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현대사

이승만박사 업적 2

太兄 2023. 5. 3. 22:42

20. 충주비료공장과 문경시멘트공장, 인천판유리공장 등을 준공하여 중화학공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
 




-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에 충주비료공장과 문경시멘트공장, 인천판유리공장을 준공하였다. 그럼으로써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핵심적인 사업이 된 중화학공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예컨대 당시에 중공업은 북한이 79%, 남한이 21%의 비율로 매우 비대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고, 금속 공업의 경우엔 90% 이상이 북한에서 생산되었다. 남한에서는 오로지 방직공업 생산 부문에서만 북한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나라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1956년부터 수입대체산업 정책이 본격화가 되었다. 이를 통해 국내 산업시설의 육성을 위한 기반, 즉 박정희 정권 때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평가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느 지도자들과 달리,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지원금을 모두 문경시멘트공장, 충주비료공장, 인천유리공장 등의 발전사업 건설에 사용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에 밑거름이 됐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만은 없는 사안이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격차가 현격한 일본과의 국교재개를 초기에 반대함으로써 그후 일본경제에 대해 상대적 자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그 이후인 박정희 정권에는 어느 정도의 구축을 해놓은 상태에서 국교를 재개했기 때문에 일본에게 종속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으로 그가 통치한 1953년에서 1960년 사이에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9%로 비슷한 수준의 후진국들의 평균성장률 4.4%를 조금 상회했다. 또한 제조업 성장률은 12.4%였다. 이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은 원조자금을 착복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국가의 토대를 건설했고, 또 이러한 사회기반설비와 교육으로 만든 인적 인프라는 산업화의 토대가 되었기에 아주 중요한 업적이라 하겠다.

21.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여 지금의 세계적인 원자력 국가의 토대를 닦음

 

- 이승만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시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연구소인 원자력 연구소는 국민소득이 겨우 80불이던 당시 원자력 연구에 적극적 지원을 하여 발전을 시켰는데, 현재 우리나라 원자력은 세계 6위로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1950년대 한국은 전쟁의 여파로 인하여 춥고 배고픈 시절인 만큼 에너지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1948년 5월 14일 북한이 대한민국에 대한 송전을 중단하여 미국이 발전 군함을 부산 항에 정박시켜 전기를 공급했을 때만 해도 한국에는 발전 설비가 없었을 정도였다. 그 이후에 원자력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한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 우수한 인재들을 선발해 원자력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냈고 이들이 귀국할 무렵부터 본격적인 원자력 연구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1958년 원자력법을 제정하였고, 1959년 1월 21일 장관급 부처인 원자력원을 설립했다. 또한 3월 1일 원자력 연구소(지금의 한국원자력연구원)를 세웠다. 같은 해 7월 14일 이 연구소 안에 미국에서 들여올 연구용 원자로 ‘트리카 마크Ⅱ’를 설치하기 위한 기공식을 가졌다.

현재 미국이 103기, 프랑스 59기, 일본 54기, 그리고 러시아 30기, 독일 17기에 이어 우리나라가 4곳에 20기로 그 다음이다(설비용량 기준). 세계 최초 원자력 발전소는 1956년 영국에서 가동됐고, 현재 세계 31개국에서 443기의 원전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이러한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원자력 발전의 역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그 토대를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2. 1953년 인하공과대학을 설립해 문과를 강조하던 전통을 바꾸어 공업을 발전시키고자 설립

 


- 6.25전쟁이 끝난 이후인 1954년에 우리나라의 공업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발의로 인하공과대학이 설립되었다.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원은 하와이 교포 2세 교육을 위하여 1914년 이승만이 설립·운영하였던 한인기독학원을 처분한 대금, 하와이 교포들의 성금, 국내 유지의 성금 및 국고 보조 등의 기금으로 충당하고, 인천시로부터 교지를 기증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존에 우리나라가 강조하던 문과쪽에서 탈피하여, 앞으로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위해 필요한 인재들인 공학도들을 기르고자 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과거 조선에 얽매인 대한민국의 구습타파를 통한 정신혁명과 실용주의를 강조하며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이 사업이 이미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기념사업으로 출범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인하'라는 대학의 명칭도 '인천의 하와이'라는 뜻으로 정했다. 그 결과, 인하대학교는 현재 대학개혁, 교육 인프라 구축, 세계화 등을 높이 평가 받아 2004년과 2006년 <중앙일보>에서 실시한 국내대학평가에서 9위를 기록하였다. 또 2010년 <조선일보>-QS 아시아대학평가에서 83위, QS 세계대학평가에서는 443위를 기록하였다.

