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백제땅을 신라와 발해 말갈이 나누었다

太兄 2023. 5. 19. 22:34

백제땅을 신라와 발해 말갈이 나누었다

2019-03-31 00:08:40


♥三國史記 新,舊唐書
而其地已爲新羅渤海靺鞨所分國系遂絶
백제땅을 신라와 발해 말갈이 나누었다!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 백제 땅에 두었던 다섯 도독부.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마한도독부(馬韓都督府), 동명도독부(東明都督府), 금련도독부(金漣都督府), 덕안도독부(德安都督府) 등 五都督府(오도독부)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곳은 웅진도독부 뿐, 신라에는 계림도독부가 유일하다. 백제의 강역이 얼마나 넓었다는 말인가? 하라는 역사연구는 하지 않고 철밥통 껴안고 헥헥거리는 반도역사식민사학자들은 듣던대로 이완용의 후손과 일본국의 개였단 말인가? 민족의 좀덩어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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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한다고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의문점들이 기록에 나타납니다. 백제를 한반도로 확정지어 놓고 보는 현 사학계의 의견은 모순 투성이라는 것이 대륙백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한반도에서 멸망한 백제라면 패망당시의 지명들이 반도에 나타나야 하는데 나타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 지명들은 중국 대륙에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도 대륙백제 여행을 시작해 봅니다.

1.한반도에는 백제패망시의 지명이 없다.

백제 멸망시의 지명의 예를 들어보면,
석문(石門), 대방(帶方), 석성(石城), 평원(平原), 황산(黃山),大山(太山), 제성(諸城), 동명(東明), 백마강(白馬河), 주류성(周留城), 항성(項城), 동성(桐城), 잠산(岑山), 독산(獨山). 덕안(德安),,,,

충청, 전라도 지역에는 백제 패망시의 지명이 존재하지 않으나, 산동성(山東省), 하남성(河南城), 호북성(湖北省), 안휘성(安徽省), 강소성(江蘇省)등에는 위의 지명들이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는 것은 史書와 일치하는 지역이 공주(公州), 부여(夫餘) 지역이 아님을 뜻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황산벌이라는 영화가 있지만, 황산벌이 현재 충남 연산(?) 이라고 합니다만, 대륙에는 아직도 패망때의 지명인 황산벌, 주류성등의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2.한반도의 부여에는 사비성이 아닌 내지성의 비가 있기 때문이다.

夫餘에서 사비성(泗沘城)이라면 당연히 泗沘城으로 기록된 지석(誌石)이 있어야 함에도 내지성(奈祗城)이 기록된 지석이 출토 되었다는 것은 이곳 부여가 사비성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지금의 부여는 사비성이 아니라, 내지성이 있던 곳입니다.

3.백제정벌시 당군 13만과 40만 유입지가 반도가 될수 있는가?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사서의 기록을 보면 백제의 멸망 당시의 인구는 76만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百濟城二百 戶七十六萬 舊唐書) 또한 城이 200개라고 합니다(國本有五部· 三十七郡· 二百城· 七十六萬戶 三國史記). 물론, 우리의 역사학계는 1호당 1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을 ☞ "백제의 인구"편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백제의 인구가 76만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당나라의 13만 정벌군이 당에서 황해를 건너 왔다고 하는데,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40만의 당군을 더 투입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53만 명의 활동이 충청, 전라도에서 가능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백제의 인구가 76만명(76만호를 76만명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 현재 사학계이다)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당나라 군대 53만과 신라군 등이 백제의 땅에 진주 하였다면, 한 나라의 인구에  해당하는 군대를 과연 투입 하였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맥아더에 의한 인천상륙 작전 때도 4만명이 되지 못했다는 것과 6.25 전쟁 당시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은 백만명에 달했는데, 당시 우리나라의 인구는 3,000만명인 점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4.백제땅을 신라와 발해, 말갈이 나누어 가졌다??

