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양

미국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 <애국주의> 외3.

太兄 2026. 4. 7. 20:13

■ 미국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 <애국주의>

2026년 4월 3일, 이란 혁명수비대의 촘촘한 방공망을 뚫고 저공 비행하던 F-15E 스트라이크 이글 전투기가 불뿜는 미사일에 피격당했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기체는 화염에 휩싸였고, 두 명의 조종사는 사막 한복판으로 비상 탈출했다. 한 명은 추락 직후 신속히 구조되었으나, 나머지 한 명의 행방은 묘연했다. 이란 당국은 즉시 실종 조종사의 목에 6만 달러
(한화 약 8천만 원)라는 파격적인 현상금을 내걸었다.

라디오와 SNS를 통해 "미군 조종사를 생포하는 자에게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선전이 사막 전역에 울려 퍼졌고, 현상금을 노린 혁명수비대와 무장 세력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수색망을 좁혀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미군은 올인(All-in)을 선택했다.
구조를 위해 투입된 UH-60 블랙호크 헬기는 이란군의 집중적인 지상 사격에 노출되어 기체가 피격되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처했다. 조종석 계기판이 경고음을 울리고 대공포탄이 헬기 주위를 스쳐 지나갔지만, 구조팀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적진 깊숙한 곳에서 홀로 고립된 전우의 거친 숨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흐르는 한, 후퇴는 없었다. 결국 미군은 현상금 사냥꾼들보다 단 몇 분 먼저 조종사를 찾아냈고, 빗발치는 포화를 뚫고 그를 하늘로 끌어올렸다.

어떤 희생과 비용이 들더라도 자국민을 반드시 구출해 내고야 만다는 이 집요함! 미국이라는 거대한 엔진을 움직이는 가장 뜨거운 연료는 바로 "단 한 명도 남겨두지 않는다(Leave no man behind)"는 철칙이다. 이게 바로 다인종·다문화 사회를 하나로 묶는 미국식 애국주의(Patriotism)의 실체이자 국가의 존재 이유다.
미국식 애국주의의 진면목은 화려한 승전보가 아닌, 고요한 활주로 위에서 완성된다. KBS 미국 특파원 시절, LA 국제공항(LAX)에서 목격한 한 장면은 국가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웅변하고 있었다.

6.25 전쟁터에서 산화하여 차가운 이국 땅에 잠들어 있던 미군 용사의 유해가 반세기를 훌쩍 넘겨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날이었다.비행기 문이 열리고 성조기에 싸인 유해함이 모습을 드러내자 활주로는 정적에 잠겼다. 그곳에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구부정한 허리로 남편을 기다리는 100세의 흑인 노파가 있었다. 그녀는 70년 전, "꼭 살아서 돌아오겠다"며 떠난 젊은 남편의 마지막 뒷모습을 가슴에 묻고 평생을 홀로 버텼다.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거릴 세월이었지만,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어제 일처럼 뜨거웠다.

놀라운 것은 국가와 시민들의 반응이었다. 지역 방송사 ABC 뉴스는 이 용사의 귀환을 정규 뉴스보다 우선하여 무려 3시간 동안 전 과정을 생중계했다. 유해를 실은 운구 차량이 묘지로 향하는 고속도로, 그 거대한 행렬 주변의 모든 차량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갓길에 멈춰 섰다. 운전자들은 차에서 내려 모자를 벗고 가슴에 손을 얹었으며, 경찰 오토바이 수십 대가 전조등을 켜고 최고의 예우로 호위했다. 안장식에는 시장과 지역 유지들이 빠짐없이 참석해 이름 없는 용사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반세기가 흘렀어도 "당신을 결코 잊지 않았다"는 국가의 약속이 실현되는 순간, 묘지 주위를 둘러싼 각기 다른 피부색의 시민들은 하나의 '미국인'으로서 무언의 동질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미국 사회에서 제복 입은 영웅들에 대한 존경과 존중은 인위적인 교육의 산물이 아니라,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문화적 토양이다. 어느 국내선 여객기 안에서 목격한 장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탑승이 한창이던 프레스티지석에 한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그때 앳된 얼굴의 젊은 병사 한 명이 무거운 군장을 메고 좁은 이코노미석 통로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노신사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병사를 불러 세웠다. "자네, 이 자리에 앉게나. 당신들이 우리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니, 이 정도 자리에 앉는 것은 당신에게 마땅한 권리일세." 노신사는 자신의 비싼 좌석을
병사에게 내주고 좁은 뒷좌석으로 향했다. 놀라운 것은 주변 승객들의 반응이었다. 누구 하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미소와 박수로 노신사의 선택에 화답했다.

