’와 ‘산서’가 떠올라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업종은 발전소 종합정비, 소프트웨어 개발, 특수장비 제조 등이다. 이 가운데 수산ENS는 한국수력원자력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체코 두코바니 원자력발전소의 주기기인 원자로 자동제어시스템(MMIS)을 개발한 선도 기술 기업이다. 계열사 연간 총매출액은 7000억원대. 빈농 아들이 창업을 하고 기술을 만들고 경제적으로 대성공했다. 그 정석현이 지금 역사에 빠져 있다. 그것도 일본사, 그것도 메이지유신이라는 일본 근대사 사건에.

정석현 회장은 임직원들과 함께 메이지유신 유적지로 3박 4일 답사 연수를 떠난다. 지금까지 14회에 걸쳐 450명 넘게 다녀왔다. /수산그룹

가난이 이끌어준 거부(巨富)

-가난했습니까.

“저희 집은 전북 장수에서 가난하게 농사짓고 살았습니다. 5·16장학금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걸로 학비 충당하고 20리 떨어진 오수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걸어서요.”

-전공이 기계공학이시죠?

“역시 가난 덕분입니다. 빨리 취직해서 돈 벌려고 전주공고 기계과에 들어갔습니다. 1970년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고졸 공채로 입사했습니다. 상사들 배려로 한양대 기계공학과를 야간으로 다녔습니다.”

-창업은 왜 하신 거지요.

“과장 대리 때 정주영 회장 결재를 자주 받으러 다녔습니다. 저는 정 회장께서 굉장히 학력이 높으리라 상상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으셨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사업이라는 게 학력보다는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가 더 중요하구나, 라고요. 1979년 대학 졸업과 함께 미래를 고민하던 때였는데, 바로 사표를 내고 창업했습니다.”

-성공적이었습니까.

“중화학공업 건설 붐이 일었습니다. 현대 다니면서 어떤 현장에 어떤 공구가 필요한지 잘 알았죠. 필요한 공구를 예상해서 구매한 뒤 수요가 있을 때 내놓으면 다 팔렸습니다. 그걸 시작으로 지금의 수산그룹으로 성장했습니다.”

-실패도 겪으셨겠지요.

“1997년 IMF 때 동남아 플랜트 현장에서 어마어마한 환차손이 발생했습니다. 발주처가 선처해줘서 위기를 넘겼는데, 그때 깨달았습니다. 대기업 의존형 하청 사업은 하지 말자, 대신 대기업이 찾을 수 있는 기술 특화 제품을 만들자고요. 2008년에는 KIKO(제1금융권이 판매한 환헤지 파생 금융상품. 환율 급상승으로 중소기업 대규모 도산 사태가 벌어졌다) 사태로 3년 치 영업이익을 손실 방어에 쏟아부었습니다. 망할 뻔했지요. 계열사인 수산중공업 노조가 고통 분담을 적극적으로 해줘서 5년 만에 극복했습니다.”

계열사인 수산중공업 공장을 점검 중인 정석현 회장 /조선일보DB

삶을 깨닫게 해준 투병생활

-많이 아프셨다면서요.

“키코 사태 때 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이었습니다. 중소기업인들이 너무 안쓰럽고 금융권 횡포가 너무나 분하고 억울해서 동분서주했던 것 같습니다. 간경화가 오더군요.”

-어떻게 나으셨는지요.

“7년 동안 출근을 못 했습니다. 독한 인터페론도 맞고 미국 병원에 입원해 치료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신약이 나온 겁니다. 기적 같았죠. 지금은 99% 완쾌됐습니다.”

-생각도 많으셨겠네요.

“작은 이익도 포기할 줄 모르던 내 삶이 얼마나 무가치했나 깨달았지요. 안 아팠으면 이렇게 소중한 인생의 의미도 모르고 덤벙덤벙 살다 갈 뻔했습니다. 그래서 2016년 기쁜 마음으로 출근했지요. 그런데....”

