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일반상식

거목 비난하며 먹고사는 잡목들

太兄 2023. 11. 26. 16:24

[지만원메시지(197)] 현대사의 주역은 전두환. 김일성을 13회 KO시킨 대영웅.

거목 비난하며 먹고사는 잡목들

며칠 전 12.12를 영화로 제작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스쳐가는 몇 개의 컷을 보니 전두환을 악마로 희화화한 영화 정도로 인식됐다. 이제까지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남빨들은 문재인, 노무현, 이재명을 위시하여 전두환 이름을 땅에 새겨놓고 쿵쿵 발로 짓밟기도 했고, 전두환 조형물을 만들어놓고 입을 찢고, 눈을 후벼파고, 머리를 조각내고 발길질 연습을 했다. 이제는 5.18과 전두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돼가자 12.12를 새로운 소재로 지정하고 또 다시 증오심을 분출하려는 모양이다.

한 공간에는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해서부터 대통령이 끝날때까지의 객관적 족적을 기록해 놓고, 다른 한 공간에는 그를 증오하면서 스스로를 인격파탄자로 타락한 인간들 하나 하나에 대한 족적을 기록해보자. 배움으로 보나 인격적으로 보나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바퀴벌레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당신이 전두환보다 무엇이 잘났는지 열거해보라”

영화 12.12는 보지 않아도 ‘화려한 휴가’처럼 황당한 수준으로 왜곡돼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10.26, 12.12, 5.18과 전두환을 수사기록 18만쪽을 가지고 21년 동안 연구한 사람은 오로지 필자 한 사람 뿐이다. 따라서 수사기록으로 쓰지 않은 작품들은 부정확할 수 밖에 없다. 필자는 이제까지 나온 보도들이나 작품 중 왜곡되지 않은 작품을 단 한 개도 만나보지 못했다. 역사사건만 왜곡된 것이 아니라 역사 인물인 전두환도 황당한 수준으로 왜곡됐다. 수사기록에 나타난 전두환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학습으로 내공을 쌓은 출중한 인물이고, 이타심과 공인의 자세와 호연지기와 의협심이 충만한 세계적 수준의 거목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은 이 나라 국민수준에는 너무나 과분한 거목들이었다. A학점을 맞은 사람은 많은 노력을 한다. 하지만 C학점을 맞은 사람은 A학점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A학점을 받은 사람을 헐뜯는다. 열등생일수록 우등생보다 더 잘난체를 한다. 바로 이 C학점을 받은 사람이 김일성이고, 김일성을 교주로 모시는 전라도 중심의 남빨들이다.

김일성, 전두환과의 13라운드 결전에서 13회 모두 KO패 당해

제1라운드: 10.26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김일성의 평생소원인 ‘박정희 제거의 꿈’을 실현시켜 주었다. 권력이 일거에 사라진 전국이 무정부상태로 치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데, 바로 그날 밤 전두환이라는 2성 장군이 혜성과 같이 등장해 김재규를 전격 구속했다. 전두환이 갑자기 김일성의 주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제2라운드: 12.12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현장에 함께 있었던 정승화는 10.26. 밤의 4시간 동안 김재규의 뜻에 따라 김재규와 자신의 범행을 숨기고 비상국무회의에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이후 12.12까지 47일 동안 자신에 대한 전두환의 수사를 방해하고, 정치현장에 간섭하고, 김재규를 살려내려고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정국이 불안해지고 있을 때 전두환이 정승화를 살인방조 혐의로 구속시켰다. 4성장군에 계엄사령관이라는 직책과 사법처리 수장인 2성장군 사이의 충돌이었다. 군의 여론은 전두환 편이었다. 12.12는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살신성인의 본보기였다. 여기까지의 결단에 의해 어지러운 질서가 점차 회복되면서 사회와 군 내의 여론은 전두환을 연호했다. 이로써 1980.9.1. 전두환은 주위에 포진한 선후배들과 여론에 의해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열광적인 추대를 받아 대통령이 된 사람은 이제까지 전두환이 유일했다.

