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의 대한민국, 위기의 징후들
(배규한 백석대 석좌교수)
1. 절정의 대한민국
한국전쟁 직후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오늘의 대한민국은 꿈만 같습니다.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150여 국가 중 유일하게 경제적 근대화와 정치적 민주화를 모두 이루었고, 외국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최근 IMF 통계에 따르면, 한국 1인당 국민소득은 33,400불입니다. 1953년에 66불이었는데, 70년 만에 500배로 늘었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경제규모 10위, 과학기술 7위이며, 일곱 나라뿐인 ‘30-50클럽’에 진입했습니다.
한국은 전차와 대포, 항공기와 잠수함을 세계로 수출하는 방위산업 강국입니다. 소형원전기술 1위의 원전 수출국이며, 전자정보기술 1위, 조선업 1위, 잠수함 생산 5위, 자동차 생산 5위, 철강 생산 6위입니다. 세계 4위 AI 강국이고, 3대 교육용 로봇 수출국이며, 세계 1등 상품을 151개나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문화를 수출하는 나라는 7개뿐인데, 한국은 그중 하나입니다. K-pop과 K-drama가 세계적 열풍을 일으키고 있으며, 한글은 세계 언어학자들이 평가하는 최고의 문자로서 문자 없는 나라에 수출됩니다. 지난 8월 US News가 발표한 세계 강국 순위에 따르면, 한국은 프랑스나 일본보다 앞선 6위입니다. (①미국 ②중국 ③러시아 ④독일 ⑤영국 ⑥한국 ⑦프랑스 ⑧일본 ⑨사우디아라비아 ⑩아랍 에미리트)
요컨대, 경제력, 국방력, 문화력 등 종합적인 측면에서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으며, 그야말로 세계 속의 한국,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입니다.
2. 위기의 징후들
그런데, 위기는 절정기에 찾아옵니다. 절정의 한국에도 위기 징후가 곳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라는 외부 공격으로 망하기도 하지만, 내부 요인에 의해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첫째, 한국은 ‘인구 자멸’ 위기에 처했습니다. 인구는 사회 존속의 기본요건인데, 한국은 2001년부터 합계출산율 1.3 이하의 초저출산 사회로 들어섰으며, 작년 합계출산율은 0.78명, 올해는 0.6명대로 예상됩니다. 1.0 이하 출산율은 세계적으로 유례(類例)가 없는데, 한국만 1.0 이하 기록을 2018년부터 6년째 경신하고 있습니다.
출산율은 세계 최저인데, 낙태율과 자살률은 세계 최고입니다. 낙태 시술 통계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전문가들은 낙태 건수를 연간 최소 32만 건, 최대 100만 건까지 추정합니다. 2022년 출생자 수는 약 25만 명이니, 낙태 시술 건수가 출생아 수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사회입니까?
자살률은 2003년부터 지금까지 압도적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2019년 OECD 국가 평균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11명인데, 한국은 24.6명으로 월등히 높습니다. 작년에는 25.2명으로 매일 평균 36명이 자살했습니다. 40분마다 1명씩 자살합니다.
이 추세라면 100년 안에 지금 인구의 60% 이상이 사라질 텐데, 과연 나라가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둘째, 사회적 가치와 규범이 혼란스럽습니다. 물질적 가치가 만연하며, 삶의 의미보다 재미와 쾌락을 추구합니다. 공공의 이익을 해치면서까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공공기관 임직원들의 불법적 사익(私益) 추구가 도를 넘었습니다. 사회 신뢰는 추락하고 분열과 불신은 증가하여 위증죄, 무고죄가 급증했습니다. 인구 10만 명당 건수를 일본과 비교하면, 위증죄는 25배, 무고죄는 40배나 많습니다.
사회적 규범과 질서 유지의 최소단위인 가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가족공동체 의식이 약해지고 결혼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습니다. 편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 결혼을 늦추거나, 비혼주의자도 많습니다. 2022년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1인 가구 비율이 34.5%입니다. 세 집 중 한 집이 혼자 사는 가구입니다.
셋째, 사회질서 관련 핵심제도들이 공정과 신뢰를 상실했습니다.
무엇보다 우선 국회가 시대변화에 부응하는 신속한 입법 기능을 상실하고, 공익(公益) 아닌 사익(私益)의 정치로 불신의 대상이 됐습니다.
