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호 백제 부여풍장
-고대사
2015-03-23 22:14:27
왜왕 1대는 가야, 일본 국호는 백제 부여풍장
이을형의 ‘법과 정의’…
단군조선(檀君朝鮮)과 고대역사(18)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개인이나 단체든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미래지향적 목표가 있어야 한다.
국가도 미래지향적 목표가 바로 설정돼 있어야 건전한 발전을 기할 수 있다.
무릇 국가는 그 국민을 이끌어 나아갈 위대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국민 전체가 부패와 혼란에 빠진다.
지금 우리나라의 혼란상황을 보면 미래지향적 목표가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에 따라 가치의 혼란이 극에 달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교육과 훈련이 없는 삶 속에서 미래지향적 목표가 제대로
설정돼 있지 않아서 일어난 현상이다.
지난날 일본은 1500여 년간 우리의 지배와 지도를 받고 지나 온 나라였다.
사상도 없고 정신적 목표도 없었던 일본은 우리와 역사적·문화적·정신적으로 모두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서기 2~3세기에 일본은 석기시대에 머물고 있었다.
3~4세기부터 우리가 그들을 지도·지배해 왔다.
고대에는 왕인박사가, 근세에는 이퇴계 및 율곡의 주자학이 대표적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이들은 일본 학자들의 흠모와 외경(畏敬)의 대상이었다.
일본은 300여 년간 쇄국정책을 쓰면서 조선왕조의 쇄국정책과 중국만을 사대교린(事大交隣)하는 나라였다.
그러던 일본이 막부 말(幕府 末) 개항 이래 국가의 안위를 위해 그들 문명에 앞선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군사력을 키웠다.
1850년대 초에는 그들 자신보다 문명이 앞선 나라 이상으로 군사력을 키운 끝에 그 총구를 한반도로 돌려 명치유신 후 조선을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자신감에 넘쳐 침략행위를 노골적으로 했다.
하지만 패전 후 일본은 조선침략 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왜곡한 역사를
통해 일본이 고대 한국을 지배했다는 군국주의 시대의 역사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이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옛 허상의 꿈을 다시 연상케 하는 신 군국주의 망동 이다.
더구나 아베신조는 공개적으로 군국주의 시대의 역사교육을 강화하며 독도영유권까지
교과서에 게재하면서 침략근성을 드러내고 있다.
아베 정권은 국민의 침략적 사기를 북돋우면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는 중이다.
전천후 무적함대로 꼽히는 이지스 함도 12척을 목표 중인 가운데 이미 9척을 진수시킨 상태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치인이나 역사학자들 까지도 천민(天民)으로 자처하던 조선(祖先)이
살던 이강토가 조선조 초에 중국을 섬기는 자원식민지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도 얼빠진 반도식민사관의 망국적 외래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학노들이 너무 많다.
고대 사해에 무위를 떨치며 우리 한민족이 중국과 일본을 지도·지배 한 역사를 다시
가르침으로서 민족적 자주성과 자존심을 북 돋우고 위대한 한국의 역사와 찬란한 문화의 중핵(中核)을 확립해야 한다.
이를 통해 민족정신을 좀 먹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변조의 흉계를 일축(一蹴)해야 한다.
이번 칼럼은 우리가 중국과 일본을 먼저 깨우친 선조들의 행적, 특히 일본 역사에 대해 쓰고자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백제기(百濟記) 인용해 쓴 후 거침없이 위조
일본의 역사는 ‘3대 위조’가 있다고 최인 선생은 말하고 있다.
첫째는
성덕태자(聖德太子)시대부터 소가씨(蘇我氏)가 수집해 둔 역사초안이 전부
분실됨으로 인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히에다(稗田阿禮)라는 일개인의 구전(口傳)에 의해 일본 역사를 역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상식적으로 정체를 모르는 한 개인의 구전은 한 개의 전설일 뿐 역사가 아니다.
둘째로
일본은 해중원도(海中遠島에 동떨어져서 1~3세기경까지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대륙문화에 접촉하지 못해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는데, 신화를 믿는 신국(神國)으로 타락돼 있었다.
지금도 그들은 800만 이상의 신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타민족의 침략을 받지 않고 성장함으로써 자존(自尊) 의식이 지나치게 강해 오만(傲慢)한 속성들이 자랐다.
