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윙크보이' 박태준 金...8년만에 태권도 노골드 수모 씻었다
박태준(20·경희대)이 태권도 최경량급에서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도쿄 올림픽에서 ‘노 골드’ 수모를 당한 종주국 태권도가 8년 만에 따낸 올림픽 금메달이다.
박태준(5위)은 7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태권도 남자 58kg급 결승에서 가심 마고메도프(26위·아제르바이잔)를 기권승으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박태준은 1라운드 몸통 공격을 적중하며 2-0으로 앞섰다. 1분 7초를 남기고 두 선수의 정강이끼리 부딪쳤고 마고메도프가 통증에 드러누웠다. 마도메도프가 주저앉자 박태준이 다가와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대 감점으로 3-0으로 앞선 채 다시 경기가 재개됐고, 박태준이 연속 몸통 공격을 성공하며 7-0까지 앞섰다. 마고메도프는 다시 부상으로 주저앉아 치료를 받고, 경기가 재개됐다. 박태준이 9-0으로 1라운드를 잡았다.
마고메도프는 절뚝이며 경기를 소화하기가 어려워 보였지만 그래도 2라운드에 나섰다. 2-1로 앞선 상황에서 1분29초를 남기고 마고메도프가 머리 공격에 대한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으나 득점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3초 후 박태준의 뒷차기에 대한 주심의 요청으로 비디오 판독이 들어갔다. 이 점수가 5점으로 인정된 후 박태준이 상대를 몰아붙이며 13-1까지 점수를 벌렸다. 결국 마고메도프가 기권을 선언하며 박태준이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박태준은 금메달을 따낸 순간 기쁨을 만끽하기보다는 쓰러진 마고메도프를 지켜보며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고메도프가 나간 후에 비로소 태극기를 들고 기뻐했다.
한국 태권도가 올림픽 우승과 좀처럼 연을 맺지 못한 58kg급에서 나온 첫 금메달. 한국은 역대 13차례 치러진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58㎏급에선 금메달 6개를 따냈지만, 올림픽에선 번번이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2012 런던 이대훈 은메달, 2016 리우 김태훈 동메달, 2020 도쿄 장준 동메달이 그동안 성적이었다.
한국 태권도 역사를 새로 쓴 박태준은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올림픽 출전 가능성이 적어 보였다. 도쿄 올림픽 동메달, 항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건 이 체급 터줏대감 장준(24)이 버티고 있었고, 작년 세계선수권 58kg급 우승자 배준서(24)도 만만치 않았다.
둘보다 네 살이 어린 박태준은 차근차근 올림픽을 향해 전진했다. 그는 월드 그랑프리 챌린지가 배출한 신데렐라다. 월드 그랑프리 챌린지는 WT(세계태권도연맹)가 전 세계 태권도 유망주의 국제 대회 출전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신설한 대회다.
박태준은 대한태권도협회 육성선수 와일드카드로 2022년 6월 대회에 참가해 덜컥 우승했다. 그는 그랑프리 챌린지 챔피언 자격으로 초청 받은 10월 맨체스터 그랑프리 시리즈에서도 깜짝 우승하며 국제 무대에 존재를 알렸다. 작년 세계선수권에선 54kg급을 우승하며 세계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했다. 대회 MVP 영광도 안았다.
대한태권도협회 관계자는 “요즘 한국 선수들이 첫 국제대회에 나가면 극도의 긴장감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반면 박태준은 그랑프리 챌린지와 그랑프리 시리즈, 아시아선수권, 세계선수권 등 나가는 첫 대회마다 우승을 차지하는 강심장을 자랑했는데 첫 올림픽 무대에서도 그 강점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고 말했다.
강심장이 빛난 순간은 또 있었다. 박태준은 파리로 가는 길목에서 장준을 만났다. 올림픽 랭킹을 5위까지 끌어올리며 출전 자격을 얻었는데 올림픽은 한 체급에 한 국가당 한 명만 출전할 수 있어 3위 장준과 파리행 티켓 한 장을 놓고 마지막 승부를 벌여야 했다. 박태준과 장준은 지난 2월 제주에서 3전 2선승제로 대표 선발전을 펼쳤다.
당시 예상은 장준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선발전을 앞둔 상대 전적에서 장준이 6전 전승으로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기 때문. 박태준은 부모에게 이날 패하면 선수 생활을 그만둘 각오까지 했다고 말할 정도로 절박했다.
이날 박태준은 평소처럼 왼발을 앞으로 놓고 경기를 치르지 않고 오른발을 앞에 놓으면서 상대 허를 찔렀다. 한 달 동안 가다듬은 전략이었다. 상대가 당황한 사이 머리 공격을 연이어 적중하는 등 거센 공격을 퍼부으며 값진 승리를 거뒀다. ‘6전 7기’로 장준을 꺾고 파리행 티켓을 따낸 것이다. 박태준은 당시 “안세영 선수가 천적이라 불리던 천위페이를 결국은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고 큰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한국 태권도에 이번 대회 첫 금메달을 안긴 박태준은 6살 때 동네 도장에서 태권도를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엘리트 선수의 길을 걷게 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박태준은 “어릴 땐 승부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 그냥 재미있게 태권도를 한 것 같다”며 “순간 순간 상대 빈 곳을 찾아 때리는 것이 참 매력적이었다”고 했다.
박태준은 ‘이대훈 키드’로 불린다. 이대훈은 아시안게임 최초 3연패와 세계선수권 3회 우승에 빛나는 태권도 레전드. 초등학교 시절 리우 올림픽에서 이대훈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며 꿈을 키웠던 박태준은 이대훈을 닮고 싶어 이대훈 모교인 한성고에 입학했다.
박태준은 이대훈처럼 고교 3학년 때 처음 태극 마크를 달았다. 현재 박태준의 체급(58kg급)도 이대훈의 런던 올림픽 시절 체급과 같다. 이대훈의 별명이었던 ‘태권 V’를 잇는 ‘신형 태권 V’란 별명도 있다. 박태준은 “대회를 앞두고 이 코치님에게 원포인트 레슨도 받았다”고 했다. 나래차기와 돌려차기를 더 섬세하게 다듬었고, 발로 상대 공격을 차단하는, 이른바 ‘커트’ 요령도 배웠다.
박태준은 이번 대회를 앞둔 미디어데이에서 샛노란 소변이 안 멈추고 계속 나오는 꿈을 꿨는데 금메달을 암시하는 것 같다며 웃었는데 결국 꿈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박태준은 이날 금메달로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을 석권했지만 올림픽 우승이 없었던 이대훈 코치의 한을 대신 풀어줬다. 태권도 명문 경희대 선수로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임수정 이후 16년 만의 금메달이다. 박태준이 한국 태권도의 파리 올림픽 시작을 상쾌하게 알리며 뒤이어 나올 김유진(여자 57kg급)과 서건우(남자 80kg급), 이다빈(여자 67kg초과급)의 어깨도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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