이러한 풍경은 일상의 식당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제복을 입고 식사를 마친 군인이 계산대에 서면 점원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이미 저쪽 테이블 손님이 계산하고 가셨습니다. 당신의 서비스에 감사드립니다." 이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이들의 태도다. 너덧 살 먹은 꼬마들이 군인을 보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달려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서툰 경례를 붙인다. 그러면 병사는 식사 중이더라도 즉시 일어나 절도 있는 답례 경례를 보내며 아이의 눈을 맞춘다. 이것은 단순히 예의를 가르치는 것을 넘어,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가치가 세대를 거쳐 어떻게 심장으로 전수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뜨거운 교육의 현장이다.

2012년 9월 11일, LA 다저스 구장은 거대한 거울이 돼 미국인의 심장을 비추고 있었다. 테러 비극으로부터 11년이 흐른 날, 야구장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장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성당으로 변모했다. 경기 직전, 외야 전체를 뒤덮는 초대형 성조기가 서서히 펼쳐졌을 때 다저스 구장을 가득 메운 4만 관중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그 성조기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이들은 당시 구조 현장에 투입됐던 소방관과 경찰관들이었다.
그들의 거친 손마디가 성조기를 팽팽히 당길 때, 장내 아나운서가 국가(國歌)의 시작을 알렸다. 4만 명의 목소리가 하나로 뭉쳐 "The Star-Spangled Banner"를 제창하자 야구장은 거대한 진동에 휩싸였다.

투수 류현진 선수를 취재하러 간 기자석에서도 심장 박동이 귓가에 들릴 만큼 강렬한 전율이 느껴졌다.
압권은 노래의 절정에서 시작됐다. 머리 위로 굉음을 내며 대열을 맞춘 전투기들이 경기장 상공을 가르는 애도 비행을 선보였고, 전광판에는 순직 소방관과 경찰관 400 여 희생자들의 이름이 하나씩 새겨졌다.
피부색도, 태생도 다른 거대한 관중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우주적 통합>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는 이런 현상을 시민 종교(Civil Religion)라고 분석했다. 성조기라는 상징과 국가라는 노래 아래, 파편화된 개인들이 미국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용해되는 순간이다. 이 거대한 서사는 단순히 애국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왜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정서적 답안지를 제공하고 있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마지막, 숨을 거두는 밀러 대위가 라이언에게 남긴 유언은 "Earn this(가치 있는 삶을 살아라)"였다. 이 짧은 문장은 국가의 헌신이 개인의 가치 증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도덕적 선순환>의 핵심을 관통한다.
국가가 단 한 명의 국민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신뢰를 줄 때, 시민은 자신이 누리는 자유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미 지불된 삶> 임을 깨닫는다. 개인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가치 있는 인생을 일궈내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희생에 보답하는 가장 적극적인 응답이다.

한국 사회 역시 보훈을 금전적 보상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승인(Social Recognition)의 영역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일상 속에서 제복 입은 이들에게보내는 진심 어린 박수가 문화적 토양으로 뿌리내릴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통일 시대와 다문화 사회를 지탱할 도덕적 결속력을 얻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매 순간 스스로에게 자문해야 한다.

나는 오늘, 그 희생의 무게에 걸맞게 살아가고 있는가?
박영환 前  KBS 기자 

 

초대 경제수석비서관 신동식 박사 이야기

오늘 이야기 하고자 하는 신동식 박사 이 분은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부산항에서 거대한 미국의 화물선을 보고 우리도 저런 배를 만들수 있지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서울대 조선공학과에 입학하여 졸업을 했으나, 취직자리가 없어 전 세계 유명한 이름을 가진 선박회사에 편지를 보냈는데 ...
스웨덴 선박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거기 갔는데, 견딜 수가 없어 영국으로 건너가 로이드 선급협회 검사관으로 취직이 되어 근무하던 중에 1961년 가을에 미국에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와 있던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불려가 보니.

