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兄思想

고조선을 알고자 하면 꼭 읽어야 하는 서적

太兄 2023. 5. 20. 21:01

고조선을 알고자 하면 꼭 읽어야 하는 서적

2019-04-16 23:36:02


♥고조선을 알고자 하면 꼭 읽어야 하는 서적.  

정인보선생 지음.문성재박사님 역주.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의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조선사연구》는 1935년 1월 1일부터 1년 7개월간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란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국학자 정인보의 한국고대사 저술이다. 저자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는 대대로 조정에 출사(出仕)한 집안 내력과 조선 양명학을 대표하는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영향으로 오랜 기간 유가경전과 제자백가를 위시하여 불교, 역사, 언어, 민속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섭렵하여 ‘한국학의 독보적인 거성’으로 추앙받은 학자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23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의 전임교수를 맡은 이래 주로 한문학과 양명학 등 사상사 방면의 강의, 연구에 주력하면서 《조선고서해제(朝鮮古書解題)》(1931)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1933) 등 관련 저술들을 차례로 선보이는 한편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등 선인들의 문집 편찬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동양의 전통적인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문, 사, 철(文史哲)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또 그 경계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즐겼으며 우리 역사 또한 깊이 연구하였다.

위당의 역사연구 참여와 《조선사연구》 저술의 배경
위당은 1915년쯤에 상해에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를 처음 만난 이래 직ㆍ간접적으로 교류를 가지면서 그의 고대사 연구에 지지를 보내고 그 자신 역시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실재, 고조선(古朝鮮) 및 한사군(漢四郡)의 위치, 전삼한과 후삼한에 대한 이원적 접근, 낙랑(樂浪) 유물의 진위 여부, 백제의 요동 진출 등에 대한 고증, 연구를 통하여 그 역사 주장들을 계승ㆍ발전시키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당시 일본의 관변 역사학자와 그들과 ‘맞장구’를 쳐 대는 국내 식민사학자들은 한일 합병 직후부터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구관제도조사(舊慣制度調査), 고적조사(古蹟調査), 고전복간(古典復刊) 등의 사업을 펼치는 등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한국 고대사를 멋대로 재단하고 왜곡ㆍ조작함으로써 한민족의 역사와 ‘얼’을 말살하기에 바빴다.

 

1913년 일제의 고적조사단이 평남 용강군 해운면에서 이른바 ‘점제현 신사비(신蟬縣神祠碑)’를 발굴하자 당시 일본인 식민사학자 금서룡(今西龍, 이마니시 류)이 “해당 비의 발굴은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증거”라고 강변한 일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15년 3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펴낸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는 일제에 의한 역사 조작과 왜곡의 결정판이었다.

 

자신들이 멋대로 개발해 낸 식민사관에 힘입은 식민사학자들은 몇 년 후 평양을 낙랑군의 치소로 단정하고 그 후부터 공공연히 한민족의 역사를 타율ㆍ정체ㆍ당파적인 폐습의 본보기로 선전하고 나섰다. 당시 일제의 조선사 왜곡과 음모들에 대한 위당의 심경은 다음의 술회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국사를 연구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 선친께서 늘 “우리나라 역사책을 좀 잘 보아 두어라. 남의 것은 공부하면서 내 일은 너무들 모르더라”라고 말씀하셨건만 다른 노릇에 팔려 많은 세월을 허비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 우연히 일인들이 《조선고적도보》랍시고 낸 ‘첫 책’을 보게 되었는데 그 속장 두세 쪽을 넘기기도 전에 벌써 ‘분’이 터지면서 “이건 가만히 내버려 둬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또 어느 해인가는 일인들이 이른바 “한일 병합 몇 주년”이랍시고 《경성일보(京城日報)》인지 《매일신보(每日申報)》인지에다 기념호를 내었는데 거기에 이른바 ‘점제비(점蟬碑)’ 사진이 최근 몇 년 내의 대표적인 대사건의 하나로 올라왔다. …… 그것을 보고 나는 일본 학자들의 조선사에 대한 고증이라는 것이 저들의 총독정책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으며 그들의 음모를 “언제든지 깡그리 부셔 버리리라”라고 다짐하게 되었다.

