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釋迦)
종교
2015-01-16 23:18:05
석가(釋迦)
安 秉 煜 (崇實大 名譽敎授) −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피해야 할 두 가지의 극단(極端)이 있다.
하나는 향락(享樂)에 몰두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고행(苦行)에 전념하는 것이다.
외도(外道)로 가지말고, 중도(中道)를 가라. 중도가 정도(正道)이니라.“
석가의 이 말은 진리 추구를 위한 계명이다.
80 세에 입멸(入滅)한 석가가 일생 동안 추구한 것이 무엇인가,
이생의 올바른 길이요, 진리다.
그 결과 진리를 불교에서는 달마(dharma)라고 하고, 또 보리(菩提, boehi)라고 한다.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느냐. 중정(中正)의 길을 가야 한다.
불편 부당(不偏不黨)의 길을 가야 한다.
중도는 맞는 길이요, 옳은 길이다.
중도를 가라.
중정의 길을 가라.
중정의 길을 걸어라.
이것이 석가의 가르침의 근본이다.
세계의 사성(四聖) 중에서 가장 연세가 많고
제일 유복한 몸으로 태어난 이가 석가였다.
그는 가비라 성의 왕자로 탄생하여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행복과 영광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지만,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해(苦海)에서 신음하는 많은 사람을 보고 어떻게 하면
일체 중생(一切衆生, all living things, 모든 살아 있는 생물들)을
이 끝없는 고뇌의 바다에서 구출하여
지혜와 자비와 행복의 인생을 살 수 있게 할까 하는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중생 제도(衆生濟度)의 원대한 비원(悲願)을 품었다.
모든 생명을 일체의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을 찾기 위하여
구도자의 길을 떠났다.
그는 29 세에 출가(出家)하여 6년 간의 고행 끝에
대각 성도(大覺成道)하여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
80세의 석가는 사랑하는 제자 아난(阿難)과 여러 불자(佛子)에게
마지막 설법을 하였다.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
살아 있는 자는 반드시 죽고,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져야 한다.
내가 죽은 뒤에는 너 자신을 등불로 삼고(自燈明),
진리를 등불로 삼아라(法燈明). 자기 자신을 지팡이로 삼고(自歸依),
진리를 지팡이로 삼아라(法歸依). 쉬지 말고 노력하여라(不休精進).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인 동시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부처가 되는 것을 성불이라고 한다.
누구나 수도를 열심히 하면 대각 대오(大覺大悟)하여 부처가 될 수 있다.
너와 나를 포함하여 모든 생명이 다 불성과 여래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과 인격을 수없이 갈고 닦으면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자력(自力) 신앙을 역설한다.
내가 나의 노력으로 나를 구원할 수 있다.
석가는 성도(成道)하여 성불했다. 수도(修道) 끝에 부처가 되었다.
부처란 무엇이냐. ‘진리를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부처를 의미한 산스크리트 말 부타(Buddha, 佛陀)는
‘각자(覺者, the awakened) 라는 뜻이다.
석가는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크게 깨달은 대각자 (大覺者)가 되었고,
바로 깨달은 정각자(正覺者)가 되었고, 근본을 깨달은
본각자(本覺者)가 되었고,
원통무애(圓通無碍)하게 깨달은 원각자(圓覺者)가 되었다.
석가의 원명은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rtha)다.
고타마는 성이요, 싯다르타는 이름이다.
석가모니(Sakyamuni,釋迦牟尼)란 말은 ‘석가 족에서 태어난 성자’란 뜻이다.
불교는 각(覺)과 깨달음의 종교다.
우주와 인생의 올바른 진리를 바로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깨달으려면 밝은 이성과 총명한 예지(慧智)가 필요하다.
깨달으면 곧 그것이 구원이요, 열반(涅槃)이요,
해탈(解脫)이요, 적멸(寂滅)이다.
깨달으려면 많이 보고 많이 배워야 한다.
인간은 탐진치(貪瞋痴) 때문에 방황하고,
백팔번뇌(百八煩惱)속에서 허덕이는 것이다.
