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현대사

이승만박사 주요업적 30가지 1

太兄 2023. 5. 3. 22:46

이승만박사 주요업적 30가지

2018-08-30 23:28:03


이승만 국부

[본문스크랩] 자유민주주의 수호, 국부 이승만박사 주요업적 30가지

1. 최초의 우리나라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

- 1898년에 창간되었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은 당시 발간되고 있던 <협셩회회보>를 개제하여 창간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일간신문이었다. 사장에는 양홍묵, 기재원(記載員:지금의 기자)에 이승만, 최정식, 회계에 유영석 등이 참여하였다.

그 이후에 이승만은 주필과 사장직을 맡아 활약하였고, 독립협회 산하의 만민공동회를 통해 부패·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독립·민권사상을 고취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이러한 개혁운동을 벌이던 끝에 1898년 11월에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종9품)에 임명되었다.


2. 미국 유니버시티 프레스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을 출간(프린스턴대 박사학위 논문)

  

그의 논문은 1912년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서 출판이 되었는데, 이는 높은 학문적 평가를 받은 것을 입증한 것으로 한국인으로는 최초였다. 이로 인해서 이미 미국에서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제정치학자가 되었다. 


3. 미국 하와이에 한국 최초의 남녀공학 학교인 한인기독학원을 설립 

 

- 1914년 7월 이승만이 하와이 호놀룰루에 기숙사를 설립하고 각 지역에서 이곳으로 와서 공부하던 여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한 것이 그 모체가 되었다. 다음해에 대한인국민회의 지원으로 3에이커의 토지를 구입, 교실을 건축하였으며, 기숙사도 새로 마련하였다.

1916년 3월 1일에는 기숙사명칭을 한인여자성경학원(韓人女子聖經學院)으로 개칭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남녀공학제 학교였으며, 이 과정에서 3만달러의 건축비 결손이 나자 이승만은 학생고국방문단을 결성, 조국에 파견하여 이를 충당하였다.


4. 곧 독립할 것이라며 무국적을 선택(중국, 미국 국적을 가졌던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 해외에 있던 당시 대부분의 주요 독립운동가들은 편의상 중국 국적이나 미국 국적을 가졌는데, 이승만은 끝까지 중국 국적도, 친미파였음에도 미국 국적도 갖지 않고 무국적자 망명객 신분으로 살았다. 예컨대 김구는 대표적인 중국 국적 독립운동가였고, 안창호와 서재필의 경우 대표적인 미국 국적 독립운동가였다.

 

때문에 이승만은 미국에서 미국 밖으로 나갈 때마다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야 했고, 그때마다 미국 국적 취득을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권유를 받았지만, 한국이 곧 독립될 것이므로 필요가 없다며 거절하고는 했다.

5.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중경 임시정부에 요청하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독려 

 

 

- 많은 사람들이 단지 임시정부 자체에서 선전포고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3대 독립운동 노선에서 박용만이 무력투쟁론, 안창호가 실력양성론이었다면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의 축에 속했다. 그는 외교적으로 독립을 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데, 예컨대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하자 중경 임시정부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독려한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그는 외교적으로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야 비로소 해방 이후에 우리나라가 자주적인 독립을 할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고, 이를 요청했다. 중경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일본선전포고를 하였다.


6. <일본내막기>라는 책을 통해 한국인으로서 미국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일본의 미국 침공을 이미 3년 전에 예견  

 

- 이승만은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미국에 출간했는데, 이 책은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관심도 받지 못하는 그런 책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누차 강조를 하는 이승만의 책은 그 이후에 미국에서 불티가 나게 팔려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내는 기념을 토했다.

이미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기 이전인 1939년 11월쯤부터 집필에 몰두한 끝에 1941년 여름 뉴욕에서 이승만이 출간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은 그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고 높이 평가를 받는다. 사실, 출간 당시 미국에서는 오히려 혹평이 쏟아졌었던 책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경고대로 미일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서는 연일 그의 선견지명이 이슈가 되면서 그 책은 이승만이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데에 큰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되었다.

