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우 칼럼] 차세대 한국과 일본, 그 동력은?
지난해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36,194달러로 일본을 앞섰다고 한국은행이 발표했다. 일본의 30년 넘는 장기침체와 최근 엔화 약세가 주요 원인이지만, 한국 자신의 지속적인 발전이 더욱 중요하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한국 경제는 일본의 1/30에 지나지 않았다. 식민 통치 시기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양국 간의 경제 격차는 쉽게 메울 수 없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자국 항공모함과 전투기로 미국과 싸웠던 일본은 이미 선진사회였다. 정치, 경제, 문화, 과학, 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한국보다 훨씬 위였다. 대등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유독 한국인만이 일본을 하찮게 평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강한 반일 정책을 추구했다. 대만과 대조적이었다. 대만은 중국 본토와는 떨어져 있어서인지 반일 감정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일본의 유화적 통치 효과일 수도 있다.
조선에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명분으로 조선말을 못 쓰게 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고, 부락제(部落祭)와 같은 민속행사도 금하였다. ‘푸른 하늘 은하수’와 같은 슬픈 노래에 젖게 하여 독립 의지를 없애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의 정체성 회복을 중시하였다. 한국인이 일본어를 쓴다거나 일본문화에 젖은 모습을 보이면, 어느 제3자가 한국인으로 보겠는가? 일본인의 아류로 볼 뿐이다. 그래서 일본노래와 영화를 금하였다. 이승만의 반일 정책은 과거의 악연에 대한 보복이라기보다 새 나라를 제대로 세우기 위한 것이다. 일본문화 배격 정책은 그 후 정권도 이어갔다.
건국 이후 대한민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미국 중심의 해양 세력과의 협력이 필요하였고, 일본은 한국이 세계로 나가는 길목에 있었다. 반일 정서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통한 선진제도 도입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발전에 일본의 기여가 컸다.
정부 차원에서 일본과는 수많은 회담을 해야 했다. 교섭마다 일본이 우위였고, 한국은 약한 입장이었다. 대등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이 속임수를 쓰지 않나 하는 불신감이 커서,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밤을 꼬박 새운 뒤 새벽에야 합의에 이르는 패턴을 밟았다. 단어 하나 때문에 밤새우기가 일 수였다. 90년대 초에야 밤샘 교섭이 사라졌다. 상호 신뢰가 생겼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로 얻은 자신감 덕이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국교정상화를 매듭지었다. 그전 이승만 정부시기에도 여러 차례 국교정상화 교섭을 하였으나 파행으로 끝났다. 1953년 회담에서는 “일본 통치 덕분에 한국이 발전했다”는 일본 수석대표 구보다(久保田)의 망언에, 한국 측이 격분하여 회담장을 박차고 나왔다.
구보다 망언은 식민종주국의 우월감에서 나온 것이다. 그 후에도 망언들은 그치지 않았다. 1982년에는 교과서 파동과 함께 후지오((藤尾) 문부상의 망언이 불거졌다. 과거 일본 군국주의가 근린 제국에 입힌 피해에 대한 반성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국이 맨 앞에서 일본 정부의 그릇된 과거사 인식을 비판하였다. 중국과 다른 동남아 국가들이 뒤따랐다. 후지오는 결국 파면(罷免)되었다. 한국의 강력 항의로 일본 각료가 물러나는 시초였다. 80년대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미국보다 앞설 정도로 최정상이었다. 하버드 대학의 에즈라 보겔 교수가 ‘세계 최고의 일본(Japan as Number One)’이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과거사 문제는 쉽게 넘을 수 없는 역사적 유산이었다.
필자가 몸담았던 한국 외교부는 과거사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를 끈질기게 문제 삼았다. 과거사 문제야말로 협상 경험이나 국력이 월등했던 일본과의 수많은 교섭에서 양보를 끌어낼 한국의 비장 카드였다.
만일 일본이 전후 서독처럼 과거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한국은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웠고, 일본이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일본은 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거리낌 없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한편, 한일 간 문화회담을 열면 일본 측은 대중문화 개방을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한국 사회의 반일 감정을 완화하기 위해서다. 1982년에는 한국의 유명연예인 패티 김과 조용필을 초청하여 NHK 홀에서 음악회를 크게 열고 전국에 방영하였다. 많은 일본인이 한국 가수의 열창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일본 외무성은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와 같은 일본의 국민가수가 한국의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거나 일본의 상업영화를 상영하자고 요구하였다.
한국 측은 독일·프랑스의 예를 들어 반대하였다. 나치가 프랑스를 단 5년간 점령했는데도, 전후 독일인들은 프랑스에서 독일어를 쓸 수가 없었다. 프랑스인들은 독일 여행하면서 샹송을 자유롭게 불렀지만...
하물며, 조선의 문화를 말살하려 했던 일본이 대등하게 문화교류를 하자는 건 몰염치였다. 마치 헤비급 권투선수가 플라이급과 똑같은 글로브를 끼고 함께 경기하자는 거와 같다. 억압받고 파괴된 한국 문화가 원상으로 회복할 때까지는 보호 육성이 필요하다며, 대중문화 개방 요구를 거부했다.
이러한 금기를 풀어준 건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에서 일본 대중문화를 공식 개방하기로 합의하였다. 아직 이르기는 하였지만 일본 대중문화에 압도당한다는 공포감에서는 벗어난 시기였다.
젊은 한국의 연예인들이 일본 대중문화를 받아들이고 상호 교류도 적극적으로 벌였다. 나아가 북유럽 등의 음악을 수용하여 세계성까지 띠게 되었다.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오히려 한국의 대중문화가 일본보다 앞서게 되었다. 싸이, BTS, 뉴진스, 트와이스, 빅뱅 등 K-팝, K-문화가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인들이 국내에만 안주하려는 갈라파고스화 경향에 비하여 한국은 전 세계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가는 진취성을 보인 결과다. 일본인들이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문화에 안주하려는 성향도 작용한다. 한국 인구의 2.5배나 되는 일본의 연간 해외여행자 수가 1,700만 명 정도인 데 비하여, 한국은 2천만 명이 넘는다는 개방성이 돋보인다.
한국의 K-팝 문화는 한국적인 특성 외에도 세계성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포용한 셈이다. 그 옛날 유라시아 대륙을 말달리며, 요하(遼河)의 대평원에서 한(漢)족과 자웅을 겨루던 배달민족의 유전인자가 살아나는 게 아닌가?
이제는 한국 사회 전체, 특히 젊은 세대가 일본에 대한 심리적 열등감에서 졸업하였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시 한국인들은 약 8백억 원의 성금을 보냈다. 독립기념관 설립을 위한 성금의 두 배나 된다. 그렇게 일본을 극복하는 심리적 여유가 바로 한국 경제의 일본 추월로 나타난 것이리라.
다만, 일본에 대한 열등감을 벗어난 이 시점에, 뒤늦게 반일ž친일 프레임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건 시대착오가 아닐 수 없다. 노무현 정부 시절 총선거 에서 한국의 기득권 세력은 친일 세력이고, 자신들은 반일 애국 세력을 대변한다고 갈라치기 해서 압승을 거둔 적이 있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내거는 소위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호에 맞추어 반일 운동, 반미 운동으로 키우려 한다. 이제는 일반 국민도 윤미향 일행이 주도하던 반일 운동의 속셈을 모를 리 없다. 한미일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긴요한 시기에 종북좌파의 위험한 장난을 경계해야 한다.
김 석 우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전 통일원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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