죽음에서 생환한 기업인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제가 없으니까 회사가 더 잘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매출도 이익도 더 늘어나 있고요.”

-어떻게?

“전문경영인이 합리적이고 자율적으로 잘해 왔더군요. 저는 새벽부터 야밤까지 닦달하는 스타일이었거든요. 그래서 또 깨달았습니다. 인재를 기르고 그 인재들에게 믿고 맡기면 되는구나! 지금은 일상적인 결재는 전문경영인들 전결로 처리합니다.”

"조선과 일본의 근대가 달랐던 건 바로 인재 대우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조선은 인재를 다 죽였고 일본은 활용했습니다. 나라를 이끌 인재가 없었으니까 국운이 쇠락한 겁니다. 국운은 인재입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메이지유신과 과학기술

-기업인이 왜 메이지유신을 공부하시는지요.

“투병 중이던 2011년 이광훈 작가가 쓴 ‘상투를 자른 사무라이’를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내가 무지했구나 반성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근대화를 시도도 해보지 못한 조선의 차이가 뭔지도 궁금해졌습니다. 학교에서 안 배웠잖습니까. 이광훈 작가를 만나고, 함께 일본 답사도 하면서 빠져들었습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일본은 세계적 강국으로 성장했다. ‘상투를 자른 사무라이’는 메이지유신과 한일 관계를 다룬 저서다. 저자 이광훈은 2020년 작고했다.

“과학기술의 중요성과 외교력을 대하는 국가 지도자들의 태도를 배웠습니다. 과학기술이 곧 국력이라는 사실을 사무라이들은 절감했더군요.”

-왜 일본 지식인들은 변화를 택했을까요.

“260년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평화를 누리면서도 사무라이들은 외세의 변화를 관찰하고 살폈습니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 서양 함대 앞에 무참히 무너지는 대청제국을 젊은 사무라이들이 목격합니다. 그리고 자기 나라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때까지 일본도 쇄국정책을 펴지 않았던가요.

“그랬지요. 그런데 아편전쟁 같은 일이 1853년 일본 본토에서 벌어집니다. 미국 함대가 도쿄 앞바다에서 대포를 쏴댄 거지요. 도쿠가와 막부가 미국과 조약을 맺자 사무라이들이 막부 타도를 외치고 쇄국을 외쳐댑니다. 결국 서로 앙숙이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힘을 합쳐 막부 타도에 성공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거꾸로 쇄국을 풀어버립니다. 목숨을 걸고요. 서양을 배척해 나라를 지키는 ‘소양이(小攘夷)’가 아니라, 교류를 통해 서양 기술을 배워서 서양을 제압하는 ‘대양이(大攘夷)’가 진짜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각성하게 되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교류를 한 건지요.

“조슈번이 영국한테 지니까 영국으로 청년들을 유학 보냅니다. 사쓰마번도 적국인 영국에 유학단을 보냅니다. 왜 졌는지 배우라는 겁니다. 이걸 ‘화혼양재(和魂洋才)’라고 불렀습니다. 일본의 혼(魂)만 빼놓고 다 배우겠다는 거죠. 또 1868년 메이지유신 3년 뒤, 1871년에 일본 정부는 이와쿠라사절단이라는 대규모 유학단을 파견합니다. 최고위 권력자 3분의 1이 미국과 유럽을 1년 10개월 동안 순방하며 근대를 배워 옵니다. 그 근대를 토대로 일본은 정치제도 개혁, 과학기술 진흥, 기업 설립을 추진하면서 근대화를 성공시킵니다.”

-조선도 나름대로 근대화를 추진하지 않았던가요.

“외면했습니다. 선비들은 전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과학기술은 쟁이들에게 시키면 되는 천한 하급 직능으로 생각하고 학문으로서 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 지도자들 차이가 마치 극적으로 만든 소설 같습니다.”

