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일반상식

전두환과의 재회(再會)

太兄 2024. 11. 12. 16:48

. 전두환과의 재회(再會)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는 민주주의를 파르헤지아 실천의 조건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어로 ‘Free Speech’로 번역되는 파르헤지아, ‘두려움 없이 진실 말하기를 의미한다. , 자신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처벌이나 후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행위를 뜻한다.

 

우리는 지금 진실을 말하기가 두려운 사회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 그대는 전두환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사회라면, 그 사회는 미래가 없다. 지금 우리는 그런 사회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정의는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지키고자 하는 것이 진실과 올바름이라면 정의는 칭송과 위대함의 화려한 옷을 입는다. 그러나 정의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거짓과 불의(不義)라면, 정의는 역사를 짓밟는 가혹한 폭력이 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정의를 입에 올리는 자들은 두 개일 수 없는 진실을 말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진실은 두 개로 나뉘고 있다. 따라서 진실을 지키고자 하는 용기, 즉 정의도 두 개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모든 사실에 대한 평가나 판단도 두 개로 나뉜다.

 

그 중의 하나가 전직 대통령에 관한 평가다. 예를 들면 전두환을 보자. 누군가는 전두환을 살인마라 평가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전두환을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호황을 이끈 지도자, 혹은 이 시대 민주주의를 이끈 선구자였다는 평가를 내린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평가라 할 것이다.

 

현 대한민국이 극심한 가치혼란에 빠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전두환을 저주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전두환 시대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전두환에 관한 한 무엇이 진실인가에 답을 내려주어야 한다. 이러한 혼란을 정리해야만이, 우리는 우리의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진실을 가려내는 밝은 눈이 필요하고, 그리고 가려낸 진실을 지키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 용기를 우리는 정의라 말할 것이다.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이 더 두려운 사회에서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진실을 알면 속지 않는다. 전두환, 이 이름은 가장 혐오를 받고 있는, 그리하여 가장 안타까운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끈 상징적인 인물일 것이다. 전두환도 대한민국의 국운 상승을 위해, 그리고 그 영광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기에, 그에 대한 진실만큼은 밝혀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문예노동자들과 정치권을 에워싼 진보좌파, 5.18세력들은 전두환을 끝까지 살인마라는 이름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짓밟고 있었다.

 

좌파들로서는 그렇게 짓밟고 능멸해야만이 진보를 상징하는 집단들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일이라 믿었을 것이다. 더욱더 전두환과 박근혜를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이후로도 진보의 장기집권을 위한, 폭력적인 그들의 행위와 존재 가치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될 것이기에, 무려 1981 12대 대통령이 취임 후 무려 40여년이 지나간 지금까지 전두환을 놓아주지 않는지 모른다.

 

이에 필자(筆者)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미래를 위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진실을 풀어내지 않고는 그 무엇도 온전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비교를 하자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끝없이 반대를 일삼던 두 인물을 생각해야 한다. 민주화 투사로 알려진 김영삼과 김대중이다. 이 두 인물들도 모두 대통령이 되었다.

 

이 두 인물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끌었느냐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나라 경제를 망쳐 IMF 시대를 열었고, 또 한 사람은 북핵을 완성 시켜 오늘의 비극을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아직까지 민주화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아직도 광주와 호남은 김대중의 생일날을 성인의 탄신일처럼 기리고 있다. 지나친 행위일 것이며, 조소(嘲笑)를 받을 일이다.

 

만약 전두환 이후 직선제 대통령제에서 노태우 대신 이 두 인물 중 한 명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철강왕 박태준은 김영삼의 인물됨을 이렇게 말한다.

김영삼은 한 시간만 대화를 나눠도 인물의 밑천이 보인다.”

한 마디로 대통령 욕심만 잔뜩 들어있지, 국가경영에 대한 비전과 지혜와 경륜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김대중은 더 일찍 북한 경제의 회생과 북한 핵개발을 위해, 전두환이 이룩한 경제성과물을 북으로 보냈을지 모른다.

 

역사는 오늘에서 평가와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오늘의 상황, 즉 현실의 상황을 파악하여 교훈을 추출한다. 그리고 그 교훈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고 나아간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시대는 우리가 바라는 역사가 아니다. IMF로 각인된 민주화 투사 김영삼, 북한 핵개발로 이어지는 김대중 시대는 깊이 묻어야 할 오류의 역사일 수도 있다. 우리의 미래로 연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민주화는 목표가 아니다. 민주화는 국가와 민족의 영광을 밑받침하는 도구적 이념일 뿐이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어떤 이념을 막론하고 부국강병을 실현하여 역사의 수치를 씻어내는 한편, 고토(古土)를 수복하여 강한 민족 강한 나라가 되어 민족의 영광을 재현하는 일이다. 전두환은 그 길을 걸었던 40년 전의 위인(偉人)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침묵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스티븐슨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잔혹한 거짓말은 침묵 중에 말하여진다.’

그대가 진실에 대하여 입을 닫고 있을 때, 전두환에 관련된 역사는 그릇되게 평가되고, 이로 인해 세상은 민주당 좌빨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잘못 굴러간다는 뜻이다.

 

2024. 11. 12.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