임자! 
조국의 조선 발전을 위해 나 하고 함께 일해 봅시다. 그러시면서 그냥 바로 한국으로 갑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너무 당황하여 얼른 대답을 못하고, 영국 회사에서 해결할 일도 있고 하니, 며칠만 말미를 달라 해서 영국으로 돌아가 고민 끝에 조국의 지도자가 부르는데  안갈 수도 없고 또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 밖에 안되는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생각해서 라도 내가 할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가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귀국 날짜를 청와대에 보고를 하니, 도착한 날 김포비행장으로 비서실에서 차를 가지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청와대  초대 경제 수석비관이 되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기안하고 조선사업 발전계획을 기안하는 등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동식 박사에게 부산에 있는 대한조선공사에 가서 조선사업을 할수 있는지 알아 보라고 해서 내려가보니, 배 한척도 만들지 못하는 황무지가 되어 있더라고 합니다.
거기서 제초작업만 실컷 하다가 그일을 그만두고 거제도에 "옥포조선소" 를 건립하자고 건의하여 지금의 옥포조선소를 탄생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정주영 회장이 울산에 현대조선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옥포 대우조선과 울산 현대조선이라는 쌍두마차를 끌게 된 것입니다.

박대통령께서는 원래는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 사업을 해보라고 권했는데 겁을 먹고 못하다가 신동식 박사가 옥포조선소를 만드는걸 보고 마음이 움직인 정주영 회장이 프로젝트 하나를 울산으로 가져가 현대 조선소를 설립한 것입니다.
신동식 박사는 지금도 현역입니다. 
한국 해사기술 협회장과 카본 코리아 회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1965년 10월 초, 미국 존슨 대통령이 3주 후에 방한 한다며 한국에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필요한걸 요청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청와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무엇을 요구 할까를 토의 하였는데, 한강에 "존슨 브릿지(교량) 를 세우자, 여의도에  존슨 타워를 세우자는 등 여러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 때 신동식 경제수석 비서관이 박대통령에게 "기초과학연구소" 를 세우자고  건의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괴학자도 없는데 연구소를 지어서 어느 세월에 본전을 뽑느냐 고 투덜거렸습니다.
신동식 박사는 박대통령에게 백년이 걸려도 연구소를 지어야 합니다.
남의 나라에 돈도 빌려보고 기술도 도입해 봤지만, 결국은  남의 심부름꾼 밖에 못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기술로 우리 것을 만들어 팔아야 잘 살 수가 있습니다." 라고 설득하였습니다.
한참을 듣고 있던 박대통령은 신동식 박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원조 금을받아 지금 성북구 하월곡동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설립한 것입니다.
아무려면 존슨 대통령이 자기를 기념해 달라고 선물을 준다고 했겠습니까?
신동식 박사는 이렿게 말합니다.
베에토벤이 불후의 명작 "운명의 교향곡" 을 남길수 있었던 것은 그를 후원한 귀족들, 악보를 멋지게 연주한 음악가 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우리가 오늘 날 과학기술 강국이 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 반열에 올라 선 것은
박정희라는 탁월한 혜안을 가진 지휘자가 있었고, 24시간 연구실에 불을 밝히고 있었던 과학자들이 작곡을 잘하고 이병철과 정주영 같은 사업가들이 연주를 잘 해 주었기 때문 이었다고.

