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경제

잼버리 청소년들이 열어젖힌 대한민국 ‘판도라의 상자’

太兄 2023. 8. 14. 15:42

[강경희 칼럼] 잼버리 청소년들이 열어젖힌 대한민국 ‘판도라의 상자’

전·현 정부 탓은 누워 침뱉기
지자체 과욕 부린 뻘밭에서 무능·무책임의 3류·4류가 조직위 지휘
전 세계에 들통나서 차라리 희망적이다

입력 2023.08.14. 03:20업데이트 2023.08.14. 07:53
 
8월 2일 전북 부안군 새만금에서 열린 2023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 참가 대원들이 계속된 폭염에 지쳐 쓰러져 쉬고 있다./김영근 기자

잼버리 청소년들이 새만금의 더러운 화장실 변기 뚜껑을 연 순간 우리가 숨겨뒀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파행과 무능, 무책임이 쓰나미처럼 쏟아져 나왔다. 성공에도, 실패에도 분명한 이유는 있다. 진단이 정확해야 개선의 여지도 생긴다. 일차적 책임은 조직위에 있다. 조직위는 한정된 시간에 민관, 유·무형의 자원을 총동원해 성과를 내는 구조다. 그래서 성공 여부는 조직위원장의 리더십에 달려있다.

32년 전 고성 잼버리는 30대 후반에 역대 최연소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가 된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이 1985년 유치했다. 수없이 야영장을 다니며 준비 상황을 점검했다. 운영요원들에게는 잼버리 정신을 가르쳤다. 공동 조직위원장은 강원도지사였다. 지방자치제 시행 전이어서 준비 6년간 관선 도지사가 3명 거쳐갔다. 최고 전문가가 주도하고 정부는 일관되게 도왔다. 본질에 충실한 덕에 성공했다.

새만금 잼버리는 목적도, 주체도 달랐다. 전북 정치인들이 주도했다. 민선 지자체장들 사이에 국제 행사 유치로 중앙 정부에서 SOC 예산을 따내는 개발 모델이 유행했다. 전남은 2012 여수 엑스포, 강원도는 세 번 만에 2018 동계올림픽을 따냈다. 뒤늦게 뛰어든 전북도는 잼버리 개최 경험이 있는 무주는 제쳐두고, 새만금 개발을 위해 갯벌에 세계잼버리를 유치했다. 시간이 촉박하니 정부는 토지 용도까지 변경해 매립 자금을 대줬다. 전북도의 집행 역량은 미흡했다. 1년 전 프레잼버리도 못 열렸다. 행사가 끝나 간이 시설은 철거되고 드넓은 부지의 용처도 딱히 없다. 부동산 개발 사기, 분양 사기나 다름없다.

새만금 잼버리의 부실 운영이 드러나니 이낙연 전 총리가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을 문재인 정부 성과인 양 자랑했다. 성공 이유는 정반대다. 정권 교체 후 올림픽까지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전 정부에서 임명한 조직위원장을 바꾸지 못한 덕에 성공했다. 2018동계올림픽은 민관 경험을 두루 갖춘 유능한 관료 출신의 이희범 전 산자부 장관이 2016년부터 단독 조직위원장을 맡아 책임지고 준비했다. 반면 2020년 출범한 새만금 잼버리 조직위는 1년여 단위로 바뀌는 여성가족부 장관, 일 안 하고 공치사만 능한 국회의원, 그 둘이 공동 조직위원장이었다.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그 밑에 여가부 국장 출신의 사무총장과 지역 이기주의를 벗어나기 힘든 민선 지자체장(전북도지사)이 집행위원장으로 행사를 끌어갔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표현을 빌리자면 3류 공무원, 4류 정치인의 집결체다. 현 정부는 뒤늦게 조직위원장 셋을 더 얹었는데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하다. 애당초 부지 선정부터 난맥상이었던 새만금 잼버리는 조직위에 ‘이희범 리더십’도, 부끄러운 민낯을 늦게라도 미봉책으로 덮어줄 구원투수도 없어 파국으로 치달았다.

 

대한민국 표준이나 국제 기준으로 바라보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많은 4500명이 참가한 영국이 제일 먼저 퇴영한 건 스카우트 정신 부족으로 폭염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잼버리 종주국 영국은 책임자들이 일찌감치 도착해 준비 상황을 철두철미 점검한다. 위생 불량한 화장실, 부족한 샤워실 등 반복된 지적에도 조직위는 개선 의지도, 개선 역량도 안 보였다. 영국의 퇴영 결정은 새만금 조직위에 내린 파탄 선고였다.

새만금 잼버리의 급식 담당 대기업이 겪은 상황도 비슷했다. 고성 잼버리를 비롯해 국제 행사 경험도 많고 하루 200만식을 공급하는 국가대표급 업체다. 평창올림픽은 이보다 작은 업체가 투입돼서도 잘 끝났다. 청소년 대원 3만4000명에게 식자재를, 운영요원 9000명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은 치밀하게 준비해야 하는데 맞닥뜨린 건 간판만 국제행사이지, 폭염, 습지의 벌레 우글거리는 오지 환경에 조직위 역량은 시골 잔치 준비하는 정도의 무능함과 안이함이었다. 아이들 3만4000명이 야영하면서 직접 조리해 먹는 식자재를 행사장 전역의 18개 냉장 컨테이너에 새벽 배송해야 하는데 행사 직전까지 전기가 안 들어와 야영장 냉장 컨테이너를 사용 못 했다. 냉장 컨테이너 트럭에서 직접 나눠줘야 하는데 조직위는 지게차 등 최소한의 장비도 준비 안 해 배송기사와 파견 직원들이 짐 내리느라 생고생했다. 조직위가 권한 지역업체에서 구운 계란을 공급받았다가 ‘곰팡이 계란’ 질타까지 받았는데,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열악하고 황당한 현장에서 집단 식중독 같은 더 심각한 사태가 안 터진 건 위생 관리 철저한 대기업 및 협력업체 직원들이 그나마 고생하며 버텨준 덕분이었다.

모르는 바 아니었다. 뒷감당 못하는 일 벌이는 무책임한 정치인, 민간보다 무능하면서 갑질 일삼고 윗사람 눈만 속이는 공무원 등 세금 기생충들이 기괴하게 커지는 걸 막지 못한 결과다. 이제 온 세상이 다 알게 됐으니 제발 이번에는 여야 간에 “네 탓” 정치 공방으로 본질 흐리지 말고 다 같이 부끄러워하면서 책임 규명에 철저해야 할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맨 마지막 희망을 찾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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