신화와 오만한 속성이 합작해 일본을 중심으로 한 신화적 역사를 위조·조작하고 있다.
셋째는
명치유신의 시대 때는 독일이 위대한 역사를 위조해 국민의 용기를 북돋는 것을 흉내 내 의식적으로 위대한 역사를 위조했다.
이 같이 삼대조작을 가진 일본 역사는 터무니없는 위조사다.
‘일본서기’는 720년 유민으로 일본에 건너간 후손 안만려(安萬呂)가 썼는데, 이는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한 것이다.
‘백제기’는 백제 인이 저술한 역사요, 후대까지 보존치 못했다.
‘일본서기’는 백제기를 인용하면서 본래의 ‘백제기’를 말살하고 백제가 일본에 예속돼 일본을 종주국으로 받들었다고 조작했다.
중국인까지도 동방강국(東方强國)이라고 말한 백제가 동방소국인 일본에 예속됐다 함은 기가 막히는 명백한 위조다.
이노우에(井上光貞) 교수도 그의 저서 ‘일본국가의 기원(起源) 96면’에서 “‘일본서기’의 편자가 백제의 원형을 왜곡해 기록한 것도 있다”고 언급했다.
일본인 자신이 ‘일본서기’를 불신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열도의 성립은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우리나라 환국시대 대륙으로부터 분리돼 나가면서 시작됐다.
일본인의 기원은 DNA나 인골의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한민족과 가장 가까운 것이 판명됐다.
일본 역사를 논하자면 역사의 단계를 아는 것이 첩경이다. 일본에 선주(先住)한 민족은
아이누 족 설 등이 있으나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에 대륙으로 분리 이전에 대륙에 살던 족으로 추정된다.
일본인은 일본열도가 분리되기 이전, 대륙에서 분리된 석기시대 어느 시기부터 인간이 거주했다고 추정된다.
일본민족의 문화도 북방적 요소와 남방 적 요소로 공히 나타난다.
그들은 나누이나 우리의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본다.
일본은 1~2세기에 많은 부족국가인 소부족 국으로 분립했는데,
이때 가야가 일본에 진출해 분국인 임나(任那)를 통해 일본을 통치했다.
3~4세기에 와서 강대한 자가 부근의 소국가를 통일했으나 전국 통일은 이루지 못했었다.
그 강대한 자의 하나가 서기 239년 위(魏)에 입공(入貢)했다는 히미고(卑弥呼)다.
그가 지역을 통일해 세웠다는 나라는 북 구주에 있는 사마대국(伊都國=邪馬臺國)이다.
일본 국호, 의자왕 아들 부여풍장(夫餘豊璋)의 일왕 때부터 시작돼
일본 고대사를 보면 서기전 1세기에 조선무녀(朝鮮巫女) 히미고(卑弥呼) 2대가 약 30의
부족을 연합해 통치한 이도국(伊都國=邪馬臺國)이 최초의 나라라고 하는데,
이 사마대국(邪馬臺國)도 부족투쟁으로 혼란에 빠지자 신라가 웅습(熊襲)을 내세워
일본을 정복해 소위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신화가 나왔다.
그리고 한국유민이 세운 남구주의 구노국(狗奴國)을 대부분 정복했다.
일본은 4세기 말인 390년 일본에서 태어난 가야인 오진(應神,-神功皇后의 아들)이 나라를
세워 왜(倭)라하고 비로소 뚜렷한 일본의 실존 인물인 왜왕(倭王) 1대가 탄생했다.
5세기에 와서 고구려 광개토 호태왕이 일본을 정벌하니 일본이 저항치 못해 송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5세기 말~6세기 초에 야마토(大和)를 중심으로 부족 연합이 형성되고
6세기 말~7세기 초에 호족(豪族)이 분립해 자기의 세력을 부식(扶植)했다.
호족 중 대표는 한국 가야계인 소가씨(蘇我氏)이다.
소가씨(蘇我氏)는 587년 일왕 18대 스슝천황(崇峻天皇)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스이코(推古天皇)를 등극시킨다.
이 때 혼란으로 성덕태자(聖德太子)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섭정(攝政)하고
대화개신(大化改新)을 시도했다. 이 때에 고구려가 혜자법사(惠慈法師)를 일본에 보내 대화개신(大化改新)을 지도했다.