7. 외교독립론을 통해 카이로 선언문(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논의)을 기초하는 데 영향을 줌

 

- 외교독립론을 통해 이승만은 미 상원 부속교회 목사인 프리드릭 브라운 해미스 같은 거물급 감리교 지도자들을 통해 한국의 독립의지를 미국정부에 전달하였다. 그 결과 루스벨트 대통령의 최측근인 독실한 감리교도인 해리 홉킨스가 작성한 원고를 영국 대표가 약간 수정함으로써 나온 것으로, 우리나라와 관련된 내용을 기초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카이로 선언문은 덕분에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논의하고, 또 인정한 것으로 일컬어진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의 3개국이 "한국인들의 노예상태를 유념하여 적당한 절차에 따라 독립을 허용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이 반길 때 이승만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의구심을 품었다.

즉, "카이로 선언의 '적당한 절차'라는 문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히 밝혀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정부로부터는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미 국무부에 서한을 보내기도 하고, 또 성명서를 밝히기도 했다. 이승만이 걱정했던 이 논란이 된 문구는 훗날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8. 미국 OSS의 굿펠로우 부장과 협력, 국내진공작전인 김구의 독수리 작전과 소수정예를 공수부대처럼 침투시키는 냅코계획을 성사시킴

- 이승만은 흔히 외교독립론자로 무장투쟁을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일본군과 싸울 한인 전투부대를 창설하려고 노력했다. 무장투쟁이 중경의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을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군 정보조정국(COI)에 대해 재미한인들로 독립적인 특수부대를 창설해서 일본에 대한 전투에 투입시켜 줄 것을 계속 요청했다. 미군과의 연결은 나중에 그 기구의 중국 책임자가 된 에쓴 맥도웰 게일과 알게 되면서 이루어졌다. 에쓴 게일은 이승만이 한국에 있을 때 아주 가까이 지내던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조카였다.

게일을 통해 이승만은 그 기구의 책임자인 도노반과 2인자인 프레스톤 굿펠로우와도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1941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열린 여러 차례의 정보조정국 회의에도 직접 참석해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미국 육군의 전략정보처(OSS)는 ‘독수리계획’이나 ‘냅코(NAPKO)계획’과 같은 특수유격훈련 계획을 마련하고 이 훈련을 마친 한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진공하는 작전을 세웠다.

독수리계획은 중국에 있는 광복군을 한반도에 침투시키는 것이고, 냅코계획은 미국 하와이의 한인을 한반도와 일본에 침투시키는 것이었다. OSS는 이들 계획을 집행하기 위해 광복군 안에 한미합동지휘부를 세웠다. 대체로 1945년 4, 5월께 실천단계에 들어간 이들 계획에는 김우전(현 광복회 회장)과 유일한(유한양행 창업자) 등도 참여했다.

9.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북한의 공산화를 저지 

 


-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1946년 6월 3일에 했던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히 주장한다. 이러한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최근까지도 그가 분단의 원흉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소련의 극동문서고들에서 여러 문서들이 개방됨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의 이러한 안목은 오히려 현실적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예컨대 이미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가지기 이전인 1945년 9월 20일부터 북한에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만들려는 생각을 했으며, 그것은 1945년 10월 초순부터 노골화되어 1946년 초에는 실제로 실질적인 기반을 거의 구축했다. 정확히 따져보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의 덕수궁에서 열렸는데, 이는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회의로 알려졌다.

하지만 훗날 이 미소공동위원회의 목적은 애초에 소련이 한반도 분단의 원흉은 미국과 이승만임을 국민들에게 각인을 시켜 책임을 떠넘김으로써 보다 소련에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회의가 시작될 때부터 이미 소련군 대표 스티코프는 한반도에 적대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었던 것이다.

유럽의 경우를 본다면, 스탈린은 서구열강과 가진 협상에서 동유럽의 정치적 자율권, 즉 민중들의 선택에 따른 결정을 허용한다고 밝혔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소련은 협상을 깨고, 동유럽 국가들에 있었던 민주주의자들을 모두 숙청하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는 이를 통해 소련의 공산주의만을 위한 정부를 수립했다.


