功七過三
-현대사
2016-02-03 20:32:37
칭찬 좀 하자(功七過三)
古稀를 넘긴 從心所欲不踰矩의 나이인 나는
요즘 세상을 유유자적하며 물흐르듯 구름 떠가듯 살고 있다.
나이 70을 從心이라고 하는데,
논어 위정편을 보면
칠십에 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고 했다.
이말은 "마음이 하고자 하는 데로 하더라도 절대 법도를 넘지 않았다"는 뜻이다.
종심의 언덕 가운데에 올라 선 우리 고교동창 십여명은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반이면 분당구청 뒷켠에서 만나 분당천을 걷는다.
이름하여 '牛步會'라고 하는데 그저 산책이다.
정해진 회원은 없고 오고 싶으면 오고 사정이 있으면 못 온다.
안 온다고 챙겨 주는 친구도 없다.
분당, 수지, 죽전에 사는 친구들이 주축이 되어 강남이나 용산 등
서울에서도 불원천리하고 넘어 오는데
많을 때는 15명 적을 때는 8명 정도가 모인다.
회장이 성가신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회비란 것도 없고
그날의 점심 값은 돌아가면서 자청해서 책임 진다.
참가자가 많으면 점심값이 많이 나오지만 신경쓰는 친구가 없다.
식사장소는 율동공원 변에 있는 '홍천한우곰탕'집으로
KBS2에 맛집으로 소개되기도 한 조그만 식당이다.
30명이 오면 전세를 내야한다.
40대 주인 여사장이 친절하여 우리를 기쁘게 한다.
어느 때 가보면 손님은 우리뿐이다.
아페타이져로 계란후라이를 주는데 오늘은 왠일인지 오징어 부침개를 내 놓은다.
이건 최소한도 만원은 받아야 하는데 3접시나 서비스로 준다.
오늘 불참한 친구는 손해, 후회막급일 것이다.
등산은 힘에 부쳐 경관이 수려한 분당천(4월 중순이면 벗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이 사진은 모두 작년 분당천에서 찍은 것들이다.)을
한 시간 정도 걷고 점심을 먹은 다음 서양화가 전시되는 단골예술다방에서
노닥거리다가 저녁까지 먹고 헤어기도 한다.
고교동창 등산회는 아직도 건재하지만 하나 둘씩 우보회로 넘어 오고 있다.
강남역에서 신분당선을 타고 우보회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가하는 친구,
B가 오늘 아침에 지하철에서 귀 담아 들 만한 얘기를 엿들었다고 전했다.
그 친구는 예의 경로석에 앉았는데 옆에 두 사람은
경로석에 앉을 자격을 갖 얻은 60대 중반 같았다는 것이다.
얘기의 요지인즉
"사람들은 남을 헐띁기를 좋아하는데
'그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즉 좋을 면이 49%이고 나쁜 면이 51%면
"그 친구는 나쁜 놈이야"라고 해도 돼지만
그 반대로 좋은 면이 51%이고 나쁜 면이 49%이면
나쁜 사람이라고 해서는 않된다는 얘기였다.
공칠과삼(功七過三)이란 말이 있다.
功이 7이고 잘못이 3이란 뜻이다.
즉 공과 잘못을 함께 했는데 그 중 功이 더 크다는 뜻이다.
이 말은 그 말 그대로 공과 잘못 중 공이 더 크다는 말로도 쓰이지만
잘못된 부분만 보지 말고 긍정적인 부분을 보라는 속뜻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최고 실력자가 된 덩샤오핑(鄧小平)이
사망한 마오쩌둥(毛澤東)이 격하운동에 휩싸일 때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중국의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문화혁명(文化革命)의 실패를 들고 나와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과 격하운동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때 그 문화혁명의 최대 피해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이
공칠과삼(功七過三) 즉 과오보다는 공이 많다는 논리를 내세워서
'마오쩌둥의 과오에는 내 과오도 있다.
그 과오는 내가 앞장서서 바로잡아 나가겠다'며
마오쩌둥을 감싸줌으로써
자칫 마오쩌둥 격하 운동으로 중국 전국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구출했다.
즉, 중국이 격하 운동으로 밑뿌리부터 흔들리려는 중국 공산당의 정체성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정통성을 흔들리지 않고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중국이 안정을 유지하고 덩샤오핑 식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단점과 약점 그리고 너나없이 공도 있고 과오도 있다.
公人의 경우 이 공과(功過)를 분명히 가려서 공정한 평가를 내려
후세에 전하는 것이 국가발전과 역사의 교훈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마오쩌둥의 실패작인 문화혁명은
완전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명분으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노림수였다.