제3라운드: 5.17
1980.4.3.부터 5.17까지 45일동안은 김대중의 정국이었다. 학생시위로 정국을 마비시켰고, 5월 15일에는 서울역 10만 학생시위가 국가전복을 위협했다. 이에 기세를 업은 김대중은 최규하 정부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5.19까지 내각을 해산하고, 계엄을 철폐하지 않으면 5월 22일을 기해 전국폭동을 일으켜 국가를 뒤엎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주영복 국방장관은 5월 17일 전국 지휘관 회의를 열어 계엄령을 확대강화할 것을 최규하 대통령에 건의했다. 이에 전두환은 그동안 조사했던 김대중의 혁명내각 요원 24명을 전격 체포하여 김대중 내란음모를 일망타진했다. 김대중의 국가전복 계획이 무산되자 그동안 김대중이 선언한 전국 폭동을 주도하기 위해 광주에 끌어모았던 600명의 북 특수군을 풀어 5.18 게릴라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5월 16일의 김대중 선전포고는 이미 북괴의 5.18작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5.18을 진압한 군사작전은 순전히 계엄사령관을 정점으로 한 작전지휘관들에 의해 수행됐고, 이 작전은 많은 허점이 있었지만, 미국이 극찬을 했을만큼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최대한으로 보호한 성공한 작전이었다. 전두환은 5.18에 전혀 간섭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전두환이 5.18을 진압시켰다는 주장은 군을 전혀 알지 못하는 선동꾼들의 요설이다.

제4라운드: 김대중은 5.18 배후 조종자로 무기징역형에 처해
1980.5.17. 김대중이 혁명내각 명단을 작성하여 전국학생시위를 주도한 사실을 밝혀냈다. 김대중이 광주에서 발생한 시위를 위해 공작금을 보냈고, 신부, 카톨릭농민회, 복학생들을 동원해 폭동을 배후조종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기소했다.

제5라운드: 김대중이 1972년 일본에서 반국가단체 한민통을 구성한 사실을 밝혀내 사형선고
김대중은 박정희 유신시대인 1972년 미국과 일본을 다니면서 한국에 군사원조를 차단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어서 미국과 일본에서 북괴의 베트콩과 곽동의 등과 함께 반국가 단체인 ‘한민통’을 구성했다. 전두환은 이 사실을 밝혀 사형선고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김대중을 남조선 꼭두각시 대통령으로 세우려 했던 김일성의 꿈이 사라졌다. 눈이 뒤집힌 김일성은 이후 전두환 암살에 올인했다.

제6라운드: 1981.7. 필리핀 암살계획

필리핀에서 마르코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과정에서 전두환을 살해하려 했던 캐나다거주 간첩 최홍희 부자가 캐나다 경찰에 의해 극적으로 체포되었다.

제7라운드: 1982.8. 아프리카 가봉 암살계획
아프리카 가봉을 방문중인 전두환을 암살하려고 암살범 일당이 접근하다 교통사고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제8라운드: 1983.10. 아웅산 테러
대규모 각료집단만 살해하는데 그쳤고, 전 대통령은 무사했다.

제9라운드: 1984.8. 김일성의 ‘폭우피해 지원제안’ 전격 수락
경기도 지역이 물피해를 많이 보자 김일성은 의례 거절하겠거니 하고 호기있게 쌀 5만톤, 시멘트 10만톤, 의약품, 옷감 등을 보내겠다고 제의하자, 이에 전두환이 의표를 찔러 “고맙다. 받겠다” 수락을 했다. 보내온 쌀은 거의 다 썩었고, 다른 물자들은 거의 쓸모가 없었지만, 북한의 출혈은 대단했다. 김일성의 약이 극도로 올랐다.

제10라운드: 1986.4. 김일성이 시도한 서울 수공용 금강산댐 건축 무력화
1986년 아시안게임을 서울에서 성공적으로 치러 한국의 브랜드 가치가 상승하자 김일성은 1988년에 열릴 올림픽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소양강댐 저수량(29억톤)의 6~7배나 되는 저수량 200억톤 규모의 금강산댐을 건설했다. 전두환은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평화의 댐을 건설하여, 의표를 찔렀다. 김일성이 또 KO패를 당한 것이다.

제11라운드: 1987.11. KAL858기 폭파 행위가 김일성 소행임을 밝혀내 북괴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케 해
1987.11. 김현희를 도구로 KAL858기를 공중폭파시켜 한국에 선수를 보내면 위험하다는 국제여론을 일으키려 했지만 전두환의 진두추적과 숨막히는 외교전으로 실패했다. 북한은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제12라운드: 1988.9. 국제올림픽 역사상 최대규모, 최대 참전국의 참여로 한국 브랜드가치 급상승

참가국 160개국, 선수규모 13,304명. 국제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