10.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초석을 닦았음

 

 

-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초석을 닦았는데, 여러 논의를 거쳐 대한민국의 최초 헌법이 탄생하였다. 이 헌법을 통해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은 군주제가 아닌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국'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으며, 국민들은 대부분의 근대 국가가 보호하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인 자유, 평등, 재산, 교육권 등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적인 토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주요 자원이나 산업에 대한 국유 내지 국, 공영의 원칙을 천명하였다. 또한 경제 사회적 민주주의의 요소도 혼합하여 사유재산제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과 같은 사회주의적 요소도 인정하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한민당이 추대해서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만든 한민당과 반대되는 행보를 보이자 한민당은 야당으로 돌아섰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세력을 결집시켜 여당을 형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당이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수호했음에도 처음에는 (물론, 측근들의 반대로 무마되고 자유당이 되었지만) 노동당을 생각했을 정도로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를 하고자 했었다. 이렇듯, 이승만 대통령의 제1공화국은 우리가 현재에도 누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토대와 기초를 쌓았다고 할 수 있겠다.


11. 의원내각제가 아닌 대통령중심제로 적용시키고 거기에 내각제적 요소를 혼합시킴

 

 

 - 1948년 5월 10일에 5.10 선거를 통해 국회가 구성되었는데,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제헌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 제헌 작업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유진오인데, 그는 한민당의 의견을 반영하여 애초에 헌법의 권력구조를 내각책임제로 만들었다. 원래 다수의석을 차지한 한민당으로서는 내각책임제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각책임제가 된다면 대통령은 허울뿐인 대통령이 될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건국을 하고 또 부국을 하려면 영국과 프랑스와 같이 자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대통령 중심제가 있어야 건국의 틀을 잡는 과정에서 강력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데, 내각책임제로 갈 경우 강력한 정책은 의회에서 흐지부지가 되어 추진이 불가능할 가능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개인의 권한이 위축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러한 이유로 그는 내각책임제에 반대했다. 그는 대통령 중심제를 원했는데, 한민당은 이승만이 없으면 자신들이 권력을 유지하기도 힘들 뿐더러 자신들이 밀어준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뜻대로 했다.

이로 인해 헌법의 권력구조는 대통령제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한민당의 요구를 전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제로 채택을 하되, 내각제적 요소가 다분히 섞인 대통령제 헌법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대통령제는 지금까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12. 장관의 각료내각을 편중되지 않고 통합적으로 구성(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난 초당파적)

  



-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초대 내각을 구성하면서 어느 당에도 편중이 되지 않는, 통합적이고도 거국적인 내각을 조직했다. 예컨대 그는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회주의자로 논란이 있었던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파격적으로 기용했는데, 이러한 면모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내각을 미루어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국무총리로 북한에서 월남한 지역적, 당파적 기반이 없는 이윤영 목사를 추천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윤영 목사는 결과적으로 국회의 인준거부로 국무총리직을 맡지 못했다. 그 다음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을 추천하여 이범석이 국무총리를 맡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을 추대해준 한민당 소속의 장관은 2명밖에 기용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한민당이 돌아서버리고 야당이 됨으로써 최초의 여야 정치제도가 확립되었다. 


13. 소작제도를 철폐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을 확립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자주성을 부여하고 생산력을 증가

 


-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은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에 아주 중요했다. 예전에 우리나라보다 잘 살았던 국가로 인식되는 필리핀의 경우, 토지개혁이 실행되지 못해서 지주층이 사회상류층으로 그대로 존속하게 되어 지금과 같은 가난한 국가가 되었다고 평가를 받는다. 파키스탄 또한 아직 봉건적 잔재가 많아서 제대로 발전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지금과 같이 선진국과 나란히 할 수 있는 국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 기틀을 마련한 것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고 그의 토지개혁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은 농민과 자본주의를 살리는 개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은 농민과 사업가를 구해 신생 대한민국 경제 건설의 토대를 이룬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화를 막으려면 토지개혁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관계 장관들에게 입버릇처럼 채근하곤 했다.

실제로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간발의 차이로 거의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그 덕분에 농민들이 6.25전쟁 도중 북한이 점령한 우리나라 땅에서 토지개혁 선전에 농민들은 현혹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농민들이 대한민국에서 대거 이탈하지 않았고, 또 당시에는 농민의 국가로 알려진 공산주의 국가 북한으로 넘어가지 않고 대한민국을 지킨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시행된 '농지개혁에 대한 임시조치법'은 그야말로 민주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임시조치법은 지주의 삶을 보장하면서도 농민에겐 자신의 토지를, 사업가에게는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해 경제건설 기회를 준 일거삼득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만약, 한민당에 포진한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을 견제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14. 6.25전쟁이 일어난 뒤에 군최고통수권자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보임 
 
  

-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에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이승만 대통령은 전적으로 지원을 받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주고 있는 미국에게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전쟁의 주도권을 행사했다. 또한 그는 유엔군의 원활한 지휘를 위해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위임하였으면서도, 반공포로 석방 등 그때그때의 전황에 따라 전쟁지도를 융통성 있게 실시했다.