지난 7월 한국수력원자력이 체코 두코바니 원전 건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원자로 시공은 두산에너빌리티, 그리고 핵심 시설인 자동제어시스템(MMIS) 제작 및 운용은 수산ENS가 맡았다.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국운은 인재

-‘조선이 500년이나 갔으니, 그때 국운(國運)이 다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재(人材)가 국운입니다. 지도자의 인재 용인술이 국운입니다. 과학 기술을 진보시킬 수 있는 인재 총합이 국력입니다. 국가 지도자가 이런 인재들을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따라 국운이 결정됩니다. 그게 국운이 상승하느냐 쇠퇴하느냐를 결정합니다.”

-이 또한 메이지유신에서 배운 건가요.

“맞습니다. 예컨대 에노모토 다케아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메이지유신 세력에 저항해 홋카이도에 에조공화국을 세운 사람입니다. 1869년 정부군이 항복을 요구합니다. 정부군 사령관이 구로다 기요타카인데, 에노모토가 항복 요구 문서를 들고 온 전령에게 구로다에게 주라면서 책 한 권을 줍니다. ‘만국해율전서’라는 책입니다. 에노모토가 네덜란드 유학 시절 강의를 들으며 탐독했던 국제법 서적입니다. 에노모토가 책에 편지를 동봉하죠. ‘일본에 꼭 필요한 책인데, 일본에 한 권밖에 없다. 전투 중에 불에 타 사라질까 봐 보낸다.’ 반란군 처벌은 참수형입니다. 그런데 감동받은 구로다가 삭발 시위를 하면서 처형을 반대합니다. 그 에노모토가 러시아 공사로 일하고 홋카이도 개발에 헌신합니다. 인재는 아껴두면 언젠가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큰일을 하지요.”

-조선은 어땠습니까.

“1589년 ‘기축옥사’로 선비 1000명이 죽었습니다. 선비들은 인재들이죠. 인재만 골라서 처형된 겁니다. 결과가 참혹합니다. 3년 뒤 임진왜란이 터집니다. 전쟁을 이끌 사람이 없었습니다. 300년 뒤 1884년에는 갑신정변 때 개화파들이 절멸됩니다. 조선과 일본 근대가 달랐던 건 바로 이 인재 대우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조선은 인재 다 죽였고 일본은 활용했습니다. 나라를 이끌 인재가 없었으니까 국운이 쇠락한 겁니다. 국운은 인재입니다.”

정석현 회장은 마음이 꽂힌 책을 대량 구입해 서명을 해서 지인에게 나눠준다. /박종인 기자

한강의 기적과 인재 경영

-투병 생활이 메이지유신을 알게 해줬고, 인재 경영으로 이어진 거군요.

“맞습니다. 과학기술이 세상을 바꿉니다. 과학기술이 국력입니다. 모범 답안, 그러니까 국제 표준을 만들어서 다른 국가들을 줄 세울 수 있죠. 미국이 그렇고 일본이 그렇습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패전 후에도 인재를 양성해 원천 과학기술을 확보하면서 패전국에서 자유 진영 강대국으로 부활했죠.”

-그게 기업 경영과 무슨 상관이지요?

“남의 기술을 잘 따라 하면 1등 기업을 맹추격할 수는 있습니다. 1등이 만든 모범 답안을 베끼는 거죠. 그러면 99점까지는 땁니다. 100점은 못 땁니다. 그런데 선도 기술을 확보하면 문제를 출제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100점이니까요. 선도 기업 되기가 어렵지, 되고 나면 경영이 쉬워집니다. 선도 기술 보유자는 추격자보다 항상 유리합니다. 역사가 말해줍니다.”

-초라했던 한국이 기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5·16 이후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과학기술인을 양성합니다. 기업가 정신을 고양합니다. 수출을 장려합니다. 이게 한강의 기적을 만든 동력입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한 스토리보다 더 극적인 성취입니다. 박정희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메이지유신 3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막부 타도 연합을 연출한 사카모토 료마, 이들을 계승한 이토 히로부미와 근대 정신을 완성한 후쿠자와 유키치가 해낸 일을 그가 해냈습니다.”