문화혁명은 완전한 중국식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중국의 과거의 가치를 부정했었다.
책을 불사르고 과거 중국의 큰 가치였던 공자를 무너트리기 위해
그의 묘를 파헤쳤다.
이런 어리석은 행태가 중국의 발전을 30년 뒤처지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과오를 덩샤오핑은 끌어안았다.
덩은 마오의 과오는 내가 앞으로 보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왜? 우리는 저렇게 못할까?
지금 한참 논란이 되고 있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이야기를 하고 싶다.
과연 그가 國父인가? 국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승만 전 대통령은 4.19 혁명 당시
"젊은 학생들이 불의를 보고 항거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더러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라고 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리하겠다"라며
아무런 저항시도없이 그 대통령 자리를 훌훌히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한마디로 역사의식과 자기 판단이 뛰어난 지도자였다.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이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대통령에게
"나는 필리핀 경제를 따라잡는 것이 목표입니다"라고 말 한 적이 있다.
당시 동남아 나라들이 우리보다 잘 살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1인당국민소득이 90달러였는데 북한은 350달러였다.
70년대 초까지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립보다 높았다.
이식위국(以食爲天) 즉, 사람 먹는 것이 하늘이라고 했다.
그 가난을 이겨내고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이 28,000 불이 되었다.
독재라는 평가도 받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력의 덕분이다.
이승만, 박정희 두 분 다 검소했고, 가족 관리를 잘 해서 가족 추문이 없었고,
돌아간 후 개인저금 통장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에서 병원 입원비가 없어 교민의 도움을 받았다.
평가는 당연히 받고, 과오는 고치고, 잘 한 것은 장려해야 한다.
그러나 갈라져서 서로 악담과 험담이 오고가고,
마치 원수같이 지내지 말아야 한다.
품어 안으려는 그릇이 없다.
그것은 낭비고 분열이고 또 다른 과오가 탄생한다.
중국의 등샤오핑 같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의 너그러운 지도력이 이 땅에 발휘되기를 기대한다.
한상진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이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부’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해
급상승하던 '국민의당'의 지지도가 답보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國父란 무엇인가?
'국부'란 비유적 표현으로
나라의 아버지 또는 나라를 만든 아버지 같은 인물이라는 뜻이다.
중국은 쑨원(손문)을 이의없이 국부로 받들고 있으며
프랑스는 드골, 미국은 국부(Father of Nation)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건국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을 흔히 쓴다.
아브라함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첫 부분에
‘87년 전 우리 아버지들(our Fathers)’이라고 언급한 사람들이다.
대영 독립전쟁 발발 1년 뒤인 1776년
‘독립선언문’과 이듬해 제헌의회의 건국헌법 기초작업에 헌신한 주역들이다.
독립전쟁을 이끈 전쟁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은 물론이고,
존 아담스,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알렉산더 해밀턴 등 많은 사람이 포함된다.
이승만 박사는
1919년 상해임시정부(정식명칭;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며
1948년에 수립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다.
따라서 당연히 임시정부던 대한민국이던 나라를 건국한 사람이다.
그가 없었으면 대한민국이 UN의 승인을 받아내지 못하고
소련과 미국의 신탁 통치 하에 시달렸을 것이며,
6.25한국전쟁 때
낙동강까지 밀리어 결국 오늘 날의한국은 공산화가 되었을 것이다.
영어와 외교에 능한 이승만 대통령은
깊은 잠에 빠진 트르만 미국 대통령에게 UN군의 참전을 요청했고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에게
미군의 개입을 요청하여 괴뢰군의 부산 함락을 저지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공성과 수성을 다 한 것이다.
휴전협정을 하게 되자 분개한 그는 미국으로 달려가
미국 상.하원회의장에서
미국 국회의원들ㅇ을 꾸짓는 명연설은 역사에 기리 영원히 남는다.
당시 미국 의원들이 꼼짝도 못했다고 한다.
동방의 이 작은 신생국가 대통령으로써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가 아니면 아무도 하지 못했을 쾌거다.
거제도에 수용된 반공포로를 UN군 사령관과의 아무런 협의 없이
극비밀리에 석방한 것은 그가 인권주의자라는 것을 웅변으로 대변한다.
따라서 그는 독재주의자라기 보다는 민주주의자이다.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 대통령과 백성을 가난에서 구제한
박정희 대통령은 마땅히 재평가받아야한다.
옛말에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을 역사상 어느 왕도 하지 못한 이 철옹성을 깨버린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며 왠만하면 집한칸과 자가용은 다 가지고 있고
해외여행도 즐기는 것이 다 누구 덕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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