그는 친미로만 일관을 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이익을 위해 처신하고 행동했다. 또한 그의 위기시 전쟁지도력이 매우 뛰어나 밴 플리트의 후임으로 미 8군사령관이었던 맥스웰 D. 테일러는 "한국의 이승만 같은 지도자가 베트남에도 있었다면, 베트남은 공산군에게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승만 대통령을 칭찬했다.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당시에 국군통수권자로서의 역할과 소임을 다했다. 예컨대 그는 80세를 바라보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매주 전선시찰을 통해 장병들을 격려하여 사기를 진작시켰다. 실제로 당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는 자신이 재임했던 2년에서 평균 1주일에 1번씩은 꼭 함께 전방과 훈련지역을 빠지지 않고 시찰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폭염이나 혹서 등 계절이나 기후와 관계없이 전선지역을 방문하고 격려했다. 한 번은 낙동강전선의 최대 위기인 영천 전투가 끝날 무렵에 이승만 대통령이 영천의 국군8사단을 격려했는데, 주변에는 적의 박격포가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또 그는 1952년 10월에 중부전선 철원지역에서 백마고지를 두고 중공군과 혈전을 벌이던 국군9사단을 방문하여 격려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9월에 중동부전선의 최대 격전지인 단장의 능선 전투를 앞둔 장병들을 격려하고자 부산에서 강원 양구지역의 펀치볼까지 쌍발기와 연락기를 번갈아 타고 최전선지역을 방문했다. 그는 노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바로 이러한 모습 때문에 그는 국군과 미국 장성들의 절대적인 충성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15. 6.25전쟁 중에 일본이 야욕을 드러내자 독도를 지키는 평화선인 '이승만 라인' 선포

 

- 6.25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경계선을 표시하여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은 불법으로 점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평화선은 해안에서부터 평균 60마일에 달하며, 이 수역에 포함된 광물과 수산자원을 보존하기 위하여 설정한 것이었다.

어업기술이 월등한 일본과의 어업분쟁의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고 공산세력의 연안침투방지는 물론, 세계각국의 영해확장과 주권적 전관화 추세에 대처하기 위한 정책적인 배려에서 선언되었다. 평화선이 선포되자 처음에는 일본어선의 침범조업이 적었으나, 몇 개월 후 다시 급증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해 7월 18일 선포수역에서 조업하는 외국어선은 국적을 불문하고 나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6. 6.25전쟁 중 미군에 의한 일본군과 대만군의 국내주둔 및 지원의사를 완강히 거부

 


- 1951년 1월 4일에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하게 되자, 미군 수뇌부는 유엔군에 일본군을 비롯한 대만군의 편입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알게 되었고, 대노했다. 1951년 1월 12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수뇌부에게 "만일 일본군이 참전한다면 국군의 총부리를 일본군에게 돌려 일본군부터 격퇴한 다음에 공산군과 싸울 것"이라며 완강하게 반대했다.

또한 장개석의 자유중국군의 지원에 대해서도 "한국전선에 일본군을 끌어들일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러한 우려는 과거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에서 나온 것이었다. 과거 조선의 조정이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위해 청나라군을 끌어들였다가, 청나라군의 개입을 명분으로 일본군이 톈진조약에 근거하여 개입하였던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에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인 그 일을 계기로 한반도에서는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일본군이 승리하여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중국군에 의해 밀리는 상황에서도 일본군과 대만군의 개입을 강력하게 반대했고, 결국 미군도 이 계획을 포기했다.