사회정의의 보루인 사법부도 오염됐습니다. 판사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재판을 몇 년씩 미루는가 하면, SNS나 심지어는 판결에까지 이념적 편향성을 드러냅니다. 판사가 누구냐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진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법원 판사까지 뇌물을 받거나 이념성향에 따라 판결을 달리했습니다. 대법원이 법을 어기면서까지 선거재판을 미루거나 정치인 재판을 차별적으로 다루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대북전단금지법’ 위헌소송을 3년이나 끌었습니다. 사법부의 권위가 떨어지고 공신력을 잃으니, 담당 판.검사에게 압력을 행사하려는 집단 서명과 탄원서가 횡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앙선관위는 특권적 지위를 남용한 직원채용 비리로 신뢰를 상실했을 뿐 아니라, 정치에 휩쓸려 선거관리의 공정성까지 의심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사회적 공기(公器)인 신문.방송도 이념적 지향에 치우친 기사를 올리며, 특정 집단의 선전기구 역할을 합니다.
넷째, 공권력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국회는 국정원의 대공수사권과 검찰의 마약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도록 법을 바꿨는데, 정작 경찰은 전문성과 인력 부족으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경찰은 날로 흉포화되는 각종 범죄와 불법 파업과 시위를 통제하기도 벅찹니다. 마약이 급속히 확산하며 청소년, 군 내무반까지 침투했습니다. 한국도 이제 마약 청정국이 아닙니다.
2021년 청주간첩단, 2022년 제주간첩단(ㅎㄱㅎ), 2023년 창원간첩단, 민노총간첩단 사건 등에서 북한 지령문과 이들의 보고문을 보면, 북한은 지금도 끊임없이 남한에 좌익혁명 세력을 키우고 있으며, 하부조직이 전국에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건국일이 언제인지, 국군의 뿌리가 어디인지, 누가 국가유공자인지, 국가이념이 자유민주주의인지 그냥 민주주의인지, 주적이 누구인지 등 국기(國基)에 관한 사항을 논쟁의 대상으로 삼으니,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다섯째, 북핵 위기입니다. 다수의 국제정치학자는 전쟁발발 가능성이 가장 큰 지역 중 하나로 한반도를 꼽습니다. 북한은 최근 ‘핵 무력 발전 고도화’를 명기하는 개헌까지 했고, 주UN 북한대사는 지난달 26일 UN 회의에서 “언제 핵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 美국방부는 “북한이 군사충돌 시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상황이 이처럼 엄중한데도 “북한이 설마 전쟁을 일으키겠느냐”라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21사태’나 ‘아웅산테러’ ‘KAL기 폭파사건’에서 보듯이 북한은 체제유지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집단입니다. 북한은 대량 아사(餓死) 사태를 겪으면서도 적화통일 목표를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습니다. 북한은 ‘핵 무력 완성’과 ‘남한 내 혁명역량 고양’으로 적화통일의 때가 됐다고 오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대다수 국민은 물론 국가 엘리트조차 이러한 위기 징후들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대한민국은 계속 발전한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위기 징후에 철저히 대비하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나라가 몰락할 수도 있습니다.
3. 국가위기의 근원
국가의 기본제도 (가족.종교.정치.경제.교육) 중 사회 전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정치제도입니다. 정치제도는 국가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고, 전략과 정책을 수립하며, 사회질서 유지와 국민 보호를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지적한 위기 징후들을 보면, 모두 정치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가족해체, 인구절벽, 높은 낙태율과 자살률은 모두 정책실패의 결과입니다. 시대변화에 부응해 신속히 법을 개정하거나 제정해야 할 국회가 시대에 뒤떨어져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야 정치권 모두 30년 전부터 ‘혁신’을 가로막는 각종 규제를 철폐하겠다고 했지만, 달라진 건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한국 정치는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국가보다 개인적 가치를 더 중시하게 된 데는 정치 엘리트의 책임이 큽니다. 올바른 가치와 규범의 수범을 보여야 할 엘리트가 개인적당파적 이익을 위해 법을 위반하니 대중도 따라 합니다. 윗물이 흐리면 반드시 아랫물도 흐려집니다. 정치가 불신과 분열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대중에게 영합하거나 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해 지역.남녀.세대.직업을 갈라치거나 가짜뉴스를 퍼뜨리기 때문입니다.
공권력이 흔들리는 것은 정치의 개입으로 인해 조직이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사법부, 국정원, 공안기관, 선관위 등 주요 국가기관이 공정과 신뢰를 잃게 된 것은 정권(政權)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각종 안보해제 조치, 공안기관 업무조정, 공공기관 통제, 부적격자 낙하산인사 등을 강행했습니다.
