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일반상식

스포츠 강국 코리아, 누구 덕분인가?

太兄 2024. 8. 15. 11:00

[칼럼] 스포츠 강국 코리아, 누구 덕분인가?

서울올림픽 유치의 주인공이자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7년 세월을 고군분투했던 전두환은 개막식 행사에 초대받지 못했다. 그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서울올림픽의 개막식과 폐막식을 지켜보았다.

#. 올림픽 첫 금메달 딴 날, 광복절 비슷한 감격과 흥분

파리 올림픽에서의 승전보로 국민이 즐거워하고 있다. 8월 2일 현재 한국은 금메달 6개로 중국·프랑스·일본·호주·영국에 이어 6위에 올라 있다. 금메달을 딴 종목도 펜싱(2)·양궁(2)·사격(2) 등 다양하다. 개막 전, 한국은 금메달 5~6개로 15위 정도를 예상했으나, 이미 예상 목표치를 달성했고, 앞으로도 양궁·배드민턴·유도·태권도·수영 등에서 금메달 추가 획득이 예상된다.

한국이 언제부터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을까? 궁금하여 한국의 올림픽 메달 획득사를 살펴보았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올림픽 최초의 금메달은 하계올림픽의 경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레슬링), 동계올림픽은 1992년 알베르빌에서 김기훈(쇼트트랙)이 주인공이다.

1976년 8월 1일, 무더운 일요일 아침 양정모 선수가 동·하계 통틀어 올림픽 최초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한국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날 방송은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경기 실황을 중계했는데, 

“국민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한국 레슬링 양정모 선수가 드디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라고 흥분된 목소리로 역사적 낭보를 전했다. 일요일이라 신문 발행을 하지 않았던 언론들은 일제히 호외를 발행하여 감동의 순간을 국민에게 전했다.

한국일보는 “광복의 달 첫날 첫 휴일 아침에 전해진 양정모 선수의 금메달 쟁취 소식은 마치 광복과도 비슷한 감격과 흥분의 밀물을 전국에 몰아왔다. 시민들은 가정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피서지에서 일제히 건국 이후 첫 금메달을 축하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보도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한국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준 앙정모 선수.>
 
#. 한국 스포츠 새 역사의 주인공은 전두환

양정모 선수의 선전(善戰)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던 국민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주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후 한국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대한 항의 표시로 불참했고, 1984년 LA 올림픽부터 금메달을 목에 걸기 시작했다. 급기야 2008년 베이징,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선 가장 많은 13개씩 금메달을 따냈고, 1988년 서울과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는 12개씩 획득, 명실상부한 스포츠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렇다면 1980년대를 기점으로 어떻게 이런 성과를 내는 것이 가능해졌을까? 그 근원을 추적해 올라가면 ‘전두환’이란 존재가 등장한다. 아시다시피 전두환 대통령은 육사 재학시절 축구부 골키퍼 출신이었다. 스포츠를 좋아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서 한국의 스포츠는 새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스포츠 분야에 대한 전두환의 업적을 꼽는다면 누가 뭐래도 88서울올림픽 유치 성공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정부가 올림픽 유치의 첫걸음을 시작한 것은 1979년 9월 21일이다. 이날 박정희는 88 서울올림픽과 86아시안게임 유치안에 서명했다. 같은 해 10월 8일, 정상천 서울시장이 올림픽 유치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 돈 없어 브레이크 걸린 올림픽 유치작전

10·26으로 박정희의 돌연한 퇴장 이후 올림픽 유치는 표류했다. 1980년 1월 19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올림픽 유치 포기를 발표했다. 그런데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국이 1988년 올림픽 유치 의사를 정식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에 통보한 것은 1980년 12월이었다. 1981년 3월에는 각국 올림픽위원회(NOC), IOC, 국제경기연맹(GAISE) 조사단이 한국에 와서 개최 여건을 조사했다.

올림픽 개최를 위해서는 22억 8천만 달러(당시 환율로 1조 5,500억 원)의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다. 1981년 한국의 총예산이 7조 5,371억 원이었으니 연간 예산의 20%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당시 한국은 제2차 석유 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경제가 파산 일보 직전이었는데, 이처럼 막대한 자금을 스포츠 행사에 투자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론이 팽배했다. 때문에 올림픽 유치를 위한 노력은 첫판부터 브레이크가 걸렸다.