탐(貪)은 탐욕(貪慾)이요, 진(瞋)은 노여움이요, 분노(憤怒)다.
진은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함부로 성을 내는 것이다.
치(痴)는 미련하고 우둔하고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다.
이간의 모든 번뇌(Klesa)의 근원은 탐진치다.
번뇌는 자기 중심의 탐욕과 사물에 대한 맹목적 집착에서 생긴다.
탐, 진, 치, 만(慢), 의(疑), 견(見, 惡見)의 여섯 가지 번뇌를
근본 번뇌(根本煩惱)라고 한다.
해탈(解脫)은 번뇌에서 풀리고 벗어나 마음이 평안(平安)하고
자유로운 것이다.
이러한 경지를 열반(涅槃, nirvana) 이라고 하고
또 적정(寂靜, santa)이라고도 한다.
열반과 적정이 불교의 궁극 목표다.
열반(涅槃)이란 번뇌의 근본인 탐욕이 멸하고 분노가
멸하고 우치가 멸한 것이다.
모든 속박에서 해탈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해탈과 열반은 같은 뜻이다.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 마음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것이 곧 열반이요,
해탈이다.
그것은 안심입명(安心立命)이요, 무애자재(無碍 自在)의 경지다.
각(覺)과 오(悟) 또는 각오(覺悟)의 세계는 진리를 바로 깨달아
지혜와 자비 속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하는 것이다.
불교는 미(迷)의 세계와 오(誤)의 세계를 열 가지 종류로 나눈다.
이것을 십계(十界)라고 한다.
얼마나 깨달았는가(悟) 얼마나 혹했느냐(惑)를 기준으로 이 세계는
열 가지로 나누어진다.
이 세상에는 절대(絶對)의 선인(善人)도 없고 절대의 악인도 없다.
인연(因緣)과 수도(修道)와 업보(業報)에 따라
미혹(迷惑)의 세계와 성자(聖者)의 오(悟)의 세계로 갈라진다.
고(苦)는 핍박(逼迫)이다. 압박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생즉고(生卽苦)다.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요, 생존은 고뇌의 연속이다.
불교는 사고(四苦)와 팔고(八苦)를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네 가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고(苦)는 생(生)의 속성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사는 것, 늙는 것, 앓는 것, 죽는 것, 모두가 고(苦)다.
고(苦)가 없는 인생은 없다.
사고(四苦)는 주로 신고(身苦)에 관한 것이다.
사고 외에 네 가지의 심고(心苦)가 있다.
첫째는 이별고(離別苦) ― 사랑하는 사람과 해어져야 하는 괴로움이다.
둘째는 원증회고(怨憎會苦) ― 미워하는 사람과 같이 만나야 하는 괴로움이다.
셋째는 구부득고(求不得苦) ―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넷째니 오음성고(五陰盛苦) ― 인간의 심신(心身)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여러 가지 고뇌가 오음성고다.
고뇌(苦惱)는 왜 생기는가.
집착(執着)과 갈애(渴愛)에서 생긴다.
집착과 갈애를 멸(滅)하면 고(苦)가 멸하고
고가 멸하면 해탈과 열반의 청정세계(淸淨世界)에 도달한다.
어떻게 하면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각(覺)과 오(悟)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느냐.
고(苦)를 멸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거기에는 팔정도(八正道), 즉 여덟 가지의 올바른 길이 있다.
팔정도를 팔성도(八聖道)라고도 한다.
팔정도를 실천하면 번뇌의 불이 꺼진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팔정도는 고(苦)를 멸하게 하는 여덟 가지의 올바른 실천 덕목이다.
팔정도의
첫째는 정견(正見)이다. 사물을 바로 보는 것이다.
둘째는 정사(正思)다. 바로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정어(正語)다. 바로 말하는 것이다.
넷째는 정업(正業)이다. 옳게 행동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정명(正命)이다. 올바른 생활을 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정정진(正精進)이다. 올바른 노력(努力,right effort)이다.
일곱째는 정념(正念, right mindedness)이다. 올바른 신념과 의식이다.
여덟째는 정정(正定)이다. 올바른 선정(禪定)과 정신통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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