정치가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사회적 공기(公器)인 신문방송까지 왜곡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국가 정체성을 흔들고 있는 것도 바로 정치인들입니다. 그들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끊임없이 외부 세력과 연계해 역사적 사실과 교과서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특히 북핵 위기는 완전히 잘못된 정치적 대응의 결과입니다. 1990년대 말 북한이 심각한 체제위기에 빠졌을 때, 한국은 북한에 달러를 지원해주었습니다. 2001년 당시 대통령은 “북은 핵을 개발한 적도 없고, 개발할 능력도 없다. 대북지원금이 핵 개발로 악용된다는 얘기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핵 개발은 김일성의 유훈이었고, 북한은 결국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에도 ‘남북협력사업’이란 명목으로 지방자치단체들까지 가세하여 수천억 원을 북한에 지원했습니다. 대통령은 북한의 선전에 호응해 북한을 두둔하거나 국제사회에서 오히려 북한을 대변하는 행태까지 보였습니다. 나아가 ‘9.19 합의’를 통해 북한의 무인기와 기습공격을 조기경보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튼튼하고 풍요한 나라에는 반드시 훌륭한 정치가 있습니다. 반대로 정치가 무능하거나 부패하면 반드시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 20세기에 몰락한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이라크, 필리핀, 캄보디아, 그리스, 스페인 등은 모두 이념적으로 편향된 정치지도자와 잘못된 정치 때문에 내려앉은 것입니다.
4. 도약과 몰락의 분수령
대한민국은 지금 도약과 몰락의 분수령에 있습니다. 관건은 정치입니다. 정치가 바뀌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고, 안 바뀌면 나라가 몰락할 수도 있습니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몰락을 경고하면서 “조작된 여론에 근거한 바보들의 민심 정치”를 지적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① 대중적 인기를 위해 대중의 요구에 무조건 부응하는 사회병리현상, ② 개인의 능력과 자질을 고려하지 않는 잘못된 평등관, ③ 절제와 시민적 덕목 대신 무절제와 방종으로 치닫는 현상, ④ 다중(多衆)에 휩쓸려 조작된 여론에 의한 정치 등을 지적했습니다.
오늘 한국 정치의 모습이 바로 이러하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정치’의 혁신이 없다면, 미래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실에서 정치권의 혁신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정치인 대다수가 체계적 훈련과정을 거친 ‘전문가’가 아니라 갑자기 영입된 ‘아마추어’이기 때문입니다.
총선이 다가오면 각 정당은 새 이미지 형성을 위해 인물 영입에 나섭니다. 유권자들의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스토리를 지닌 인물이나, 자기 분야에서 성공해 사회적 지명도를 얻은 유명인사를 영입합니다. 이때 정치적 자질과 역량보다는 대중적 인기나 득표력이 얼마나 있는지를 더 중시합니다. 인기 있는 방송인, 연예인도 영입대상입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민주투사 경력을 중시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인의 역할과 기능을 연구하거나 전문역량을 쌓을 기회도 없이 갑자기 정치인이 됩니다. 자기 개인 사업이나 영달을 위해 정치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생 자기 분야 일만 하던 사람, 투쟁만 하던 사람, 자기 이익만 추구하던 사람이 갑자기 국가 비전을 모색하거나 사회정책을 수립하며, 국리민복을 위한 제도 개선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은 국회의원이 되면, 국가관이나 정치적 전문성이 부족하므로 당당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당론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입니다. 여야 논쟁은 ‘철학 없는 꼬리잡기 싸움’으로 이어지며, 날이 갈수록 진영논리에 빠지고 그 문화에 젖어 듭니다. 그리고는 재선을 위해 공천권을 가진 당 지도부에 충성하며, 선명성 경쟁으로 언행이 강경해지고, 결국 파당적(派黨的) 정치인이 되고 맙니다.
21세기는 전문가 시대이고, 정치도 전문 영역입니다. 선진국의 경우, 정당이나 민간 기관에서 장기적, 체계적 훈련과정을 통해 전문정치인을 육성합니다. 정치지망생은 지역 수준의 정치에서 시작해 여러 해에 걸쳐 수많은 경쟁을 거치면서 중앙 정치인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러나 한국은 지금까지 정치 엘리트 양성을 위한 체계적 투자와 노력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한국의 정치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전문정치인을 체계적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문정치인은 올바른 국가관과 역사관, 정치외교적 전문성, 공인(公人)의식과 봉사정신, 인문학적 소양과 외국어 능력, 사회변동 추세와 미래문명에 대한 안목 등을 골고루 갖추어야 합니다.
새로운 정치를 열어갈 전문정치인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현재 한국의 정당에는 기대하기 어렵고, 국민적 자각이 필요합니다. 미국 헤리티지 재단이나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처럼, 정치발전을 바라는 사람들의 큰 기부를 통해 전문정치인 육성기관을 설립한다면, 10년 후 한국의 정치를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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