#. “올림픽 때문에 나라 망한다” 반대한 남덕우 국무총리

올림픽 관련 주무 부서인 문교부가 유치 활동을 위한 예산을 신청하자 남덕우 국무총리가 결사반대하고 나섰다. 남 총리는 ‘올림픽 망국론자’였다. 남 총리의 반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우리가 아무리 거국적인 유치 활동을 벌여도 일본 나고야를 제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둘째, 만에 하나 우리가 기적적으로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해도 올림픽 때문에 경제 파탄에 빠져 나라가 망한다.”

<올림픽 망국론'을 앞세우며 서울올림픽 유치를 반대했던 남덕우 총리>
 
이러한 비관론이 팽배해 있을 때 분위기를 180도 반전시킨 사람은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그는 전 국무위원이 경제적 난국을 이유로 결사반대하는 올림픽 유치 반대의 기세를 뚫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치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올림픽 유치의 자신감을 심어준 사람은 일본 이토추(伊藤忠)상사의 상담역 세지마 류조(瀬島龍三)와 고토 노보루(玉島昇) 도큐(東急)그룹 회장(일본상공회의소 회장)이었다.

두 사람은 10·26 이후 혼란과 침체를 털로 미래를 향해 나가기 위한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고 국민의 힘과 지혜를 한데 모으려면 올림픽 유치가 최선이라고 조언했다. 두 사람의 조언을 들은 전두환은 총력을 다해 서울올림픽 유치를 결심했고, 그러한 의지를 내각에 강력하게 전달했다. 전두환의 결단이 없었다면 88 서울올림픽 유치는 불가능했다는 것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 전두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올림픽 성공시키자”

전두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대통령에 재임하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자주 입에 올린 말은 88 서울올림픽이 아닐까 생각된다. ‘단임 실천, 물가안정’에 관한 얘기도 듣는 사람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많이 언급했지만, ‘88 서울올림픽’은 내가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할 만큼 나의 최대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라고 썼다(전두환, 『전두환 회고록-청와대 시절』, 자작나무숲, 2017, 331쪽).

<프로야구 출범을 위한 개막전에 참여하여 시구를 하는 전두환 대통령. 전두환의 강력한 의지로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기 위해 국가 총력전을 전개했다. 가장 먼저 1981년 연초에 내각에 특임사항을 맡길 정무장관실을 신설했다. 올림픽 유치 활동이 그 주된 임무였는데, 그 역할을 보안사령관을 끝으로 예편한 오랜 친구 노태우에게 맡겼다. 올림픽 유치와 관련된 업무는 노태우 정무장관이 관계부처와 대한체육회 활동을 지휘하도록 했다.

노신영 외무부 장관에게는 외교채널을 총동원하여 주재국의 IOC 위원들을 접촉하여 올림픽 유치 활동을 지원하도록 했다. 민간 차원에서 지원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올림픽 추진위원장으로 위촉했다.

1982년 3월 전두환 정부는 정부 부처로 체육부를 신설했고,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이 참여한 지원위원회를 설치했으며, 국회 내에 대회 지원 특위를 두어 서울올림픽대회 지원법을 제정했다. 1981년 12월 31일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률은 정부와 국회 등 범국가적 차원에서 서울올림픽을 지원하기 위한 법률이었다.

#. 금메달 따기 작전 개시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 승부욕에 불타는 인간형이었다.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는데, 막상 우리 마당에서 열리는 잔치에서 외국 선수들의 일방적 독무대가 된다면 이런 대회는 하나 마나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판을 깔아놓은 마당에서 우리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둬야 국민도 용기백배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경기력 향상이 올림픽 대회 유치보다 더 중요했다. 어떤 일이든 기획과 계획(Planning and program)을 통해 성과를 내도록 훈련받은 군 지휘관 출신 전두환은 이때부터 우리 선수들의 경기력 강화를 위한 방법론 마련을 위해 특단의 대책을 추진했다.

