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위대장ㅡ이 장렴
조선 말기의 왕족인 '이하응'은, 조선왕조 제26대 '고종'의 아버지입니다.
'이하응'의 아들 '명복'이 12세에 임금에 오르게 되자, '이하응'은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고종'을 대신해 섭정(攝政)을 하였습니다.
그런 '이하응'이 젊었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몰락한 왕족으로 기생집이나 드나들던 어느 날, 술집에서 추태를 부리다가 금군별장(종 2품 무관)'이장렴'이 말렸는데,
화가 난 '이하응'이 소리쳤습니다.
"그래도 내가 왕족이거늘 감히 일개 군관이 무례하구나!“
그러자 '이장렴'은 '이하응'의 뺨을 후려치면서 큰 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한 나라의 왕실 종친이면 체통을 지켜야지.
이렇게 추태를 부리고 외상술이나 마시며, 왕실을 더럽혀서야 되겠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뺨을 때린 것이니 그리 아시오.“
세월이 흘러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이 되어, '이장렴'을 운현궁으로 불렀습니다.
'이장렴'은 부름을 받자 죽음을 각오하고, 가족에게 유언까지 했습니다.
'이장렴'이 방에 들어서자 '흥선대원군'은 눈을 부릅뜨면서 물었습니다.
"자네는 이 자리에서도 내 뺨을 때릴 수 있겠는가?“
"대감께서 지금도 그때와 같은 못된 술버릇을 갖고 있다면, 이 손을 억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장렴'의 말에 '흥선대원군'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조만간 그 술집에 다시 가려고 했는데, 자네 때문에 안 되겠군. 하지만, 내가 오늘 좋은 인재를 얻은 것 같네.“
'흥선대원군'은 '이장렴'을 극진히 대접하고, 그가 돌아갈 때는 문밖까지 나와 배웅하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위대장 나가시니 앞을 물리고, 중문으로 모시도록 하여라."
이장렴은 다음날 금위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옛말에 " 효자는 부모에게 아첨을 하지 않으며,
충신은 임금에게 아첨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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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S. 트루먼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1884~1972)은 미국 제33, 34대 대통령으로 20세기의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오지 않은 고졸 출신이다.
어릴 때 '트루먼'은 육군 사관학교에 가고 싶어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그 꿈을 펼치지 못했다고 한다. 학벌도 없고 집안 배경도 대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젊었을 때 그가 가졌던 직업 역시 변변찮았다. 기차역에서 검표원을 하기도 하고, 조그마한 상점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그나마 잘되지 않아서 문을 닫아야했다.
이러한 평범한 사람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신기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트루먼'은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위해 예비해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지극히 평범했지만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용기였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혔을 때 약한 자의 편을 드는 정의로운 용기가 '트루먼'에게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자원해서 입대했다. 원래 '트루먼'은 지독한 근시때문에 군 복무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합중국 육군 신체검사에서 시각검사 판을 통째로 외워서 통과한 후 포병 장교가 되어 열심히 싸웠으며 대위까지 승진하였다.
용감하고 서민적이고 그리고 아주 평범하고 평범한 사람이 바로 '트루먼'대통령이다. 1944년의 정·부통령선거에서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1945년 4월, '얄타' 회담 직후 '루스벨트'가 뇌일혈로 별세하자 이어서 대통령이 되었다.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하고 처리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보고를 받고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했다. 생각해보면 '트루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마지막 사건을 장식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48년 재선에서 '트루먼'의 재선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대통령 선거 날 자신의 패배를 예상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아침에 일어나자 박빙의 차이로 당선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트루먼'이 대통령으로 재임할 당시 한국전쟁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있던 사람이 '맥아더' 장군이었다. '트루먼'은 육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는데도 못 갔지만 '맥아더'는 육사 출신일 뿐만 아니라 수석 졸업생이기도 했다. 이 천재 장군이 얼마나 교만하게 굴었는지 '트루먼' 대통령이 꽤 고생했다고 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과의 대립관계 속에서도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인내하지만 결국 인천 상륙작전 이후 확전(擴戰) 하려는 '맥아더'를 해임하기도 했다.
또 '트루먼'과 한국전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있다. 당시 남한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다. 이승만은 조선의 왕족 출신으로 하버드 대학을 나와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인재다. 굉장히 곧고 또 오만한 성격이다. 다 망해가는 나라를 미국이 구해줬음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절대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백악관에서 회담하다가도 '트루먼' 대통령을 향해서 “이런 고약한 사람이 있느냐?”면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수모를 받아 가면서도 한국을 도와준 사람이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트루먼'은 두 번에 걸쳐 결정적으로 한국을 도와주었다.
첫째는 한국전쟁에 파병한 것이다. 미국 시각으로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밤 아홉 시에 잠자리에 들려던 '트루먼'에게 북한군이 남침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이런 보고를 받을 때 정치적인 계산을 할 것이다. 이 전쟁이 본인의 나라에 어떤 영향을 줄 지에 대해 자동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트루먼'은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단 10초 만에 한국 전쟁에 미군 참전을 결정했다. 계산할 줄 모르는 농부처럼 '트루먼'의 생각은 오직 한가지였다. 나쁜 놈들이 쳐들어 왔으니 물리쳐야 한다는 단순논리였다. 바로 그 용기있는 결정이 한국을 살렸다. 그 순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시골 출신의 '트루먼'을 대통령으로 세우셨던 것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트루먼'은 한국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1950년 10월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졌을 때 영국 '에틀리' 수상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에 배치된 병력을 유럽으로 철수시키자고 제안했다. 영국의 제안에 미국의 주요한 인물들은 찬성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 대사를 지낸 '조셉 케네디'다. 그는 공개적으로 한국 포기론을 주장했다. 명문가 출신에 정치 감각이 뛰어난 자들은 한국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골 출신으로 의리를 중요시하는 '트루먼'은 단호하게 반대하고 한국을 도왔다.
“우리는 한국에 머물 것이고 싸울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도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도와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떻게든 싸울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을 버린다면 한국인들은 모두 살해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편에서 용감히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친구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는 연합군의 철수를 거절하고 의리있게 행동했다. '트루먼'은 한국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1차, 2차 대전 때에도 하지 않았던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리고 그는 물가와 임금을 통제하고 그 예산을 가지고 한국에 쏟아 부었다. 국방 예산을 올리고 중국군과 단호히 맞서 싸웠다.
결국 엄청난 돈이 투입되고 5만 명이 넘는 미군이 목숨을 잃고 10만 명 이상이 다친 후에야 전쟁이 멈췄다. 우리나라 역사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미국의 도움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었고 우리가 이렇게 성장할 수가 있었음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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