위당은 그 일련의 날조극들이 조선사를 왜곡ㆍ조작하려는 일제의 식민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1935년 1월 1일을 기하여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한민족의 역사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하게 된다.

 

이 연재물은 원래 단군조선으로부터 이씨조선까지 5,000년을 관통하는 한민족의 역사를 전부 개괄한다는 야심찬 계획에 따라 1년 7개월 동안 총 282회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일장기 말쇄사건’을 빌미로 민족운동을 탄압하면서 1936년 8월 29일 《동아일보》는 강제로 정간되고 〈오천년간 조선의 얼〉의 연재 역시 중단되고 말았다.

《조선사연구》의 선행 판본
위당이 동아일보에 연재한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 독자들에게 다시 선을 보인 것은 민족해방을 맞은 후였다. 1946년《서울신문》에서는 위당의 동의를 얻어 1년 7개월 동안 연재되었던 내용을 단행본으로 묶어 《조선사연구》라는 제목으로 출간했고(이하 ‘서울본’) 당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두루 읽혔다.”

 


1983년 10월 31일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는 《담원 정인보 전집(담園鄭寅普全集)》(전6권)을 간행하면서 《조선사연구》(이하 ‘연세본’)의 상ㆍ하권을 해당 전집의 제3권과 제4권으로 출간하였다.

《조선사연구》에 나타난 위당의 ‘얼’ 역사관
위당은 《조선사연구》의 서문 격인 제1장 〈서론〉에서 고조선 역사 연구의 근본을 단군조선 이래로 5,000년간 면면히 이어져 온 ‘얼’에서 찾고 한민족의 역사는 바로 이 ‘얼’의 역사임을 강조했으며 ‘국학(國學)’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국학 연구의 기초를 실학(實學)에서 찾았다.
그는 이 ‘얼’이야말로 주체적인 자아이자 보편적인 인간 존재의 ‘고도리(가장 중요한 본질)’이며 빈 것과 찬 것,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가치의 척도라고 보았다.

 


위당은 역사 연구를 이 같은 보편타당한 진리이자 가치로서의 ‘얼’을 탐구하는 과정으로 인식하고 5,000년 한민족의 역사에서 민족의 ‘얼’을 찾아내고 가려내어 외세로부터 자아를 지킬 역량으로 승화시켜야 하며 그 낱낱의 역사적 자취들을 탐구하여 역사의 골간을 이루는 얼의 큰 줄기를 찾는 것이 역사학자의 소명이라고 보았다. 그의 ‘얼’ 사관은 “동시대에 서유럽의 역사 발전 법칙을 한국사에 기계적으로 적용한 사회경제사학이나, 민족정신과 신념을 도외시하고 개개의 사실 규명에 치중한 실증주의 사학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위당은 이 같은 인식에 따라 《조선사연구》에서 한국의 역사를 한민족과 이민족의 투쟁을 중심으로 인식ㆍ기술하면서 그 투쟁의 역사 속에서 의연히 살아 있는 민족의 ‘얼’을 찾으려 했고, 또 일제의 타율성론을 타파하기 위한 애국적, 민족적 목표를 가지고 한국고대사 연구를 실천으로 옮겼던 것이다.

 

나라를 빼앗겨도 정신만 굳게 지키면 언젠가는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역설하는 이러한 역사관은 어떤 의미에서는 박은식(朴殷植)의 ‘국혼(國魂)’, 신채호의 ‘낭가사상(郞家思想)’, 문일평(文一平)의 ‘조선심(朝鮮心)’ 등의 민족주의 정신사관과도 일맥으로 상통하고 있다.

