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싸우거나 말거나, 우리는 귀신 잡으러 해병대 간다!
[아무튼, 주말]
내돈내산 군사훈련
해병대 캠프 인기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경찰 수사 결과 발표, 국회 해병대원 2차 특검법안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야당의 대통령 탄핵 청문회 추진... 이번 주에도 고(故) 채수근 상병 순직을 둘러싼 속보가 매일같이 쏟아지는 끝장 대치가 정국을 달궜다.
특검이 추모인가, 뭉개면 애국인가.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국민은 나름의 출구를 스스로 찾는다. 말 없는 채 상병을 두고 정치인들이 멱살 잡던 그 시각, 전국의 여중생부터 할아버지까지 수백 명이 해병대 홈페이지를 찾아 간절한 마음으로 신청 버튼을 꾹 눌렀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여름 해병대 캠프’다. 너희가 그러거나 말거나, 우린 거센 파도 헤치며 귀신 잡으러 간다 이거다. 안 되면 될 때까지,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내돈내산 군사훈련 하는 국민들
해병대 사령부는 매년 여름·겨울 방학 기간 경북 포항의 제1해병사단에서 민간인 대상 해병대 입영·훈련 체험 캠프를 연다. 전군 유일한 일반인 병영 체험 캠프다.
올여름 134차 캠프는 7월 29부터 8월 2일까지 4박5일간 열린다. 해병대는 “지난 8일부터 접수 기간을 닷새 뒀지만, 첫날 접수 창을 열자마자 모집 정원 300명이 다 찼다”고 밝혔다.
올해만의 현상은 아니다. 지난해 7월 19일 경북 예천에서 수해 실종자 수색에 나선 채 상병이 유명을 달리한 사고 직후 열린 캠프 때도 모집 정원이 하루 만에 다 찼다. 흉흉한 분위기 탓에 중도 포기자가 나왔지만 대부분 일정을 마쳤다고 한다. “당시 캠프에 채 상병 추모 빈소가 마련돼 묵념했다”고 한 참가자는 전했다.
대체 어떤 이들이 그 고되다는 해병대 훈련에 참가비(9만원) 내고 연차까지 내고 제 발로 찾아가는 걸까.
해병대에 따르면 참가자 80% 이상이 중·고교생이다. 해병대 출신 아버지·형·선생님의 추천으로, 부자(父子)나 친구끼리 모여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지난 1월 133차 겨울 캠프에선 최연소자가 15세 중학생이었고, 해병대 캠프에만 7차례 참가해 공로상을 받은 74세 노인도 있었다.
특히 참가자 중 여성이 약 25%로, 매년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연약한 여자는 되기 싫다”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여중생부터 해병대 부사관·장교를 지망하는 여고생 등 다양하다. 군에 간 남자 친구를 기다리는 20대 여성 ‘곰신’이나 어머니·누나가 체험해보러 오는 경우도 있다.
해병대 캠프는 신입 해병대원의 6주간 기초 군사훈련을 5일로 압축시킨 것이다. 사격과 총검술 등 무기를 드는 본격 전투 훈련만 제외하고 해병대의 필수 훈련 과목이 거의 다 포함된다.
상륙작전에 필수인 IBS(고무보트) 이동과 노 젓기, KAVV(상륙돌격장갑차) 체험, 전투 수영, 공수 하강, 암벽 라펠, 해안 뜀걸음 등 전투 체력 단련, 화생방 훈련, 야전 취사 등이다.
해병엔 특별한 매력이 있다
다만 미성년자와 여성, 고령자 등이 섞여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론 ‘순한 맛’이라고 한다. 폭염·폭우 등 악천후엔 실내 훈련으로 대체하고, 탈진 기색이 보이면 즉시 휴식하고 치료받을 수 있다. 전문 훈련교관과 해군 군의관들이 안전사고 등 응급 상황에 대비해 현장을 지킨다.
해병대 캠프 며칠 다녀와 무슨 귀신을 잡겠느냐고? 웃지 마시라,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빡센 군사훈련을 ‘내돈내산’ 받아보겠다며 염천(炎天)에 기차 타고 가는 국민은 진심이다. 적어도 상습적인 원격 참사 추모꾼들보단 진심이다.
“종일 딴생각이 안 나고 불면증이 단번에 나을 정도로 힘들더라” “인간 개조의 용광로”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국민 화합의 장”이라는 게 경험자들의 전언이다. “닷새간 훈련 중 휴대폰 사용이 금지돼 저절로 디지털 디톡스가 됐다”고도 한다.
