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경제

“세계는 목숨걸고 경쟁하는데...국내 과학계는 공평만 외쳐”

太兄 2023. 4. 3. 11:22

“세계는 목숨걸고 경쟁하는데...국내 과학계는 공평만 외쳐”

[유지한이 만난 사람]500만 과학기술인들의 수장, 이태식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신임 회장

입력 2023.04.03. 03:00업데이트 2023.04.03.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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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식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은 “과학기술계 리더들이 미래 목표를 준비해야 한다”라며 “오는 7월 국내외 과학자 3000명이 모이는 세계 한인 과학기술자 대회에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굴할 것”이라고 했다. /장련성 기자

우리나라의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은 올해 처음으로 30조원을 넘겼다. 산업계를 합한 국가 총 R&D 비용은 102조원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비중이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은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도자)가 아닌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추격자)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은 아직 단 한 차례도 챗GPT 같은 새로운 기술로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없다. 알파고 때도 챗GPT 때도 ‘한국형 알파고’ ‘한국형 챗GPT’ 같은 뒤늦은 대응책이나 쏟아내는 상황이다.

국내 최대 과학기술 단체인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이태식 회장은 지난 1일 “한국 과학기술계의 체질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고 했다. 그는 “돈을 30조원이나 쓰는데 연구 기획부터 평가까지 전문가 아닌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다”면서 “(지난 정부에서 도입했던) 정부 과학기술 연구기관(출연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블라인드 채용도 한국 과학의 발목을 잡은 정책들”이라고 했다. 과학기술 단체 육성·지원과 과학기술인의 사회 참여 확대를 위해 1966년 만들어진 과총은 400개 학술 단체를 포함해 총 607개 단체를 회원으로 두고 있다. 직간접적으로 과총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의 숫자는 500만명이나 된다. 이 회장은 “국민의 10분의 1이 과학기술인인데, 제대로 사회에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것은 과학기술인 자체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평등하게 과학 하면 뒤처진다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 과학기술 분야 출연연구기관에서 2500명이 넘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채용할 때에는 연구자의 주요 정보를 가리는 블라인드 방식을 따랐는데 최근에야 폐지됐다. 이 회장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지적했다.

- R&D 비중 세계 2위인데 주목할 만한 성과가 없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과학기술의 목표는 누구나 잘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공평하지 않다. 미래가 달린 문제에 전 세계 나라들이 목숨 걸고 경쟁하고 특정한 나라가 주도권을 갖고 막대한 부를 창출한다. 될 것 같은 과학기술과 연구자에게 예산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국내 과학기술계는 공평이 무엇보다 우선했다. 출연연에서 비정규직 연구원을 정규직화한 것은 전문 분야가 따로 있는 간호보조원에게 의사 역할을 맡긴 셈이다. 정작 그 자리에 갈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져서 엉뚱한 기업에 가고 외국에 간다. 묻지마식 블라인드 채용이 이번 정부에서 없어졌지만, 기존에 뽑은 사람들은 정년까지 안고 가야 하는 것이 부담이다.”

- R&D 예산을 배분하는 기획 단계부터 평가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나눠 먹기라는 비판이 많다.

“지금은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연구를 평가한다. 그 분야 최고 전문가라도 연구자와 같은 대학·연구소거나 학연·혈연이 있으면 평가에서 제외된다. 이게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문가를 다 빼고 나니 비전문가가 기초적이고 황당한 질문만 해서 평가한다. 선진국 어느 곳에서도 이런 식으로 전문가를 배제하지 않는다.”

-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얘기인가.

“무한 경쟁 체제에 맞춰 한국 과학기술계도 개편돼야 한다. 실패해도 도전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 하지만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문제다. 정부 예산이 투입된 연구는 모두들 100% 성공이라고 한다. 이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성공할 수밖에 없는 연구, 누구나 할 수 있는 연구를 한 것이다. 이런 식이니 산업계에서 필요한 기술은 못 만든다. 진짜 국민과 산업계가 원하는 기술이 무엇인지부터 고민하고, 거기에 중점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중요한 기술을 준비하고 개발하지 못하면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때와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 미·중 무역 전쟁에서 한국 정부와 기업이 눈치를 보는 것도 우리가 갖고 있는 핵심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태식 신임 과학기술총연합회 회장. / 장련성 기자

과학계 안이한 태도가 국민·산업과 괴리 만들어

- 과학기술계가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얘기인가.

“과학기술계는 자성해야 한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400개 학회가 각자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과학자를 존경해야 한다? 과학기술이 사회의 가장 큰 원동력이다? 그렇게만 외치면 국민이 수긍하겠는가. 사회에서 동떨어져서 연구실에서 자기 하고 싶은 연구만 하니 영향력이 없어진 것이다. 연구자들도 세상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 한다.”