-박정희를 존경하겠네요.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세 대통령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뿌리를 내린 이승만, 최빈국에 과학기술을 도입해 기적을 만든 박정희, 경제적 약자와 소수의 인권을 보호받게 만든 김대중. 가끔 국립현충원에 가서 인사드립니다.”

메이지유신 유적지를 답사하는 수산그룹 직원들. 메이지유신의 산실 야마구치현(조슈번) 하기, 외세와 격전을 벌였던 시모노세키와 조선 도공이 만든 도자기 마을 사가현 아리타, 교류의 산실 나가사키는 필수다.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가이드 겸 인솔자 정석현 회장이다. /수산그룹

두코바니 원전 수주

지난 7월 한국수력원자력이 체코 두코바니 원전 건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원자로 시공은 두산에너빌리티, 그리고 핵심 시설인 자동제어시스템(MMIS) 설계는 수산ENS가 맡았다.

-어떤 의미인가요?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에서 검증된 안전성이 큰 힘이 됐습니다. 2009년 바라카 원전 수주는 고리 원자력발전소 착공 39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짧은 기간에 기술 자립과 수출을 이룬 나라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국내는 탈원전, 해외는 원전 수출’이라는 옹색하기 짝이 없는 정책을 딛고 거둔 성과입니다. 이 발전소 주기기인 원자로 자동제어시스템(MMIS) 설계 기술이 저희 수산 그룹에 있습니다. 자유 진영에서는 4개 회사만 보유하고 있지요. 이 MMIS 기술을 확보하는 순간 원전 자립 100%가 달성됐습니다. 최종 계약까지 수월하리라고 믿습니다.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에요.”

-결국 메이지유신이 준 교훈이 실현된 거군요.

“개발 착수에서 현장 검증까지 22년 걸렸습니다. 나라에서도 1000억원 넘게 지원하고, 긴 시간을 기다려줬습니다. 20년 넘게 연구소 석박사 인재들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게 메이지유신에서 배운 경영 원리입니다.”

인터뷰가 끝났다. 끝내고 보니 기업인 인터뷰가 아니라 강의를 듣는 자리였다. 보통 강의가 아니라 명강의였다. 그런데 할 말이 남아 있었다.

“한 사람만 더 얘기합시다. 시부사와 에이이치입니다. 일본 1만엔권 지폐 모델입니다. 150년 전에 ‘기업은 독점을 피하고 경쟁을 통해 성장한다’는 확신으로 기업가 정신을 실천한 분입니다. 그가 내건 모토는 ‘논어와 주판’입니다. 어떻게 벌어서(주판) 어떻게 사용할지(논어) 고민해야 한다는 거죠. 이 기업가 정신은 대한민국 기업인들도 꼭 본받아야 할 사상입니다.”

그래서 정석현 회장은 임직원들과 함께 메이지유신 유적지로 3박 4일 답사 연수를 떠난다. 지금까지 14회에 걸쳐 450명이 다녀왔다. 현장 가이드는 본인과 메이지유신 전문가가 함께한다. 700명까지는 꼭 본인이 동행할 예정이다. 처음에는 호응이 적었지만 지금은 독후감 우수작 필자들을 선정해 보낼 정도로 인기다. 학교에서 못 배운 근대사를 바로잡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참가자들은 ‘수산그룹이 왜 선도적 기술 개발을 최우선해야 하는지’, ‘대한민국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후기를 남긴다. 또 마음이 꽂힌 책을 수백 권씩 사서 주위 사람들에게 보낸다. 최근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 자본주의의 설계자’를 주변에 돌리는 중이다.

일본을 칭찬하면 막무가내로 총질하는 시대다. 그런데 정 회장은 메이지유신으로부터 배워서 돈을 벌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도 그는 말한다. “저는 공도 없을뿐더러 그분들, 공을 세운 그 인재들 덕분에 제가 부자가 됐잖아요.” 그 인재는 누가 키웠는가.

체코 원전 핵심기술을 수출하는 수산그룹 정석현 회장. 그는 메이지유신으로부터 경영을 배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