미국의 로드아일랜드 대학과 워싱턴 대학, 중국의 난징 대학[南京大学] 대학, 일본의 와세다 대학[早稲田大学] 등 7개국 8개 대학이 ‘글로벌 U8 컨소시엄’을 결성하여 학생교류, 커리큘럼 공동개발, 교수교류 등 활발한 인적 교환 및 학술교류를 진행하고 있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며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적인 공과대학으로 발돋움을 하고 있다. 


23. 전후 의무교육을 실시해 초등학교가 2800개에서 4600개로 10년도 되지 않아 신설되어 136만에서 360만으로 증가했고, 대학도 19개에서 68개, 대학생은 8천명에서 10만명으로, 중학교는 10배, 고등학교는 3.1배, 대학교는 12배로 늘어났다. 또 문맹퇴치운동을 통해 1948년 문맹률 80퍼센트에서 1959년 22.1퍼센트로 줄임

 


- 1950년대에 정부 예산을 살펴보면 그 중 절반가량이 국방비로 지출되었음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교육 예산을 약 20% 정도로 유지하는 과감한 예산 운영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교육을 무엇보다 중요시한 이승만의 강력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예산을 바탕으로 교육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충해나갔다. 

그 자신이 상당한 고학력의 인텔리였기 때문의 교육의 중요성을 알았던 것이다. 그 결과 전후 의무교육을 실시해 초등학교가 2800개에서 4600개로 10년도 되지 않아 신설되어 136만에서 360만으로 증가했고, 1945년 80%가 넘던 13세 이상 문맹률이 1959년에 가서는 15~20%까지 낮아졌으며, 초등학교 취학률은 1946년 53.4%에서 1958년에는 95.2%의 완전 취학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며 초등교육 의무화를 이루어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948~1960년 고등학교와 대학교 진학률이 4배 이상 오르고 대학의 수도 19개에서 68개로 급증하면서, 이승만 정권 말에는 대학진학률이 당시 제 2의 경제대국이었던 영국보다도 높은 수준을 달성하는 등 기적 같은 모습을 연출했고 당시 인구 5천만이던 영국의 대학생 수와 맞먹는 규모의 대학생 수를 자랑했다.

예컨대 대학생은 8천명에서 10만명으로 대폭 늘어났으며, 중학교는 10배, 고등학교는 3.1배, 대학교는 12배로 늘어났다. 현재 일반적으로 국내외, 그리고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대한민국의 교육시스템의 체계와 기초를 다진 인물을 공통적으로 모두 이승만 대통령으로 꼽고 있다.


24.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도 기독교, 불교, 유교를 포용하고 아우르는 정책들을 펼침

 

- 이승만 대통령은 대표적인 기독교 신자로서 매우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적인 차별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통합적인 분위기를 보였는데, 예컨대 그는 불교도들을 내각에 다수 등용하기도 했다. 또한 불교 사찰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관리를 했으며, 사찰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만들고자 관광지 유치를 위한 투자를 했다.

또한 그는 불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통과 관련된 유교에도 관심을 보이며 이를 강조하였는데, 대표적으로 그는 삼강오륜을 강조하면서 국민들이 행실을 올바르게 하기를 원했다. 또한 명심보감을 따로 중국에서 들여와 번역을 시킨 다음에 배포하도록 하는 등 종교를 가리지 않고 국가의 이익과 연관된다면 강조하고 또 추천하여 실용주의적 노선을 걸었다.

불교의 경우 교단 정화로 인해 일제하 식민지 불교의 잔재인 대처승이 배제되고 비구승 중심의 불교 전통이 회복되었다는 점은 이승만 대통령이 만든 긍정적인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념 및 명분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진행 과정과 방법상의 문제로 인한 후유증으로 오늘날까지도 아쉬운 그림자를 길게 남기고 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에 불교의 사찰인 용암사를 방문하고 참배하여 남북통일과 후손 잇기 기원 기념으로 동자상과 7층석탑을 그곳에 세우기도 했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적혀져 있는 석판이 용암사에 아직도 존재한다.