- 국민이 체감하는 과학기술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제조업에 과학기술이 활용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기술은 인간의 삶 전체에 녹아 있다. 엔터테인먼트에도 과학기술이 많이 쓰인다. 해외에서는 작사·작곡가에게 임금을 나눠주는 데 인공지능(AI)이 쓰이고 콘텐츠 제작에는 3차원 가상현실인 메타버스를 이용한다. 챗GPT 같은 챗봇(채팅 로봇)도 활용 사례 중 하나다. 최근 만난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엔터테인먼트 업계 사람들은 한국 IT(정보기술)와 협력하고 싶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게임산업에도 과학기술이 활용된다. 산업계와 달리 정작 우리 과학기술계는 이런 분야에 관심이 적었다.”

15 초 후 SKIP

- 미래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목표 설정이 중요하다. 회사는 오너가 목표를 정하면 오랜 기간 연구해 성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출연연은 기관장의 임기에 따라 짧으면 3년 길면 6년이다. 대학교수들은 연구비 지원에 영향을 받는다. 과학기술계 리더들이 나서 미리 목표를 준비해야 한다. 과총이 7월 세계 한인 과학기술자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한다. 국내외 과학기술자 3000여 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주제는 ‘2030년 우주와 미래 과학기술 전략회의’다. 해외 유명 우주 기업인들의 초청도 추진 중이다. 과연 2030년에는 어떤 기술이 어떻게 실행되는지 석학들이 모여 토론하는 것이다. 정부와 일부 국내 연구자들이 머리를 맞댄 것과는 전혀 다른 발상도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인재들 의대 가면 바이오 산업 부흥할 것

- 반도체, 바이오 등 정부 대책이 나올 때마다 인력 양성 얘기가 나온다.

“출연연은 늙어가고 있고 대학은 학생들이 없어지고 있다. 연구인력 자체가 부족해지는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는 학생 없는 교수 집단이 있다. 우수한 교수들은 강의 대신 연구에만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도 준비해야 한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을 따지지 말고 필요한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또 대학 구조조정 문제로 싸우기보다는 각 대학을 그대로 두고 학생과 교수의 교류를 인정하면 문제가 좀 더 쉽게 풀린다. 학생들이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교수 연구실을 오가도록 하자는 것이다. 외국 인력도 활용할 수 있다. 79국 350명이 서울대와 카이스트에서 석·박사를 수료했다. 이들은 유학 후 자국으로 돌아가 과학기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인력들을 친한파로 유지시켜 한국 과학기술 영향력을 세계로 확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 인재들은 모두 의대로 가고 있다.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한때 화학공학과가 입시 점수가 제일 높았는데 10~20년 뒤 관련 산업이 발전했다. 산업의 부흥과 전공이 맞춰가는 것이다. 지금 시점에 의대와 바이오에 똑똑한 사람이 가는 것이 맞는다. 다만 임상의가 아닌 의사과학자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 고민거리이다. 바이오 분야에서 성공한 사례를 보여주면서 의사과학자가 되라고 유도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KAIST와 포스텍에서 의사과학자를 키우겠다고 하고 한국공학한림원에도 바이오 분과가 생겼는데 지금은 과도기라고 봐야 한다.”

강남에 테헤란 밸리 만들어 시너지

- 한국 과학의 국제적 위상은 어떻게 높일 수 있나.

“과학기술 외교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과거 미국에서 원조를 받던 우리나라는 이미 개발도상국에 공적개발원조(ODA)를 하고 있다. 선진국과도 기술 교류가 필요하다. 각 학회와 국가가 원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한국은 의료 바이오 기술 전수를 생각했지만 베트남은 농수산물 바이오를 원하는 식이다. 민간 차원에서 교류의 장을 만들면 된다. 과총 같은 곳이 복덕방 역할을 할 수 있다. 국가와 국가만 생각할 게 아니라, 학회와 국가, 학회와 학회 식으로 국제 교류를 확대하면 네트워크의 폭이 넓어지고 세계에서 ‘K사이언스’를 접할 기회도 많아질 수 있다.”

이태식 과총 회장은 강남구 일대에 산업과 과학기술계를 연결하는 테헤란 밸리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테헤란로 일대. /조선일보 DB

-과학기술이 산업발전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미국의 실리콘 밸리처럼 강남에 ‘테헤란 밸리’를 만들겠다. 강남역부터 삼성역까지 4.1㎞ 거리에 골목을 세어보니 141개였다. 과총과 발명진흥회, 공학한림원 등 과학기술 단체들이 테헤란로에 모여 있고, 밴처캐피털 100곳 중 60곳이 여기에 있다. 산업자원통상부가 지원하는 벤처기업도 2000~3000곳이 있다. 강남을 통틀면 6000곳이다. 현재 이들은 따로 놀고 있고 뚜렷한 밸리의 혜택이 없다. 과총이 적극적으로 나서 얼라이언스를 만들고 테헤란 밸리의 정체성을 만들어보겠다.”

☞이태식

1953년생으로 서울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 건설경영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양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로 대한토목학회 회장과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원장을 역임했고, 올 3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회장으로 취임했다. 초고속 열차 하이퍼루프, 달 기지 건설 등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도전하는 일에 관심이 많아 ‘꿈을 좇는 과학자’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