1982년 12월 31일 공포된 국민체육진흥법 4차 전면 개정법률은 스포츠 경기력 향상을 위한 엘리트 스포츠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대회의 철저한 준비를 위한 재정적·조직적 지원 체제의 확보를 위한 내용이었다. 이처럼 올림픽 지원과 스포츠 관련 법률과 조직을 정비한 전두환 정부는 적극적으로 올림픽 준비, 그리고 올림픽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 대통령이 3개월마다 올림픽 준비 회의 주재

전두환 대통령이 신설한 체육부는 대회의 효율적 준비는 물론, 국민체육에 대한 장·단기 계획 수립, 우수 선수 발굴 및 육성, 체육진흥사업을 담당했다. 또 서울올림픽을 위한 국제규격의 경기시설 건설을 지원했다. 그 결과 잠실종합경기장, 올림픽 공원 내에 최첨단 체조·펜싱·수영·테니스·사이클 경기장이 들어섰다. 특히 수영장과 사이클 경기장은 최고의 경기장으로 극찬받았다.

그리고 3개월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직접 올림픽 준비 상황 보고 회의를 주재했다. 한편에선 “체력 향상을 통한 국력 신장”을 강조했고, 국가 대표 선수들의 훈련장인 태릉선수촌을 자주 방문하여 선수들을 격려하고 체육진흥을 위한 갖가지 시책들을 협의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스포츠과학연구소의 확대 강화, 체육단체장의 강화, 체육인 복지 향상, 신인 선수 발굴, 대표팀 전임 코치제 등을 도입 시행했다. 체육인들의 연금도 2배 이상 대폭 인상하는 체육진흥정책을 펼쳤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3년도 국정연설에서 “산업 입국 못지않게 체육을 통해 국력을 떨치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역설했고, 각종 올림픽 시설 건설 현장을 시찰하고 점검하며 올림픽 준비를 진두지휘했다.

#. 엘리트 스포츠 집중 육성

단기간에 경기력을 향상하여 국제대회에서 입상하기 위해서는 엘리트 스포츠에 전력투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축구·야구·씨름 분야에서 프로팀을 창단하여 범국민적 스포츠 열기를 북돋웠다. 대한체육회의 1985년도 국고지원 사업의 국내 사업비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았다.

‘대표 선수 양성비 20%, 신인 선수 육성비 11.7%, 선수촌 시설비 19%, 선수촌 운영비 5.5%, 가맹 경기 단체 및 시도지부 운영비 6.2%, 기관운영비 8%.’

소수의 뛰어난 선수 육성에 대한체육회 국내 사업비의 70.4%가 집중 투자된 것이다. 또 스포츠가 과학과 접목되어야만 월등한 경기력을 낼 수 있다는 차원에서 스포츠 과학화에도 상당한 예산을 투입, 국가대표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지원했다.

<태릉선수촌에서 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국가대표팀 선수들. 한국은 단 기간에 올림픽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해 엘리트 스포츠 육성에 전력투구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한다고 해서 모든 국가 대표 선수들이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다는 보장은 없다. 엘리트 스포츠 육성을 위해 거의 모든 나라들이 사생결단의 총력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계 무대에서 자국을 홍보하고, 시상대 맨 윗부분에 자국 깃발을 올림으로써 국격을 높이고,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국가 간, 선수 간 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엘리트 선수를 열심히 육성한다고 해서 노력한 만큼 원하는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다. 엘리트 스포츠 성공 요인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베를 드 보처스(브뤼셀 자유대학 교수)는 엘리트 스포츠가 성공하여 원하는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다음 9가지 여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1) 재정적 지원: 국내·외 훈련 비용, 시설 유지 비용(트레이닝 센터 및 경기장 등) 등

(2) 엘리트 스포츠 관련 정책: 우수 선수를 선발하여 세계 최고 수준으로 길러내기 위한 육성시스템의 정책화

(3) 스포츠 참여 및 저변

(4) 선발-육성

(5) 은퇴 후 지원

(6) 선진화된 훈련 시설

(7) 뛰어난 지도자의 지도

(8) 각종 대회에 참가하여 경기력 확인

(9) 경기력 증진에 도움이 될 과학적 연구의 지원

남상우 충남대 스포츠과학과 교수는 이러한 9가지 여건에 두 가지 요인이 더 추가되어야 엘리트 스포츠가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란 엘리트 스포츠를 응원하고 즐기는 문화와 지속적인 시스템 업그레이드(남상우, ‘엘리트 스포츠는 어떻게 성공하는가?’).