三國史記 新,舊唐書 에서는 분명히 백제땅을 신라와 발해가 나누어 가졌다(而其地已爲新羅渤海靺鞨所分國系遂絶 新唐書,舊唐書,三國史記)고 했는데, 경기, 충청, 전라도 어느 곳이 발해 땅이라고 밝혀지고 있는가요? 반도 남부에 발해땅이 있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누구처럼 발견되기를 기다려 보자며 시간만 보낼까요? 그러나, 백제에 대한 기록중에서 남제서(南齊書)의 백제 지명 광양이 발해땅이 되고, 요나라 땅이 되었다고 요사(遼史)에 기록되고 있으니, 광양(廣陽), 즉 북경(北京)지역에서는 백제 땅이 발해 땅이 될 수 있으니 패망지역을 반도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삼국사기 기록 >
현 사학계에서 그나마 정사 취급을 받고있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 660년 3월, 나당연합군 18만의 병력이 백제 침공(당군 13만, 신라군 5만)(高宗詔......統兵十三萬以來征......新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효(孝)·왕자 태(泰)·융(隆)·연(演) 및 대신과 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2,807명을 경사(京師)로 보냈다(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 隆· 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 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送京師)

"백제의 부흥운동"시
- 당군 40만 증파(詔遣右威衛將軍孫仁師率兵四十萬) 당시 부흥군이 회복한 성 200여성(黑齒常之......復取二百餘城)

< 의문점 제시 >
이것을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당시 백제가 보유했던 성이 200개 였는데 백제 부흥군은 200여성을 되찾는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요?

이씨조선때 이율곡이 10만 양병을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1593년 정월 임진왜란때 명나라에 통보한 의병 총수는 관군의 1/4인 2만2,600명이었고, 백제 패망후 730여년이 지난후 지방별 인구 (태조 및 태종실록)를 보면,
- 경기, 충청, 전라도 : 56,003호 - 경상도 48,993호 였으며, 신라의 경우 수도(금성)에 약 17 만9 천호가 있었는데 신라가 패망한지 500여년이 지난후 이씨조선 때 경상도의 총호수가 10만에도 미달했다?

지금 사학계는 1호당 1인의 인구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은 다 알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조선시대의 인구는 1호당 10명으로 계산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당시는 대가족 제도였다라면서,,).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백제시대 인구수에 비해서 이씨조선시대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을 수가 있다는 것인가요?

중세까지는 산업이 크게 발전하지 않아 인구가 완만하게 증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학계의 주장대로 백제가 반도에 있었다고 하면 오히려 이씨조선시대의 인구수가 월등하게 적은데  과연 백제가 반도에 있었다고 해석을 해야 될까요? 지금도 산동반도의 인구가 한반도 인구수 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과연 백제는 어느 곳에 있었던 것일까요?

백제의 요서(遼西)진출 기록: 백제의 강역(彊域)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미천왕(309-331)이 319년에 두개의 선비족(鮮卑族)과 연합을 하여 모용외(慕容廆, ?-333)가 이끄는 선비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용외의 아들인 모용황(慕容煌)은 337년에 스스로를 연왕(燕王)이라 하고, 349년에는 전연(前燕)을 세웠다. 진서(晋書)에는 이 모용황에 맞서 고구려, 백제, 선비족이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켰다는 내용이 있다.

송서(宋書)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백제는 요서를 점령하였는데, 백제가 통치한 지역의 이름이 진평군 진평현(晋平郡 晋平縣)이라는 기록이 있다.