25. 전후 56종의 일간신문과 177종의 월간지를 포함하는 411종의 언론 매체가 활동하며 언론의 자유를 허용

 

 

- 우리나라의 언론의 자유는 제1공화국에서 비롯되었다. 예컨대 미군정이 검열을 없애는 등 언론의 절대적 자유를 선언한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언론의 이념적 토대가 됐다. 미군정의 이념을 이어받은 제1공화국은 좌우익 대립 상황과 권력유지를 위해 원시적 방법으로 언론을 탄압했지만, 법과 제도 등 조직적인 언론정책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에 6.25전쟁 이후 총 56종의 일간신문과 177종의 월간지를 포함하는 411종의 언론 매체가 활동하였는데, 이러한 언론의 자유와 보장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발전하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국가보안법을 구실로 경향신문을 폐간시키기도 하는 등의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폐간된 경향신문이 야당이었던 장면의 며느리가 경향신문 사장인 한창우의 딸이었던 만큼 야당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 반대로, 경향신문은 여당과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즉, 당파적이었고, 편향적이었다. 사상계라는 월간잡지 역시 이승만과 대립하는 야당쪽 흥사단 계열의 잡지였기 때문에 당시의 언론은 극도로 편파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분명 이승만 정권의 언론에 대한 탄압은 과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야당에 대한 편파적인 보도도 역시 과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여러 언론들을 인정하고 또 활동을 하게 놔두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지며, 또 언론과 관련해서 법과 제도 등 조직적인 언론정책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숙지할 필요가 있겠다.


26.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외국인으로서 전례 없는 백만 군중의 환영을 받는 카퍼레이드를 함

 

 

- 6.25전쟁이 끝난 1954년 7월 26일, 아이젠하워와의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은 8월 2일에 뉴욕시가 주최한, 다운타운 브로드웨이 일대에서 하는 티커테이프 퍼레이드에 참석했다. 이 퍼레이드는 일명 '영웅행진'이라고 불리우는 퍼레이드로 역사적으로 인류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을 위해 베풀어지는 영광의 카퍼레이드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맥아더 원수, 드골의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해 달착륙 우주인들이 이 퍼레이드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한인 최초의 뉴욕시 영웅행진의 영광을 누린 사람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그 뒤에 2번째로 한국인으로서 영웅행진을 할 수 있었던 인물은 1965년 5월 19일의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1954년 8월 3일자 뉴욕타임즈는 이 행사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뉴욕시는 어제 이승만 한국 대통령에게 영예와 찬사를 보냈다. 오찬과 명예박사학위를 기념하는 티커테이프 행진 축제 분위기가 79세의 한국 지도자이며,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국가간의 필연적인 충돌을 경고하는 그에게 베풀어진 것이다." 약 15만명의 뉴욕시민들은 한국의 지도자 이승만에게 마천루로부터 종이가루와 테이프를 뿌렸다.

27. 건국과 부흥의 과정에서도 식목일을 공식적으로 지정하는 등 산림녹화와 사방사업을 통해 친환경적인 정책을 펼침


 


- 1957년~1960년 사이의 국무회의록을 보면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산림녹화 구체방안이 제시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의사를 밝힌 마지막 국무회의 안건에도 산림녹화와 사방사업이 올라 있었다. 1957년 국무회의에서 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산을 개간하겠다는 농림부 장관의 제안에 이 대통령이 질책을 했다.

큰 목소리로 농림장관을 꾸중하던 대통령은 "함부로 산을 훼손하면 안 된다. 산에 나무를 열심히 심고 강을 잘 정비해 우리 강산이 푸르러지면 후손들이 잘살게 될 것"이라며 대안으로 수확량이 많은 인디안 쌀 연구와 석탄 생산에 군 공병대 지원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현재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식목일을 공휴일로 처음 지정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1949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을 제정하면서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강산개조론을 주창했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산림녹화의 초석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의 기틀이 잡히지도 않은 1950년 전에도, 피 흘리며 싸우던 한국전쟁기간 중에도 "나무를 심자"고 역설했다. 1949년 4월 식목일쯤에는 "애국애족 정신으로 나무를 애호하자"고 부르짖었다. "사람마다 적어도 여섯주씩 심고 하나도 베지 말기를 작정하며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나무를 보호하고 살리는 것을 직책으로 알어야 할 것입니다"라면서 말이다.

같은 시기 북한은 농지확충 명목으로 울창한 산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50년이 지나 전 국토가 황폐화된 북한은 가뭄과 홍수로 식량을 구걸하는 거지국가로 전락했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와 환경운동가들은 일제 침략기 자연 파괴와 6·25 후 사회 혼란을 극복하고 산림을 푸르게 가꾼 한국의 성공을 개발도상국의 교본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산림 황폐화로 사막화가 우려되는 불량국가로 낙인 찍혀 반면교재로 이용되고 있다.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 회의에서도 북한의 심각한 토지 황폐화와 가뭄, 몽골 중국의 사막화 대책이 거론됐다. FAO 통계에 따르면 산악국가인 북한의 산림이 매년 줄어들어 2010년 현재 국토면적의 47%뿐이다. 분단 후 북한 산림이 대폭 감소했다. 매년 서울 면적의 약 2배에 해당하는 산림이 훼손되어 국토의 5분의 1이 되는 거대한 산림이 최근 20년 만에 사라진 것이다.