#. 스포츠에 발전국가 시스템 도입

전두환 정부는 이 9가지 여건과 남상우 교수가 제시한 두 가지 추가 요인의 충족에도 성공했다. 그 결과 한국은 1980년 이전까지 금메달 1개가 전부였던 나라에서 매번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세계 4~10위권의 스포츠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로써 국위 선양에 성공했고, 대한민국을 세계만방에 알렸으며, 북괴를 압도했고, 일본을 이겼다. 전두환 정부가 어떻게 짧은 시간에 이러한 구체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전두환은 스포츠 영역에 박정희가 경제개발에 사용했던 발전국가 시스템을 도입했다. 전두환은 스포츠를 서구처럼 민간 영역에 맡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산주의 국가들처럼 아예 국가영역으로 끌어들이고 민간 영역을 소거하지도 않았다. 목표 할당, 지원, 규율, 그리고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국가가 스포츠에 개입한 것이다. 이것이 한국 스포츠가 공산주의와 서구 사이에 존재하는 제3의 길이었다(박해남, ‘서울올림픽과 1980년대의 사회정치’,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2018).

이러한 스포츠 분야의 발전국가 시스템 구축을 위해 전두환은 기업을 적극 스포츠에 끌어들였다. 1981년 10월 21일, 기업별로 금메달 책임제가 도입되어 

탁구는 동아그룹(최원석 회장), 
축구는 신동아그룹(최순영 회장), 
레슬링 삼성그룹(이건희 회장), 
복싱 한화그룹(김승연 회장), 
수영 현대건설(이명박 사장), 
육상 진로그룹(장익룡 회장), 
배구 한일합섬(김중원 회장), 
유도 한양그룹(배종렬 회장), 
농구 태평양화학(서성환 회장) 등이 참여했다.

각 대기업에 한 종목씩 떠맡기다시피 하여 스폰서 시스템을 매칭시켰다. 대기업 총수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해당 종목에 대한 전례 없는 투자를 통해 확실한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해당 기업 오너들은 1982년부터 스포츠계 1년 총예산 150억 원의 절반 정도를 찬조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에는 지원 비중을 3분의 2로 올렸다.

이렇게 시작된 재벌기업의 종목 담당 체제는 1988년까지 계속 이어져 서울올림픽 당시 정식종목이었던 23개 종목협회의 협회장 전원이 재벌 및 공기업 임원이었다.

이번 파리올림픽 펜싱 남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낸 펜싱 국가대표임. 펜싱은 SK텔레콤이 후원을 맡아 막대한 투자를 하여 한국은 펜싱 강국에 올랐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부터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 반열에 올랐고 동계올림픽·월드컵까지 유치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 스포츠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인프라를 확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선수들이 축구와 야구와 골프, 피겨 스케이팅 양궁과 쇼트트랙, 펜싱에서 세계적인 스타를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 올림픽 개막식에 초대받지 못한 전두환

1988년 2월 25일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전두환은 퇴임 직전 태릉선수촌을 방문하여 열심히 훈련 중인 선수들을 격려했다. 서울올림픽 개회 및 운영은 후임자 노태우의 몫이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서울올림픽은 박정희의 구상 및 계획 추진, 
전두환의 대회 유치 및 시설 건설 및 개최 준비, 
노태우의 성공적 개최 및 사후관리로 진행된 작품이었다. 한국에선 민주주의를 압살한 3대 군사 독재정권이 합작으로 이뤄낸 쾌거였다.

<서울올림픽의 유치와 대회 준비에 총력을 쏟았던 전두환 대통령. 하지만 그는 퇴임 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 초대받지 못하고 집에서 TV로 개막식을 지켜봐야 했다.>
 
1988년 9월 17일 화창한 가을 하늘 아래 88 서울올림픽의 개막식이 장엄하게 펼쳐졌다. 그런데 서울올림픽 유치의 주인공이자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7년 세월을 고군분투했던 전두환은 개막식 행사에 초대받지 못했다. 그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서울올림픽의 개막식과 폐막식을 지켜보았다. 당시 장면을 부인 이순자 여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40억 세계인이 하나가 되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대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이념과 체제, 반목의 벽을 뛰어넘어 인류화합이라는 대용광로 속에 융화되는 감격스러운 축제에 막상 올림픽 유치와 준비를 총지휘한 그이(전두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서울올림픽을 ‘나치 히틀러의 베를린 올림픽’이라고 비난했던 야당 정치인들이 귀빈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저력으로 160개 참가국 중에서 당당히 4위를 차지했을 때도 그이의 남다른 감격의 외침을 들어준 것은 함께 거실에 있던 가족들뿐이었다.”(이순자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 자작나무숲, 2017, 489쪽).

2024-08-04
김 용 삼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