70년 대에 박정희 대통령은 매달 월간 경제동향 보고 회의를 주재 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경제지표를 챙기니, 열심히 안 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작품을 만들어 내면 교수 평가단이 평가하여 대통령 앞에서 강평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까다롭게 굴었던 분이 남덕우 교수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박대통령께서 남덕우 교수를 재무장관에 기용하고 임명장을 주면서 남교수 정부 정책에 꼬장꼬장 따지더니, 한번 당해 봐라! 하면서 껄껄 웃었다고 합니다.
박대통령은 과학자들이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도 평가교수단에서 반드시 평가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1966년 부터 1969년 KIST(한국과학연구소)가 설립되기 까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과학자 30명을 조국의 기술 발전에 동참 하자고 설득하여 1차로 귀국 시켰습니다.
그 사람들은 미국에서 안전한 삶이 보장된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한 조국의 발전을 위해 기꺼이 응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태규 박사와 최형섭 박사가 발 벗고 나섰습니다.
물론 그 작업은 박정희 대통령이 지휘봉 을 잡고 전폭적으로 지원 해서 이루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뒤에 다시 100명의 과학자들이 더 귀국하여 연구소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지금 전세계 바다에 떠 있는 30만톤급 이상 배의 85%가 메이드인 코리아 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현대조선과 대우조선이 만들어 낸 작품들입니다.
최근에는 대만까지 무인운전 선박 시험운행까지 성공하였습니다.
양철 조각 하나 만들지 못하던 나라가 불과 몇십년 만에 세계 최고의 조선국가 라는 자리에 우뚝 선 것입니다.
신동식 박사는 2003년도에 조선 건조량, 수주량 등 분야에서 세계 1등 국가가 되었을 때 국내외에서 받은 상장을 들고가
동작동 박대통령 묘지 앞에 올려놓고 "대장님!
그리도 원하시던 미래의 조선기술이 세계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라는 보고를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577년전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 셨다면, 50년 전에는 과학기술 혁명을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또 ...
K9자주포와 K2전차, T50항공기를 수출하는 방위산업 국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도
박정희  대통령이 닦아놓은 과학기술 혁명의 결정체들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화이팅!

 

🌄95세, 워랜버핏(Werren Buffett)의 명언.

🛑1).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보다 자신에게 더욱 더 엄격해져야 한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귀찮아도 많이 걷고,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2). 생활의 외로움은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다.
외로움은 노인에게는 공통의 운명이자, 최대의 고통일 것이다.
매일 함께 놀아주거나 말동무를 해 줄 사람을 늘 곁에 둘 수는 없다.
목표를 설정해서 노후에 즐거움을 주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3).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거짓으로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
"됐어" 라고 사양하면, 젊은 세대는 주지 않는다
"나도 먹고 싶은데 하나씩 돌아가나?" 라고 말해야 한다.

🛑4). 같은 연배끼리 사귀는 것이 노후를 충실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노인에 있어서 정말로 상대가 되어 줄 수 있는 상대는 노인 뿐이다.

🛑5).즐거움을 얻고 싶다면,돈을 아끼지 말아야한다
무엇인가를 얻고 싶으면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6).혼자서 즐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나이가 들면, 친구도 한사람 한사람 줄어든다.
아무도 없어도, 어느 날 낯선 동네를 혼자서 산책할 수 있는 고독에 강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7).돈이면 다라는 생각은 천박한 생각이다.
돈은 노후에 중요 하지만, 돈이면 다라는 생각은, 세상을 너무 황량하고 냉정하게 만든다.

🛑8).노년은 어떠한 일에도 감사의 표현을 할 줄 알아야 한다.
훈훈한 노후를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감사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인생이란 없다.

🛑9).나이들어도 컴퓨터, 스마트폰 등 새로운 기계 사용법을 적극적으로 익혀야 한다.

🛑10).노년의 몸가짐과 차림새를 단정히 해야 한다.
체력이 떨어지고 건강이 약화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자세가 흐트러진다.

🛑11).매일 적당한 운동을 일과로 해야 한다.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12).여행은 많이 할수록 좋다. 여행지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어디서 죽든 마찬가지이다.
고향에서 죽는다 해서 무엇이 좋은가?
자필의 화장승낙서만 휴대하고 다니면 된다.

🛑13).관혼상제, 병문안 등의 외출은 일정 시기부터 결례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부터 기도하는 것이다.

🛑14).재미있는 인생을 보내었으므로 나는 언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로 늘 심리적 결재를 해 둔다.

🛑15).유언장 등은 편안한 마음으로 미리 준비해 둔다.
사후에 유산을 둘러싸고 남은 가족들이 다투는 것보다 비참한 일은 없다.

🛑16).죽음은 두려운 것이지만, 죽는 것은 한 번 뿐인 것이고,대부분의 병은 잘 낫지 않는다.
병을 친구로 삼는다.