위당의 역사 접근방법
① 문헌고증에는 정조(正祖)시대 이래로 조선 실학이 사용해 온 훈고학적 방법론을 원용하고 ② 기존의 전쟁사, 교섭사 중심의 역사 접근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 풍속, 언어, 문예 전반에까지 시야를 넓혔다.
③ 자신의 해박한 학식과 현지 답사의 경험을 무기로 삼아 단순한 문헌고증으로 그치지 않고 언어학, 지리학, 금석학적 분석까지 병행함으로써 보다 객관적이고 다각적인 검증을 지향함으로써 초기 민족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④ 문헌고증에 사용되는 사료는 선택과정에서부터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야사, 소설 등 허구성이 강한 문헌자료들은 지양하는 반면 정사, 지리지 등 공신력이 높은 사료들을 주로 활용함으로써 고증의 객관성, 엄정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⑤ ‘실증주의’를 전가의 보도처럼 떠드는 식민사학자들의 도발을 회피하지 않고 당대의 어느 학자보다도 치열한 열정과 노력으로 문헌고증에 최선을 다하였다.《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역대 국내외 사서와 문집들은 물론이고 멀게는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증국번(曾國藩) 등의 명ㆍ청대 학자들로부터 가깝게는 양계초(梁啓超), 장병린(章炳麟) 등의 당대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자들의 “줄잡아 130여 종류가 넘는” 방대한 저술과 주장들을 고증에서 활용하고, 출전(出典)도 확실히 밝히는 등 마무리에까지 각별한 신경을 쓴 것은 그 같은 노력의 일환이었다.

위당 사학(史學)의 치밀한 문헌 고증과 유물 검증
위당은 약 1년 7개월 동안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하면서 단재에 의하여 처음 제기되었던 주요한 역사 주장들, 즉

 


① 고대사 인식체계를 기존의 ‘단군-기자-위만/삼한’이 아니라 ‘고조선-부여-고구려’ 구도로 이해한 점,
② 중국 사서의 주신(州愼), 숙신(肅愼), 직신(稷愼), 식신(息愼)을 ‘조선’과 동일한 이름으로 이해한 점,
③ 권람(權擥), 홍여하(洪汝河), 신경준(申景濬), 이익(李瀷) 등의 학맥을 이어 고조선의 강역과 ‘한사군(漢四郡)’의 소재를 한반도가 아닌 요동(遼東)지역으로 파악한 점,
④ 한나라 무제[漢武帝]를 전후하여 예맥조선(濊貊朝鮮)과 위만조선(衛滿朝鮮) 2개의 조선이 병립했다고 본 점,
⑤ 고조선 여러 겨레들의 언어가 서로 일치하고 통했다고 본 점,
⑥ ‘북삼한(北三韓)’이 고조선의 해체로 한반도로 남하하여 ‘남삼한(南三韓)’을 이루었다고 본 점,
⑦ 백제의 요서(遼西) 경략을 주장한 점 등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키는 한편, 거기서 더 나아가 그 주장들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하는 데에 매진하였다.

《조선사연구》에서 위당이 분석, 고증에 주력한 쟁점들은
① 단군의 위상 문제:
위당은 첫 장을 열면서 “조선의 시조 단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라고 선언하였다. 그의 이 선언은 일제의 단군조선 부정론(檀君朝鮮否定論)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신화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단군(조선)을 역사의 범주로 귀속시켜 본격적인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재인식하였다. 그는 ‘단군’이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천제의 아들[天帝子]’에 비견되는 최고 통치자에 대한 존호이며, 그 ‘역년(歷年)’ 역시 특정인의 생물학적 수명이 아니라 해당 왕조 전체의 존속기간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다.

 


②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 부정:
위당은 기자의 무덤이 박현(薄縣), 몽현(蒙縣) 등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음을 근거로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왔다는 기자동래설을 정면으로 부정했으며, 기자가 주나라 무왕[周武王]의 책봉을 받아들여 ‘조선후(朝鮮侯)’가 되고 주나라에 입조했다는 《사기》의 기자책봉설(箕子冊封說)에 대해서는 은(殷)나라에 대한 절개를 목숨보다도 무겁게 여겼던 기자의 위인이나 원수의 나라인 주나라와 모든 관계를 끊고 떠난 기자가 그 먼 거리를 다시 되돌아갔다는 말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이 같은 주장들 자체가 《사기》나 기타 중국 문헌들의 사료로서의 공신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보았다. 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에 대해서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군의 험독(險瀆), 즉 지금의 요녕성(遼寧城) 해성현(海城縣)으로 비정하였다.

