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兄思想

대마도는 왜 우리땅이 못되었나

太兄 2023. 4. 17. 20:47

대마도는 왜 우리땅이 못되었나

2017-09-28 00:45:47


權泰鳴의 紀行文 24
    『대마도는 왜 우리 땅이 못되었나?』

대마도(對馬島) 사람이 살기 시작한  언제 부터인지에 대해서는 일본학계에도 아직 정설이 없다. 뿐만 아니라 어디서  사람들이 지금의 대마  사람들의 조상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지금  곳이 일본 영토이고 일본의 고대유물이 조금씩 발견되고 있어 일본인 조상과 같은 뿌리가 아닐까 하는  일본역사학계의 추정이다.  문제의 해답에 앞서 일본인의 조상은 언제 어디서  사람들 인가에 대해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역사, 인류  고고학계는 일본열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를 대체로 지금부터 2만년 에서 12천년 전으로 보고 있다
 
도쿄대학 교수를 지낸 저명한 인류학자 하니하라 가즈로 교수는 그의 日本人の成り立ち(일본인의 성립)’에서 기원전 5-4세기부터 북방아시아계 집단이 한반도를 거쳐  규슈와 일본열도 본주의 서남  지역으로 건너왔다면서  집단을 도래인 이라고 불렀다. 하니하라 교수는 대륙지방사람들의 일본 이주는 추운 기후와 잦은 전쟁이 계기가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렵 일본으로 건너간 한민족의 규모도 크게 증가했으며 이들이 지금의 오사카를 비롯하여 교토와 나라 일대인 기나이(畿內)지방으로 진출하여 뒤날 야마토조정의 기반구축에 크게 기여 했다는  일본 역사학계기 인정하고 있다. 동북대학의 세키 아키라 교수도 그의 歸化人(귀화인)’에서 고대 한민족 도래인이 일본인 조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단정하고 있다  같은 추정은  대마인의 얼굴 길이와 폭의 지수, 그리고 혈액형 측면에서 한민족에 가장 가깝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  근거하고 있다
 
대마에는 중심마을인 이즈하라에 있는 조선  산성인 가나다성을 비롯하여 고분과 불상, 스에키 토기  각종  제품과 마구  한반도에서 건너갔거나 대마에서 한민족 도래인들이 만든 유적과 유물이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선사시대부터 대마에 한민족이 거주한 증거는 대마 전역에서 만날  있다. 대마향토사학자인 나가도메 히사에씨는 그의 古代歷史の鍵. 對馬(고대역사의 열쇠. 대마)’에서 머리 길이와 폭의 지수로 보아 대마인의 상당부분이 한민족에 가까우며 또한 분묘의 형태도 야요이시대의 대마 묘제는 대부분 석관이 특징인데 이러한 매장방법은 한반도, 특히 가야지방에서 유래된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가도메씨는  야요이시대 중기의 석관에서 출토된 한반도식 세형동검과 야요이 후기유적에서 나온 청동제 마탁과  팔찌, 흙으로 구운 토사기 등은 모두 한반도 도래인들이 휴대했던 것으로 확인됐으며 특히 세형동검의 경우 고대에 부족의 수장이나 호족들만 사용했기 때문에  같은 사실은 한민족 도래인이 대마의 지배층을 형성했음을 입증하는 예라고 밝혔다.
 
도쿄대학의 하니하라 가주로  에가미 나미오 교수를 비롯한 일본고대사를 연구하는 많은 역사학자들은  “문화의 층위적 측면에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위계에 속하는 아이누 족과 한반도에서 건너간 대륙계인 한민족 도래인 과의 사이에 태어난 종족이 일본인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하니하라교수의 일본인 이중구조론 바로   인종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학설이다. 35대까지 이어진 대마 도주가문인 ()씨족의 시조가 1세기 중엽 일본 최초의 무인정치시대를  헤이케(平家) 후손이라는 설과 황실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는 설이 있으나 4세기 전후 고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인인 하타()씨족 가문에서 갈라져 나간 고래무네(惟宗)씨족의 직계라는 주장이 유력한 설로 제기되고 있다.    

 

일본학계는 위와 같은 학설을 근거로 대마 사람들의 조상은 한반도 도래인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기원전 한반도에서  규슈로 항해할 경우 거의 대부분 대마를 거쳐갔으며 대마에는 이를 증명할 유적과 유물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위지왜인전도 3세기  한반도의 선진문화가 대마도를 거쳐 섬나라인 일본에 전수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對馬라는 지명에 대해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일찍이 대마는 조선반도와 왜지(倭地) 사이에 일의대수(一衣帶水)  정도로 요지였다 기록이 있다며 조선과 일본을 연결하는 요충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많은 일본 역사학자들은 당시 한반도로부터 사람과 문물이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달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마도향토사학자인 나가도메 히사애(永留久惠)씨는 규슈와 한반도 사이의 해협은  옛날부터 한반도의 선진문화가 일본으로 유입되는 중요한 항로이다.  때는 일본인들이 바다를 건너 조선이나 중국으로   아니고 대륙으로 부터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주장하고 있다. 위지왜인전에도 조선반도 남부의 구야간코구(狗邪韓國)에서 사람들이  대마로 건너 갔으며 잇키섬과 마쓰우라에 상륙했다 기록돼있다. 구야긴코구는 가야를 말한다. 일본에 국가형태를 갖춘 야마토조정이 등장한 때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이며  이전엔  많은 부족 단위의 집단이 난립했다. 3세기 초까지만 해도 민족과 국경의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나 태평양의 섬에서 일본으로 이주하는 데는 어떠한 규제도 없었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경우 교통수단은 뗏목 이었으며 한반도 이주민들이 대마도에 정착한 것도 온난한 기후에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인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對馬라는 지명은 대마의 위치가 바다 건너 편에 있는 조선반도 남부의 마한(馬韓) 대립 또는 대비된다는 의미에서 대마(對馬) 쓰였다는 설과  개의  이라는 우리 말에서 유래 됐다는 설이 있다. 대마를 일본말로 쓰시마 라고 부르는데  우리 말의 라는 말에서, 그리고 시마()’  의미하기 때문에 쓰시마 우리말로  개의  말한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부산에서  대마는 섬의 중앙에 해당하는 아소만 부근이 연결이 끊어져 우리나라에서는  개의 섬으로 보인다.               필자:前동아출판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