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기 야산 신작로 굽어도는 길 -
마을에서는 일제시대 새로 난 길이라해서 신작로(新作路)라 불렀다. 해리에서 공음, 대산을 거쳐 노령산맥을 넘고, 사창, 장성을 거쳐 광주로 가는 길이었다.
서울이 어디인지 몰라, 저 산맥을 넘으면 있는 줄 알았다. 서울은 앞산 고산(高山)으로 가려진 다른 세상이었고, 가고픈 그곳은 서울이었다. 무지개가 뜨는 곳인 줄 알았다.
밭에서 돌아오는 곳에 멀미등이 있다. 원래 발음은 '맏미등'이었겠지만, 오랜 세월 지나다보니 활음(滑音)이 되어 멀미등이 된 곳이다. '맏'은 우두머리를 뜻한다. 그래서 큰아들은 '맏이'라 부르는 것이고, 그 맏이가 묻힌 곳이 맏미등, 곧 멀미등이 된다. 전국적으로 이런 의미를 지닌 멀미등이란 지명(地名)이 많은 것으로 안다.
이곳이 동네쓰레기장으로 된 것을, 내가 군(郡)에 연락하고, 좋은 군수를 만나서, 드디어 고분으로 등록되었다. 그동안 동네 누군가 도굴을 시도했지만, 아무리 파도 돌만 나오더라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적석식 돌무덤으로 판단된다.
마을 앞으로 넓은 평야가 있고, 그 너머로 상금마을이 나온다. 고인돌로 유명한 곳이다. 그곳은 고인돌 사이사이에 집이 있다는 곳이다. 마을이 고인돌 그 자체다.
그러나 우리 마을은 지나가는 똥개가 있어도 던질 돌 하나 없는 곳이다. 하루종일 걸어도 황토땅이다. 이런 황토땅에, 그 시절 적석식 돌무덤은 그 많은 돌을 가져올 만한 권력자 아니면 생각할 수 없다. 들이 넓어서 천석군, 만석군이 흔하게 살았다는 곳이 아닌가.
멀미등은 강력한 권력을 지닌, 그 시대 맏이=수장(首長)이 묻힌 곳이다. 제사도 최소한 고인돌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대보름이면 마을의 안녕을 빌며, 용을 만들고 풍악을 울리며 마을을 돌던 추억이 새롭다.
멀미등에 앉아 바라보면, 신작로 돌아가는 곳에 풀포가 보인다. 왼쪽엔 낮은 야산이다. 풀포란, 풀을 쌓아놓은 포구라는 뜻인데, 일제시대 거름용 퇴비를 위해 풀을 쌓아놓은 곳으로 알고 있다. 오래 전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하긴 지금도 비가 많이 오면, 학꽁치며.숭어새끼 모치, '껄떡'이라고 부르는 농어새끼도 잡힌다.
풀포를 지나면, 길이 돌아서 숨는다. 어린시절 그곳부터는 가보지 못한 세계였다. 길은 심평 광대 마을을 지나 덕천으로, 그리고 대산으로 간다. 그 대산에 5일마다 5일장이 선다.
장날이면, 마을사람들은 길을 나선다. 누군가는 제사를 지내야 하고, 누군가는 생일상을 차리기 위해, 누군가는 강아지를, 누군가는 고추랑 농산물을 팔기 위해, 장을 보러 나선다.
어머니도 가끔은 장을 보러 가셨다. 동네아주머니들이랑 아침나절에 장을 보러 떠나셨다. 그런 날이면, 우리는 하루종일 어머니를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따라 나설 수 없는 어린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다림뿐이었다.
오늘도 밭에서 돌아오는 길. 멀미등에서 풀포를 바라보았다. 아늑한 늦가을 햇살 아래, 길은 옛날처럼 따스하게 펼쳐져 있다. 그 옛날 어머니가 장봇짐을 이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하루종일 그토록 어머니를 기다리다 못 참고, 우리는 조금씩 길을 걸어갔다. 작은 발, 달리고 걸어봐야 겨우 넘어지지나 않던 조그만 아이들이 모여서, 어머니 오는 길을 찾아 대산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풀포 언저리에서 장봇짐 이고 돌아오는 동네사람들을 보았고, 그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어머니를 만났다.
"엄니 !!!“
지금도 그때 맡았던 어머니 치마폭 향기를 잊지 못한다. 달려가 안겼을 때 얼굴에 닿은, 바람결에 차거워진 어머니의 치마폭, 그리고 '내새끼 왔냐'고 하는 어머니 목소리.
넓고넓은 사랑, 치마폭에 안긴 나만의 세상에서 어머니는 지금도 그렇게 계신다. 풀포, 그리고 장봇짐을 이고 있는 어머니.
어머니, 자식을 내려다 보는그 환한 웃음. 눈깔사탕 하나 받아서 입에 물고, 어머니 손 잡고 돌아오던 어느 늦은 가을날 오후를 생각한다.
오늘 11월 21일, 멀미등에 앉아서 풀포를 바라본다. 내일이 어머니 돌아가신 날이다. 합동제사를 지내지만, 어머니는 혹시 오늘 들르실지 모른다.
메를 지어 올려야 한다. 흐르는 눈물을 닦고 일어선다. 발끝에 또 눈물이 떨어진다. 어머니, 어머니!
2023. 11. 21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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