산에 나무가 없어진 후 북한은 1980년부터 2010년까지 19회 대홍수를 비롯한 지진, 전염병, 태풍 등의 큰 자연재해가 매년 있었다. 식량 증산 욕심으로 산을 농지로 개간한 후 생긴 인재다. 김일성은 6·25전쟁을 일으켜 많은 인명을 살상한 데 이어 아름다운 산과 강도 파괴한 것이다.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친환경적인 사업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바톤을 이어받는다.

28. 장면 내각과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토대가 된 이승만의 경제개발 3개년 계획

 

 

- 1957년을 전후하여 미국의 대외정책은 군사우선에서 경제중시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소련과 중국, 북한이 급속한 산업화에 성공함에 따라 그들이 제3세계 국가들에게 하나의 대안모델로서 부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미국은 경제적으로 우방국들에 대한 지원을 하고자 했고, 우리나라도 해당되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정세를 이승만 대통령은 꿰뚫고 재정안정계획과 장기경제개발계획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정부가 가급적 많은 부분을 국방비에 쓰기를 강력하게 권했으며, 그 결과 1954년부터 1960년 사이에 우리나라는 지출액의 34.8%를 국방비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20%정도를 교육에 투자했던 것이다.

미국은 우리나라가 독립적으로 발전을 꾀하기보다 일본과 공조를 하면서 일본으로부터 많은 물자를 수입해서 쓰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과 교류를 하길 꺼려했고, 최우선과제를 경제안정이 아니라 경제재건과 부흥으로 삼았다. 원조재원을 사회기반설비와 생산재 산업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조속한 시일 내에 한국 경제를 재건하고 자립시키자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개발계획은 1953년 3월 전쟁 중에 발표된 UNKRA(국제연합한국부흥단)의 네이산 보고서(한국경제재건 5개년 계획)가 그 시작이다. 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 이승만 정부 관료들의 이의가 많았고, 또한 단지 지침서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장 시행되거나 하지는 못했다.

본격적으로 경제개발계획 안이 제기된 것은 1958년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면서부터다. 이곳엔 EDI(세계은행 산하의 경제개발연구원)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우수 인재들과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신진기예들을 대거 기용했는데, 이중에선 현재 많은 나이에도 불구 효성그룹의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는 송인상 씨가 유명하다.

송인상 씨는 EDI 연수를 다녀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흥부장관 자리에 기용되는데, 그는 그러면서 후진 개발도상국에서는 정부 주도하의 강력한 경제개발계획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 마샬 플랜 입안자로 유명했던 미 국무부 차관인 크리스천 히터를 방문 설득하면서 미국 원조자금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할 것을 약속받아냈다.

미국과의 많은 우여곡절 끝에 1958년에 드디어 산업개발위원회를 설립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계획경제개발의 시동을 걸게 된다. 다만, 초기에 큰 문제가 있었는데, 산업계획 모델을 작성하기 위해선 수많은 통계자료와 지식이 필요한데 당시에는 이런 자료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많은 조사를 필요로 했는데, 이 때문에 이승만 정부는 산업개발위원회 위원들에게 월급을 장관보다 4배를 더 주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해가며 각고의 노력을 기했으며, 이러한 조사는 1960년 초에 가서야 끝나게 된다. 수많은 노력이 있는 끝에 1960년 4월 15일에 드디어 처음으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이 발표되고 의회를 통과하면서 경제개발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는데, 4일 뒤 바로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이승만 정권의 계획개발은 백지화되었는데, 다만 다행인 것은 당시 부흥부 관리들이 이후 정권에서도 이를 계속 추진해나갔다는 것이다. 참고로 3.15 부정선거 건으로 투옥한 송인상 씨는 1963년에 석방되어 한국경제개발협회장이란 요직을 맡게 된다. 경제개발계획은 이승만 정권 때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이 작성되어, 장면 정권에 의해 5개년 계획으로 수정되었다가, 군사 정권 이후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발전 계승되어 나간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의 업적은 이승만 정권이 여러 분야에서 기반을 잘 다져놓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수입대체공업화가 후일 박정희 정권의 수출주도 경제의 토대가 된 것은 분명하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불과 2개월 만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이승만 정부가 1년 8개월에 걸쳐 완성한 경제 개발 3개년 계획을 급히 수정한 것에 불과하였다. 6·25전쟁의 재난 속에서 국가 존립과 경제 부흥의 토대를 마련한 이승만의 공적은 마땅히 평가 받아야 한다.