이때까지 천황의 권위가 서지 못하고 7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비로소 천황의 권위가 확립됐다.
7세기 이전은 대왕이라 칭하고 7세기부터 천황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국호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일왕 23대인 사이메이(齊明) 여왕이
백제로부터 원군지원을 요청받아 서기663년 출정했으나 백강전투에서 실패하고
백제가 망한 후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장(夫餘豊璋)이 사이메이(齊明) 여왕의 뒤를 이어
텐지(天智)가 일왕이 되고 671년에 당의 승인을 얻은 때부터다.
일본(日本)이란 국호는 이렇게 나왔다.
백제를 태양의 나라(구다라)로 부른 일본…백제의 모든 것을 본받다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百濟)라고 부른다.
구는 태(太), 다라는 태양(太陽)의 나라라는 뜻이다. 백제는 일본에게 바로 큰 태양으로 여겨졌다.
구다라(百濟)를 본 떠 국호를 일본이라고 한 사실 자체가 한국 유민이 세운 나라라는 증거다.
일본이 자랑하는 호류지(法隆寺)의 유명한 불상을 구다라관음(百濟觀音)이라고 하는 것은 백제인이 만든 불상이기 때문이다.
야마토(大和) 정부도 신라 진덕여왕의 태화연호(太和年號)에서 따온 것이다.
메이지(明治)는 고구려 문자왕(文咨王)의 연호에서 땄다.
일본은 역사를 왜곡하며 일본이라는 나라가 생기기도 전인 4~6세기 사이에 소위
미나마일본부(任那日本府)를 한반도에 설치해서 신라, 백제, 고구려까지 정복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한다.
앞서 칼럼에서 언급했지만 미나마 일본부(任那日本府)는 가야가 일본에 분국(식민지)을 두고 일본을 통치한 기관이다.
우리가 가야론에서 주의해야 할 점 있다.
가야가 신라에 병합됐기 때문에 흔히 가야와 신라를 잘못 알고 미나마(任那)라고 부르며
앞선 옛날에 가야인(伽倻人)이 규슈(九州)에 만든 가야의 식민지 미마나(任那)와 혼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야는 일본에 식민지를 세우고 가야의 유력한 주력분자들이 왜 땅에 건너가서 일본국건설에 참여하고 통치까지 했다.
일왕15대 킨메이(欽明) 일왕은 571년에 대담하게 신라에 사신을 보내 가야를 멸한
이유를 묻고 신라를 쳐부수고 가야를 다시 세우라고 유언했다.
일본사서(日本史書)는 가야국이 완전히 멸망해 신라에 병합된 후에도 조공이니 공조니
하는 것을 600년까지도 기록하고 있으니 참으로 파렴치한 기록들이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고향인 가야(伽倻)를 단념한 것은 나·당연합군에게 패한 텐지(天智)왕 이후였다고 한다.
이 텐지(天智天皇)라는 왜왕(24대)이 분명히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712년에 쓴
‘고사기(古事記)’나 720년에 쓴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본구조를 좌우하는 중대한 기록이다.
또한 지금 일본의 상당수 일본인은 우리와 같은 조상을 둔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일본은 국가 성립과 문물제도에 있어서 세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우리의 전적인 도움을 받아 발전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한민족으로 조상이 같으나 역사적 우연에 의해 떨어져 나간 종족이었기에 역사의 깊이가 다르다.
현재의 일본이 한국이 아닌 것처럼 현재의 일본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로 세계강국이 됐다.
우리는 지난날 일본을 은혜와 위엄으로 그들을 대하고 도왔으나 그들은 과거 유민의 한(恨)을 골수에 품어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다.
더구나 명치유신 이래 일본의 대한(對韓)침략사관과 역사왜곡은 너무나도 비사실적이고
그 정도가 대담한데 놀라고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인간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존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고병익 ‘일본의 현대화와 한일관계’,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한창건 ‘환국·배달·조선사신론’,
한정호 ‘대조선민족사’,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주해 환단고기’, 김부식 ‘삼국사기’,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한창건 ‘한국고대사 발굴’,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三省堂 編修所編·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各國別:世界史の整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日本の歷史’ 외
다수서책을 참조 인용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