2년 전 캠프에 참가한 여성 박모(24)씨는 “처음 보는 언니·동생들과 진흙에서 구르니 묘하게 경쟁이 붙다가도 금세 친해져 연락하고 지낸다. 괜히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 아니더라”고 말했다.
해병대는 해군 소속이지만 상륙작전이라는 특수 임무를 띤 부대다. 물과 육지 모두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특유의 고강도 훈련, 일거수일투족 호흡을 맞춰야 하는 문화에서 빚어진 독특한 전우애가 특징이다. 자원해 가는 소수 정예 부대인 만큼 명예와 자부심, 강고한 인맥을 자랑한다. 남성 사회에서 무시 못하는 점이다.
대학생 고모(22)씨는 “4급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마쳤지만, 왠지 아쉬워 작년 여름 해병대 캠프를 다녀왔다”고 했다. 캠프 마지막 날 해병대 상징인 빨간 명찰을 받을 땐 눈물이 핑 돌았다고.
특히 사춘기 청소년들이 해병대 캠프에 몰리는 것은 야외에서 단체 생활에 부대끼며 인내·도전·협동 같은 가치를 배우고 싶다는 동경이 크기 때문이다. 학업 경쟁 위주 교육 문화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몸을 쓰는 경험 자체가 희귀하고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해병대엔 “자녀가 초등학생인데 보호자와 같이 참가하면 안 되나” “어린이 해병대 캠프도 만들어달라”는 민원이 매년 들어온다.
IMF부터 파리올림픽까지
해병대 캠프는 1997년 ‘IMF 국난극복 극기체험’이란 이름으로 처음 시작됐다. 나라 위해 금 모으기를 하던 민족에게 인천상륙작전의 신화,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해병대가 내건 대국민 정신 강화 프로젝트는 적중했다. 4박5일 캠프를 4차례 모집, 총 1000명을 선발하는데 3000명 넘게 지원했다. 당시 프로그램에 한밤중 공동묘지 걷기와 헬기 공수 강하도 포함됐다.
해병대 캠프가 ‘지옥 훈련’으로 이름나자 기업과 공공기관, 학교 등의 단체 연수장으로 인기가 높아졌다. 어린이 단련부터 노숙자 재활, 고교 동창 모임과 주부 계모임까지 해병대 정신을 빌려보겠다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해병대 예비역 등이 만든 민간 사설 캠프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특히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폭침으로 안보 의식이 높아지고, 이듬해 배우 현빈이 해병대 전투사병으로 입대하자 전국의 해병대 캠프 참가율과 입대 지원율이 최고에 달했다.
그러다 2013년 7월 18일 충남 태안의 사설 해병대 체험 캠프에 참가했던 고교생 다섯 명이 파도에 휩쓸려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참사가 일어났다. ‘아카데미’ ‘리더십’ 같은 수식어를 붙여 성업하던 민간 해병대 캠프 200여 곳의 안전 관리 소홀과 가혹 행위 실태가 지적됐다. 당시 해병대가 나서 ‘해병대 캠프’를 상표 등록하며 사설 캠프는 싹 정리됐다.
진보 진영은 “이참에 군사 정권이 심어놓은 군사 숭배 문화와 병영 사회의 싹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극기 훈련을 표방한 어린이·청소년 수련회도 덩달아 구시대 유물로 사라졌다.
지난해 채 상병 순직 쇼크로 해병대 내 안전 문화와 군 지휘 체계에 의구심이 생기고 정국 뇌관으로 떠올랐지만, 해병대가 지켜온 가치를 향한 국민적 믿음은 여전하다. 지난 12월 대한체육회는 2024 파리올림픽에 출전하는 국가 대표팀 전용 해병대 특별 캠프 개설을 요청, 2박3일간 ‘원 팀 코리아’ 특수 정신·체력 훈련을 했다.
해병대 입대 지원 경쟁률 역시 예년 수준을 회복했다. 병무청에 따르면 2023년 7월 채 상병 순직 직후 접수된 11월 입영 대상 신병 지원자 경쟁률은 0.2대1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올 들어 다시 반등, 3~4월엔 2대1을 넘어섰다.
달콤한 위로와 휴식의 시대, 사람들이 여전히 해병대를 동경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촌스러워 보일까 입 밖에 내기 꺼려지는 것들 말이다. 땀, 인내, 도전, 극기, 협동, 단결, 노력, 열정, 정신 무장, 충성, 희생, 헌신, 영원, 동료애, 애국,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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