--🌼.이순신(李舜臣) 장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은 1545.4.28 이고 순국일은 1598.12.16 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놀랍게도 일제시대 이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 이었습니다.
실제로 역사학자들만이 고려조 3명 (박병묵, 최필달, 지용수) 조선조 9명 (조영무, 이준, 남이, 구인후, 정충신, 이순신, 김시민, 이수일, 김응하)의 忠武公(충무공)중 1인 정도로 알았을 뿐입니다.
조선인들도 존재 자체를 모르고 땅속에 묻혀있던 이순신 장군을 살려낸 사람은 아이러니 하게도 일본인입니다.
110여년전 일본은 대마도 해협에서 세계 최강인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궤멸시킵니다.
러일전쟁은 동양의 대국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간 전쟁으로 평가됩니다. 러일전쟁을 승리하고 일본은 동경에서 승전파티를 크게 열었습니다.
러일전을 승전으로 이끈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그 파티의 주인공 이었습니다. 천황도 잠시 다녀간 축하연이니 뻑적 지근했을 파티입니다.

도고는 우리의 이순신처럼 일본 제1의 전쟁 영웅으로 일본에선 지금도 軍神(군신)으로 추앙받는 유명한 장군입니다.
그 파티에서 도고에게 헌사가 이어졌는데, 어느 참의원이 “도고제독은 가히 영국의 넬슨 제독이고 조선의 이순신 장군입니다.”라며 축하했습니다.
이에 도고제독이 “나에게 영국의 넬슨과 비견됨을 稱讚(칭찬)함은 감당 할만하다 하겠으나, 감히 이순신 장군과 비견됨을 내가 어찌 감당 하겠습니까?
나는 이순신장군의 신발끈도 묶지 못하게 미미할 뿐입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후로 도고가 말한 “00사마의 구두끈도 묶지 못한다”는 말은 일본인들이 겸양을 말할 때 흔하게 사용하는 숙어가 되었습니다.

사실 일본의 이순신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다양하고 깊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연구자료가 방대합니다.
일본은 이순신과 왜군의 전투상황을 아주 세밀하게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이순신 장군의 전술 전략을 실로 바늘귀를 꿰듯이 연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일본 해군들은 얼마나 상세하게 이순신을 연구했겠습니까?
깊은 연구 끝에 그들은 이순신장군의 神妙不測(신묘불측)한 전략전술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도고 역시 이순신 연구에 정진하여 이순신 장군을 마음 속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는데 어느 의원이 자신을 이순신에 비견하니 화들짝 놀라서  "감히 내가 감당 할 수 없는 분"이라며 손사래를 친 것입니다.
도고가 이순신의 위대함을 어떤 모임에서 설파했는데 그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와 넬슨은 전국가적으로 일치단결된 지원을 받아 전투에 임하여 뒷걱정 없이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왕의 끝없는 의심과 동료 장군의 끝없는 음해를 받아 모진 고문을 당했고, 정부의 아무런 지원이 없는 가운데 백의종군하는 등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辛苦(신고)의 고통 속에서도 23회의 전쟁을 완벽하게 승리로 이끈 장군입니다.
나와 넬슨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戰神(전신)입니다."라고 극찬하며 말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아들과 함께 순직하는 순간에도 "나의 죽음을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라고 하면서 끝까지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지요.
도고의 그 발언은 즉시 조선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그후 일제 때 조선인 식자들에게 이순신 장군에 대한 숭앙이 이루어졌고, 든든한 마음속 영웅으로 간직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일본 식자층에서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의 念(념)을 숨기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은 일본의 개화를 이끈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등 자국을 패퇴한 적국의 장군이라도 존경할 영웅은 존경합니다.
이러한 면은 우리들과 좀 차별화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일본 육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전술에 대해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마음 속에도 이순신 장군에 대한 남다른 존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박정희 장군이 대통령이 된 후 아산의 현충사와 통영의 제승당을 정비하는 등 이순신장군에 대한 대대적인 숭모를 추진한 것입니다.
결론으로 우리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1차로 일본인 '도고'가 어둠속에서 일으켰고, 2차로 박정희 대통령의 숭모로 빛을 발하게된 것입니다.
의심과 음해를 끝없이 자행하던 선조같은 통치자가 이제는 더 이상 우리나라에 또 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 대한민국의지도자나 역사학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을 이기적으로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며 왜곡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매국노적인 역사의식을 바로 잡아 올바른 민족정신과 국가관을   확립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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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미동맹연합회
        총재,이사장 조 성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