양서(梁書)에는 동진(東晋, 317-420) 때에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였고, 백제는 요서(遼西)와 진평을 점령하여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송대(宋代, 960-1279)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346년에 백제가 녹산(鹿山)에 있는 부여를 공격하였으므로, 부여사람들이 흩어져 서쪽에 있는 연(燕)나라 쪽으로 도망을 갔는데, 연왕 모용황이 황태자와 세명의 장군(모두 모용씨)에게 1만 7천여명의 기병을 주어 이미 방어능력을 상실한 부여사람들을 공격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346년은 백제에서 근초고(346-375)가 왕으로 등극한 원년(元年)이다

11세기에 편찬된 자치통감뿐만이 아니라, 바로 당대 기록에 가까운 남제서(南齊書)에서도 북위(北魏, 386-534)가 10만 여명의 기병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4명의 장군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488년에) 패했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동성왕(479-501) 10년 조에서도 재확인된다. 또 남제서에는 동성왕이 495년에 사절단을 보내 북위의 공격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운 백제장수들에게 장군 칭호를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사서에 기록된 10만이라는 대규모의 북위기병이 북중국으로부터 장수왕 (413-491)이 통치하고 있던 고구려 땅을 온전하게 통과 해, 한반도의 서남부에 있었다는 백제에까지 쳐들어 왔다가 패해 돌아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또 이렇게 엄청난 사건이 당대의 기록에 누락될 리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치통감과 남제서가 말하는 백제란 분명히 요서에 있는 백제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성왕의 요청에 의해 남제(南齊) 조정이 백제 장군들에게 수여한 칭호에 들어있는 광능(廣陵), 청하(淸河), 성양(城陽) 등은 모두 분명히 요서의 지명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 열거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백제는 4세기 중 어느 때인가 요서 일부를 점거하여 100년 이상을 통치하였다고 이해 할 수 있다. 백제는 그 역동적인 선비족의 연(燕)나라와 대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끈임 없이 영토를 확장해 가고 있던 당시의 고구려와 맞서고, 동시에 전성기의 북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요서 땅에 백제군을 유지했다는 말이 된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를 보면 백제의 고토(古土)는 신라와 발해말갈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고 적혀있다. 만약 백제의 영토가 요서에 없었다면, 그리고 백제의 강역이 단지 한반도의 서남부에만 국한되었었다면, 발해말갈이 백제의 고토를 분할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가 된다.

한반도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실들 중, 백제의 요서진출 기록만큼 그렇게 다양한 중국 정사(正史)에 그렇게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 재확인된 역사적 사실은 없는 것 같다. 또 이 백제의 요서진출 기록처럼 그렇게 많은 일본 학자들은 (논리적? 분석이라는 미명하에) 그토록 미친 듯이 못 믿겠다며 반박을 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겸손을 최상의 미덕으로 내세우는 한국 사람이라면, 신라의 대학자이며 소위 중화사상에 치우쳤었다는 최치원(崔致遠, 857-?)이 말했다는 “고구려, 백제가 한창 강성할 때는 100만 대군을 보유하였으며, 남쪽의 오(吳), 越(월)과 북쪽의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공격하여 중국의 골칫거리가 됐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수수께끼 같은 말로 들릴 것이다.

만주원류고의 강역(彊域)편에는 백제의 강역에 대해 놀라운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 즉, 백제가 요서의 일부 지역을 점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다음은 만주원류고 기록을 거의 있는 그대로를 번역한 것이다.

“백제 강역의 경계는 서북쪽으로는 오늘날의 광녕(廣寧)과 금의(錦義, 금주- 의주)에서 시작되며,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틀어 조선의 황해, 충청, 전라 지역에 이른다. 백제의 강역은 동서로 보면 상당히 좁으나, 남북으로 보면 굉장히 길다. 유성(柳城)이나 북평(北平)에서 보면, 신라는 백제의 남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고, 경상 지역이나 웅진에서 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또 백제는 북으로 말갈과 접경한다.

백제의 왕성(王城)은 동과 서에 각각 하나씩 있었는데, 이 두개의 성을 모두 고마(固麻)라고 불렀다. 송서(宋書)는 백제가 점거했던 지역이 진평군 진평현 이었다고 기록한다 통고(通考)에 의하면 이 지역은 당나라 때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백제 수도 중 하나는 요서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 땅에 있었는데, 양 무제(梁武帝, 502-519)때에 와서 백제는 수도를 한반도 남쪽으로 옮겼다.