 


③ 삼한의 성격:
‘삼한(三韓)’은 지명이 아니라 ‘한(汗)’이나 ‘간(干)’처럼 ‘크다’ 또는 ‘임금’이라는 뜻을 가진 일종의 존호이며 이것을 지명으로 오해하여 고조선과 별개의 정치세력으로 봄은 잘못이라 하였다.

 


④ 요수난하설(遼水난河說):
위당은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요수(遼水)’를 지금의 하북성 영평(永平) 일대를 흐르는 난하(난河)로 비정하였다. 위당의 이 같은 ‘요수난하설’은 1960년대에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에 의하여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보충, 개진되었다.

 


⑤ 한사군 설치 시점 및 위치:
위당은 《사기》, 《한서》, 《후한서》 등의 기록 검토를 통하여 원봉(元鳳) 6년(기원전 111) 이전에 낙랑(樂浪), 현토(玄토), 임둔(臨屯) 3개 군이 먼저 설치된 뒤를 이어 진번(眞番)이 설치되었으며, 그 위치 역시 진번은 대릉하(大凌河) 부근, 임둔은 초자하(哨子河) 인근, 현토는 우북평(右北京) 부근으로 모두가 한반도 너머에 있었으며 낙랑도 그 치소를 요동의 험독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위당은 관할 지역이 수시로 변동되었던 한사군은 고정된 땅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한서》〈지리지(地理志)〉에 열거된 수많은 한사군의 군현들은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었다[有名無實]”라고 주장함으로써 한사군이 한반도를 400여 년 간 지배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위당이 한사군의 조선 점유를 “한사군 전쟁[漢四郡役]”으로 고쳐 부른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 따른 것이었다.

 


⑥ 봉니 조작:
⑦ 용강 석비 이동 가능성:

 


⑧ 효문묘 동종 조작, 이동 가능성: 그는 ‘진나라 때의 창[秦戈]’, ‘오수전(五銖錢)’, ‘임회태수(臨淮太守) 관인’ 등을 예로 들면서 출토된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아무리 진품이라 해도 낙랑군의 유물이라고 섣불리 단정을 내리기 전에 쌍방의 문헌을 면밀히 참조해서 “그것이 원래 있던 자리가 한반도가 아니라면 일단 최종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옳다”라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러면서 그런 최소한의 검증도 없이 무턱대고 그것을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학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질타하였다.

《조선사연구》에서 발휘된 역사언어학적 안목
《조선사연구》에서 단연 이채를 띠는 부분은 역시 고조선과 한사군, 삼한 소국들, 삼국시대의 지명, 인명, 관명에 대한 독특한 역사언어학적 접근, 분석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이라는 이름에 대한 고증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위당은 국내외의 다양한 전적을 섭렵함으로써 축적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중국 사서 속의 ‘식신(息愼), 숙신(肅愼), 직신(稷愼), 주신(珠申)’ 등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우리말의 ‘뜻[訓]’을 옮긴 것이 아니라 ‘발음[音]’을 전사(轉寫)한 이름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내고 만주어와의 비교분석을 통하여 ‘조선’이 ‘관경(管境)’을 뜻하는 만주어 ‘주신’과 계통적으로 친연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위당의 고대사 연구서 《조선사연구》의 의의
위당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사연구》의 저술과 신문 연재, 대중을 상대로 한 여러 차례의 역사 강연 등을 통하여, 일제의 역사왜곡으로부터 우리의 역사, 우리의 ‘얼’을 지키고자 진심으로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역사학계는 이웃나라의 역사 왜곡으로부터 우리의 역사와 ‘얼’을 지키기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