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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동경대 사태가 지금 한국 의료 갈등에 주는 교훈

太兄 2024. 8. 18. 20:21

1968년 동경대 사태가 지금 한국 의료 갈등에 주는 교훈

[아무튼, 주말]
[장부승의 海外事情]
동경대엔 69학번이 없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국제관계학 교수
입력 2024.08.17. 00:45
1969년 1월 학생들에게 점거된 일본 동경대 야스다 강당의 모습. 이곳은 곧 화염병과 물대포가 난무하는 아비규환으로 변한다. 일본에서 학생운동은 무급 인턴과 인턴 의무화에 반대하던 의대생들의 저항을 계기로 폭발한다. /J-cast 뉴스

동경대에는 69학번이 없다. 아예 입시 자체가 없었다. 세간에는 격렬한 학생운동 때문이었다고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사건의 발단은 1968년 초 하루미(春見)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동경대 의대생들은 1월 29일부터 의사법 개정에 반대하는 수업 거부에 돌입한 상태였다. 학생들은 당시 의대 학장 도요카와(豊川行平) 교수, 동경대 병원장 우에다(上田英雄) 교수와 면담을 시도했으나 거부됐다. 그러던 중 캠퍼스에서 우연히 우에다 병원장을 발견한 의대생들이 면담을 시도했는데, 당시 병원장을 수행하던 내과 의국원 하루미 겐이치(春見健一)가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학생들과 충돌한 것이다.

격분한 의대 학장단은 무려 17명에 대한 징계를 단행했다. 그런데 징계 과정에서 피징계자 중 한 명인 의대 학생회장이 당시 규슈에 있었다는 사실이 징계위에 보고됐으나 묵살당했다. 이에 분노한 의대생들은 6월 15일 동경대의 상징인 야스다 강당을 점거했다.

여기서 동경대 지도부의 결정적 오판이 나온다. 점거 이틀 뒤, 당시 동경대 총장 오코치 가즈오(大河内一男) 교수는 경찰 투입을 요청했고, 1200명의 경찰 기동대가 캠퍼스에 들어와 농성을 해제했다. 당시 동경대에서 캠퍼스에 경찰력을 불러 들이는 것은 금기로 여겼다. 그런데 오코치 총장이 이 금기를 깨자 이제 문제는 의대를 넘어 동경대 10개 단과대 전체로 파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6월 26일 문학부를 시작으로 10월 12일 법학부까지 무기한 수업 거부에 돌입하면서 동경대 역사상 최초로 10개 단과대 전체가 수업 거부에 들어갔다. 그 사이 7월 2일에는 야스다 강당이 재점거됐고, 7월 5일에는 동경대 전공투(全共闘·전학공투회의)가 결성되어, 의대생 징계 처분 취소 등 여러 요구를 내걸고 무기한 점거 농성을 벌이게 된다.

사태가 가라앉지 않자 11월 1일 오코치 총장 및 전체 단과대 학장들이 총사퇴하고, 법학부 학장이던 가토 이치로(加藤一郎) 교수가 총장 대행을 맡게 된다. 가토 총장 대행은 학생들 요구를 일부 수용하여 이듬해 1월 10일 학생들과 공개 토론을 통해 사태 수습을 위한 합의에 이르고 이를 문서로 교환한다. 이를 계기로 대부분의 단과대들이 점거 농성을 해제했다.

일본 동경대 사태 /NHK

그러나 극렬파 학생들은 야스다 강당 점거 농성을 계속했고, 결국 1월 18일 기동대 약 8500명이 재투입되어 이틀에 걸친 치열한 공방 끝에 야스다 강당을 탈환한다. 이 과정에서 경찰 측 부상 710명(중상 31), 학생 측 부상 47명(중상 1명)이라는 큰 피해가 발생했고, 야스다 강당은 화염병으로 인해 사실상 전소된다.

이러한 상황 전개 속에서 입시 불실시 논의가 처음 나오는 것은, 대부분 학부가 무기한 수업 거부에 돌입한 9월 말이다. 수업 일수 부족으로 전교생 유급이 불가피해 보이자, 입시 역시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제기된 것이다. 결국 12월 18일 열린, 총리 자문 기구인 대학문제간담회에서 “교육할 환경이 안 되는데 무리해서 입시를 실시하여 신입생을 받아들일 것까지는 없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동경대 측은 어떻게든 입시 불실시만은 피하려 했으나 문부성 측과 거듭된 협의 끝에 결국 12월 29일 이듬해 입시 불실시를 결정하게 된다. 학교 전체가 수업 거부와 점거 농성 상태이고, 모든 학생이 유급되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입시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1968년 동경대 사태와 지금 한국의 의대 정원 사태는 비슷한 점이 많다. 당시 동경대 의대생들의 분노를 부른 의사법 개정사항은 ‘등록의’ 제도였다. 원래 일본은 근대화 초기부터 의료 재정 부족으로 의사 양성과 병원 운영은 민간에 맡기되, 의료 가격 억제를 위해 의료행위의 분류와 가격은 정부가 결정하는 의료 체제를 운영해 왔다. 이 체제의 맹점은 미래 전문의 양성(수련) 과정이 약화된다는 점이다. 병원이 민간에 맡겨진 저수가 체제하에서는 수련의들의 교육을 위한 재원 마련이 어렵기 때문이다.

패전 후 미 군정 당국은 인턴 제도를 의무화하여 이 문제를 극복하려 했으나 결국 교육 재원 마련에 실패하자, 수련의들은 전문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무급으로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며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수련의에게 현재 한화 가치로 약 70만원의 월급을 주면서 인턴 기간을 2년으로 늘리자는 것이 ‘등록의’ 제도의 골자였다.

일본 의대생들은 이를 ‘개악’으로 받아들였다. 1968년 1월 동경대 의대생들이 수업 거부에 돌입한 데는 이런 곡절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경대 의대 교수들은 물론 동경대 지도부, 문부성 등 그 누구도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의대생들의 불만은 기성세대 전체에 대한 불만과 저항으로 번져 1968년 동경대 사태를 불러온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현재, 일본의 의료 시스템을 사실상 베껴온 우리 의료 체계는 과거 일본 의료가 겪었던 것과 같은 몸살을 앓고 있다. 저임금과 장시간 근로 속에서 ‘수련’이 아니라 ‘노동’을 해야 했던 전공의들이 더 이상 못 견디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이다. 그들의 불만에 이제 누가 귀를 기울여줄 것인가? 동경대 사태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는 들어줄 귀, 품어줄 가슴을 찾지 못한 젊은이들의 불만은 언젠간 폭발하고 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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