당나라는 660년에 백제를 멸하고 동명도독부(東明都督府)를 포함하여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동명도독부라는 명칭에 나오는 동명은 백제 건국시조의 이름이며, 기록에 그가 원래 고리(高離)에서 강을 건너 왔었다고 하니 동명도독부는 고리 땅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요사(遼史)를 보면 고리는 봉주(鳳州)와 한주(韓州)를 의미하는데 이들은 모두 오늘날의 개원(開原) 지역에 위치한다. 따라서 동명도독부는 개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당서(唐書)에는 백제의 옛 강역이 신라와 발해말갈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 소멸되었다고 적혀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3 (2005. 1. 8)
정리: 강현사 박사

1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美川王 十四年 侵樂浪郡 十五年. . .南侵帶方郡 二十年 我及殷氏宇文氏 使共攻慕容廆 二十一年. . . 遣兵寇遼東 晋書卷一百九 載記第九 慕容皝 句麗百濟及宇文殷部之人 皆兵勢所徙

2 宋書 列傳 夷蠻 東夷 百濟國 高麗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晋平縣

3 梁書 列傳 東夷 百濟 晋世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 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4 資治通鑑 晋紀 穆帝 永和二年 春正月. . .初 夫餘居于鹿山 爲百濟所侵 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設備 燕王皝 遣世子儁 帥慕容軍 慕容恪 慕容根三將軍 萬七千騎 襲夫餘 (二: 326)

5 資治通鑑 齊紀 武帝永明六年十二月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 .晉世句麗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二: 1159) 南齊書 列傳 東夷 百濟國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 . . 率衆襲擊虜軍 大破之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 .臣遣. . .等領軍逆討. 三國史記 百濟本紀 東城王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6 南齊書 百濟國 . . .牟大又表曰 臣所遣行…廣陽太守…廣陵太守 淸河太守 … 詔可…除太守 … 城陽太守 … 詔可 竝賜軍號

7 舊唐書 列傳 東夷 百濟 … 其地自此爲新羅及渤海靺鞨所分百濟之種遂絶    新唐書 列傳 東夷 百濟 … 而其地已新羅及 渤海靺鞨所分 百濟遂絶

8 三國史記 下 卷第四十六 列傳 第六 崔致遠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9 欽定滿洲源流考 卷九 疆域二  百濟諸城 … 謹案 … 百濟之境
西北自今廣甯錦義 南踰海 蓋 東極 朝鮮之黃海忠淸全羅等道 東西狹而南北長 自柳城北平計 之則 新羅在其東南 自慶尙熊津 計之則 新羅在其東北 其北亦與 勿吉爲隣也 王都有東西兩城 號 固麻城 亦曰居拔城 以滿洲語考 之 固麻爲格們之轉音 居拔蓋滿 洲語之卓巴言 二處也 二城皆王 都 故皆以固麻名之 宋書言百濟 所治謂之 晉平郡晉平縣 通考云 在唐柳城北平之間則國都在遼西 而朝鮮全州境內又有俱拔故城殆 梁天監時[502-19], 遷居南韓之 城 歟唐顯慶中[656-60]分爲 五都督府曰 … 東明爲百濟之祖 自槀離渡河以之名地當與槀離國 相近考 遼史 槀離爲鳳州韓州 皆在今開原境則東明都督府之設 亦應與開原相邇矣 … 唐書又言 後爲新羅渤海靺鞨所分百濟遂絶