즉, 해방 후 최초의 종합적인 장기 개발계획이라고 할 이 경제개발 3개년계획은 비록 당초 예정대로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으나, 곧 이어 등장하는 민주당정권에 의하여 일부 내용이 수정되어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또 1961년 5월 5.16쿠데타 후 군부정권에 의하여 다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수정되어 비로소 실천에 옮겨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경제개발 3개년계획은 한국의 경제성장사에 있어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9. 매년 평균 600명 이상을 1인당 6천 달러를 들여 인재들에게 국비유학을 보내서 기회를 주었고, 또1953년~1960년 기간에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으로 나간 유학생이 4,884명, 1953~1961년 기간에 해외로 떠난 단기연수 기술훈련생은 2,309명, 미국을 다녀온 군 장교와 하사관은 1만 명으로 이들 모두 나중에는 공업화와 근대화의 기수가 되어 기여

 

 

- 이승만은 AID의 기술원조계획을 이용하여 국내 대학과 해외 많은 대학을 연결하였는데, 특히 700만 달러를 들여 서울대와 미네소타대학 간에 협정을 맺게 하여 우리 학생이 외국에서 많은 것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우리나라 해외 박사 중 미네소타대학 출신이 가장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계를 이끄는 중심축이 되었다.

이 밖에도 연세대, 고려대를 워싱턴대학과 협정을 체결하였고, 기술원조자금을 이용하여 수많은 대학교 시설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교육뿐만이 아니라, 각 기업과 산업체의 많은 기술자를 해외로 장기간 연수를 보내면서 외국의 발달한 기술력을 빨리 배워오도록 장려하였으며, 결국 이들이 고국에 돌아와 한국 산업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일례로, 당시 미국이 10만 kW급의 최신식 화력발전소를 한국과 파키스탄에 동시에 지어줬는데, 한국은 당안리 발전소 완공 이후 곧장 180명 기술력 있는 엔지니어를 투입하여 발전소를 운영한 반면에, 파키스탄은 훈련된 인력이 부족해 운영 인원을 1500명 가량 두었다고 한다.

이렇듯, 만약 이와 같은 이승만의 인재 육성 정책과 교육 정책이 없었다면, 이후에 대학 인력 부족 문제로 산업 근대화 과정에 큰 차질을 빚었을 것이다. 만약 이승만 시절에 교육 토대가 완성되지 못했다면 박정희 시절 그 찬란한 경제 성장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인재들을 양성하고 배출하는 데에 힘을 썼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그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30. 이승만이 스스로 하야해서 대통령직을 사임  

 


 
- 1960년 4월 19일에, 그 전날에 있었던 4.18 고려대생 데모사건을 계기로 4.19혁명이 일어났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그 사건을 통해 이승만 정권은 끝이 났다. 그런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군권과 경찰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탄압을 하지 않고 하야를 선택했다.

최근에 있었던 리비아 사태나 시리아 사태, 전두환의 5.18사태와 같이 충분히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던가 측근들을 위해서 강력한 탄압을 충분히 가할 수도 있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시의 국방장관이었던 김정렬은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결코 당시에 하야 성명이 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사실, 이후에 나온 문건들을 통해 드러난 것이었지만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4.19혁명이나 4.18 고려대생 데모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인 1960년 4월 12일에 이 사태, 즉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로 일어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책으로 자신이 하야하는 것을 언급하기도 했고, 실제로 측근들에게 숙고해보라고 하기도 했다.

김정렬 국방장관은 또 4.19혁명이 벌어진 당시에 이승만 대통령이 "불의를 보고도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회고했다. 최근에도 논란이 많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정권 말기에 부인인 프란체스카와 여러 자유당의 핵심인사들에 의해 정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인의 장막에 갇혔었다는 주장이 문건들을 통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무튼 이와 같은 면들을 면밀히 분석해서 봤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에 시위를 막기 위한 차원에서 군인들과 탱크까지 실제로 현장에 투입된 상황에서 끝까지 버티지 않고, 하야를 통해 평화적으로 대통령직이라는 절대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업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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