17. 전쟁중임에도 직선제를 통한 민주선거로 제2대 대통령에 취임, 민주정치의 발전을 꾀함 

 

 

- 1950년 6월 25일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압록강까지 밀어붙였고, 그 뒤에 다시 중국군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였다. 그 과정이었던 1952년 8월 5월에 제2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뤄졌다. 그 과정에서 부산정치파동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 민주주의를 훼손했다고 여겨지지만, 6.25전쟁을 하던 도중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파동은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느냐, 간선제로 뽑느냐로 우리나라의 정치사에서 역사적 선례로 작용할 것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대통령 중심제냐, 내각책임제냐의 문제와 같이 말이다. 야당 일각에서는 전쟁통에 총리였던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로 돌아서려는 움직임도 보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미국은 우리나라가 분단의 상황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바로 위에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각제와 맞지 않는다고 봤다. 그러나 야당은 장면 옹립 및 내각제 개헌시도를 했고, 이에 맞서 이승만은 1952년 5월 14일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내놓았다. 국민들의 의사를 물어보자는 취지와 동시에 자신의 정권을 연장하여 전쟁을 효율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유에서였다.

부산정치파동도 터지면서 여러 논란이 되다가, 미국도 이승만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1952년 7월 4일에 국회는 재적의원 185명 중 166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립 표결한 결과 163명이 찬성, 기권이 3명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었다. 이렇게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는 도입되었다. 이렇게 새 헌법에 의거해 8월 5일 시행된 선거에서 이승만은 74.6%인 523만여 표를 획득하여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로써 전시라는 국가가 절체절명하는 총체적인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선거를 통해, 그것도 간선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뽑는 직선제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제2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들이 우리나라의 민주정치가 보다 발전하도록 하는 데에 이바지 했다고 볼 수 있겠다.

18. 반공포로석방으로 외교적 성과를 얻고 자주적인 면모를 과시

  


 
- 반공포로석방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자주적인 면모를 세계에 과시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예컨대 남한의 모든 사람들은 휴전협정을 반대했고, 이승만도 그러했다. 그런데 미국은 휴전협정에서 한국을 배제하고 자신들이 북한과 대신 협정을 체결하려고 했다. 즉, 우리나라의 의사결정권을 깡그리 무시한 처사였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하나의 자주적인 독립국임을 과시함과 동시에 반공포로들을 생각해서 독단적으로 석방을 한다. 이 사건으로 미국 등 자유우방국과 공산권 국가들은 이제까지 공을 들여 온 휴전이 백지화가 될까봐 우려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용덕 장군을 경무대로 불러 그들을 석방하라는 친필명령서를 직접 전달했고, 1953년 6월 18일 0시에 개시되었다.

이에 우리나라 국군은 아군인 미군을 제압한 이후에 27,000명을 석방시키고 그들을 남한의 국민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나라는 이 반공포로석방으로 외교적 성과를 얻고 자주적인 면모를 과시하게 되었다. 또한 휴전협정 체결을 위한 조건부 성과를 미국으로부터 얻어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었다.


19. 휴전협정 체결로 2억 달러 부흥 원조와 한국지상군 20개 사단 증강,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성사


 

- 6.25전쟁 직후 국군은 크게 발전했다. 예컨대 해군은 전쟁 당시에 4개 정대에 33척의 함정으로 보유하고 있었지만, 휴전 무렵 해군은 6개의 전대를 기간으로 한 1개의 함대를 창설했고, 병력도 6,954명에서 12,000명 수준으로 증강됐다. 공군도 1개의 전투비행단과 1개의 훈련비행단 등 2개의 비행단으로 성장했고, 비행기도 F-51전투기 80대를 포함하여 총 110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다.

병력도 1,897명에서 11,000명으로 증원됐다. 이는 전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었던 결과물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얻어 낸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앞서 언급된 반공포로석방을 통해 미국에게 자주적인 권리를 천명했고, 또 자신들이 휴전을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미국은 휴전을 성사하는 조건부로 이러한 각종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준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대표적인 외교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물질적인 것들 뿐만이 아니었다. 휴전협정에 찬성하는 대신에 이승만 대통령은 2억 달러에 달하는 부흥 원조와 한국지상군 20개 사단 증강과 같은 성과를 냈다. 이러한 것들은 한미합의의사록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또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미국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조약을 이승만이 체결하도록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불러내어 확실한 군사적 안전 보장을 받아냈다. 즉, 미군을 서울 북방의 서부전선에 배치하여 일종의 인계철선 역할을 하여 북한군이 다시 남침을 한다면 자동개입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전후에는 미국으로부터 추가로 전후에 7억불의 차관을 얻어냈다.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하여 얻은 우리나라의 군사적 안정 및 경제적 지원이 뒷받침이 되지 않았다면, 그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의 이 업적은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못지 않게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끼치며 우리가 득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