金史 地理上 廣寧府本遼顯州 … 廣寧有遼世宗顯陵, 遼史 地理志二 東京道 顯州 … 奉顯陵…置醫巫閭山絶頂築堂曰望海…穆宗葬世宗於顯陵西山…有十三山, 欽定滿洲源流考 卷十四 山川一
元一統志 十三山在廣寧府南一 百十里 … 在今錦縣東七十五里 卷十五 山川二 … 明統志 大凌河源出大甯自義州西六十里入境南流經廣寧左右屯衛入海, 欽定滿洲源流考 卷十一 疆域四 遼東北地界 遼史 顯州 … 本漢無盧縣卽醫巫閭 … 自錦州八十里至… 元一統志 乾州故城在廣甯府西南七里

10 欽定 滿洲源流考 卷三 部族 百濟 … 通典 [卷一百八十五 邊方典一]… 晋時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略有遼西晋平 唐柳城北平之閒 … 元史 … 唐柳城北平之間實今錦州 …

출처: 
http://www.bc8937.pe.ne.kr/WEFH67489SDFffgtr/read.cgi?board=FREE_BOARD&y_number=201

http://yulgon.kr/board/list.php?category=&board_num=8&rowid=127&go=&sw=&sn=&st=&sc=&page=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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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쥬신가(太朝鮮歌)

아이사타 사타려와
아이사타 사타려와
파나류 지산에 흑수 백산에

생명이 탄생한 곳, 신성한 그 곳에
인류가 탄생한 곳, 신성한 그 성지에
파나류 지산에, 흑수 백산에

하라돋지 사타려와
하라돋지 사타려와
신단수 신시에 아사달 쥬신에
빛이 와

태양이 뜨는 곳, 신성한 그 곳에
태양이 뜨는 곳, 신성한 그 성지에
신단수 신시에, 아사달 쥬신에 빛이 와

어비이 지이야 하늘 이시여
이제는 우리를 어비이 지이야
다물내 나미홀 다물내 나미나
이제는 아리 쥬신 돌아와

어여삐 여기소서, 하늘이시여
이제는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잃어버린 강과 바다와 성을 되찾고
잃어버린 강과 바다와 땅을 되찾으니
이제는 옛 조선의 큰 영광이 돌아와

아이사타 사타려와
아이사타 사타려와
파나류 지산에 흑수 백산에

생명이 탄생한 곳, 신성한 그 곳에
인류가 탄생한 곳, 신성한 그 성지에
파나류 지산에, 흑수 백산에

하라돋지 사타려와
하라돋지 사타려와
신단수 신시에 아사달 쥬신에
빛이 와

태양이 뜨는 곳, 신성한 그 곳에
태양이 뜨는 곳, 신성한 그 성지에
신단수 신시에, 아사달 쥬신에 빛이 와

하라돋지 사타려와
하라돋지 사타려와
신단수 신시에 아사달 쥬신에
빛이 와

태양이 뜨는 곳, 신성한 그 곳에
태양이 뜨는 곳, 신성한 그 성지에
신단수 신시에, 아사달 쥬신에 빛이 와

어비이 지이야 하늘 이시여
이제는 우리를 어비이 지이야
다물내 나미홀 다물내 나미나
이제는 아리 쥬신 돌아와

어여삐 여기소서 하늘이시여
이제는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잃어버린 강과 바다와 성을 다 되찾고
잃어버린 강과 바다와 땅을 다 되찾게 하소서
이제는 거대한 쥬신이시여 돌아오소서.

어비이 지이야 하늘 이시여
이제는 우리를 어비이 지이야
다물내 나미홀 다물내 나미나

어여삐 여기소서 하늘이시여
이제는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잃어버린 강과 바다와 성을 다 되찾고
잃어버린 강과 바다와 땅을 다 되찾게 하소서

이제는 아리 쥬신 돌아와
다물내 나미홀 다물내 나미나
이제는 아리 쥬신 돌아와
이제는 아리 쥬신 돌아와

이제는 옛 조선의 큰 영광이 돌아와
잃어버린 강과 바다와 성을 되찾고
잃어버린 강과 바다와 땅을 되찾으니
이제는 옛 조선의 큰 영광이 돌아와
이제는 옛 조선의 큰 영광이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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