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대제국을 건설한 백제
2019-03-23 23:19:02
▣해양 대제국을 건설한 백제
『백제』 는 百家濟海라는 기록이 보여주듯이 기록이 보여주듯이 백제는 강력한 해군을 보유한 해상왕국이었다. 바다를 건너서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대제국 백제에 대해서 알아본다.
충청 지역에 국한된 소국가에 지나지 않았다는 편견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그러나 실제 경제적 가치를 고려한다면 고구려를 능가했다고 할수 있다 .
백제가 요서지방은 물론 중국 동부 해안 지역에 진출해 그 지역을 지배한 사실이 『宋書』.『南齊書』.『梁書』.『南史』.『北齊書』.『通典』.『文獻通考』등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고이왕 13년 (246년)조에는 “위魏나라의 幽州刺史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삭방태수 왕준과 더불어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백제왕은 낙랑이 비어있는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파견하여 낙랑의 변경을 습격하고 그곳 주민을 빼앗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魏幽州刺史毌 丘儉與樂浪太守劉茂 朔方太守王遵伐高句麗 王乘虛遣左將眞忠襲取樂浪邊民〕”
또 한 분서왕7년 (304)에도 “몰래 군사를 보내어 낙랑군의 서부현을 공략해서 빼앗았다. 〔七年春二月 潛師襲取樂浪西縣〕 라는 기록이 나온다. 백제는 이미 고이왕이전부터 요서에 진출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낙랑군이 비어있는 틈을 타서 그 서부현을 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기사를 뒷받침하는 기사는 〔자치통감 晉紀 永和 2년(346년)조〕에 있는 “처음에 부여는 녹산 鹿山에 거처하였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서 부락이 쇠잔해져서 서쪽 연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晋永和二年 初夫餘居于鹿山 爲百濟所侵 西徙近燕 而不設備〕라는 기록이다.
요서, 진평을 점거한 백제는 이에 머물지 않고 중국 해안선을 따라 구석구석 식민지를 만들고 제해권을 장악하여 동성왕 (479~501)때에 이르면 북경지역과 산동성, 상해 양자강 이남까지, 중국 동부지역과 항해바다 전체를 평정한 대제국이었다.
백제는 동으로 일본을 위성국으로 삼아 지배했다. 일본 나라현 텐리(天理)시 이소노가미 신궁에는 백제왕(18세 전지왕)이 왜국의 신궁왕후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가 봉안되어 있는데 『日本書紀』에서는 백제왕이 칠자경(七子鏡)과 함께 신공왕에 바친 것으로 왜곡되어 있다. 칠지도와 칠자경은 각각 세계수(世界樹)와 태양을 뜻하는 왕권의 상징물이다.
당시 백제는 중국이나 고구려와 별도로 자신들을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5세기 중반에 백제는 대왕을 주축으로 하여 그 좌우에 고주선 북방 유목국가처럼 좌현왕과 우현왕이 있었다. 이 제도는 단군조선의 국통을 잇는 삼신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송서,이만열전』 백제국 전에는 여기(餘紀)을 우현왕으로 ,여곤(餘昆)을 좌현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하여 행관군장군 우현왕 여기를 관군장군으로 임명하고 ,행정로 장군 좌현왕 여곤과 행정로장군 여훈을 함께 정로장군으로 임명하였다.〔 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爲冠軍將軍.以行征虜將軍左賢王餘昆․行征虜將軍餘暈竝爲征虜將軍〕『송서 이만전(宋書 夷蠻傳)』 좌현왕은 일본열도를, 우현왕은 그 서방인 중국 대륙의 일정지역을 관장하였다.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에는 백제라는 지명이 무수히 남아있다. 백제는 위성국인 왜를 신라, 고구려와의 전쟁에 여러 차례 동원하였다. 백제가 영토을 확장함에 따라 식민지 접경 지역 국가들과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백제가 얼마나 막강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이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
〈북제서 후주기〉에는 571년에 ‘백제왕 餘昌(27세 위덕왕)을 사지절使持節(황제의 신임을 표시하는 부절을 가졌다는 뜻) 도독(都督:군사책임자) 동청주자사東淸州刺史(행정책임자)로 삼았다〔以百濟王餘昌爲使持節都督東淸州刺史〕’라고 하여 산동반도가 백제 소유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수많은 단명왕조들이 흥망을 거듭하던 중국의 위진 남북조시대(220-~589)에 한족정권은 중국 남부에서 남조를 형성하였으나 그 세력은 미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들은 백제의 힘을 빌어 북방을 수복해 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와 화친하면서,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을 관장하는 백제의 관리와 장수에게 중국 관직을 제수를 했던 것이다. 백제 또한 그러한 관직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중국 관직은 현지 한족과 토착민을 지배할 수 있는 명분을 주기 때문이었다.
*백제가 대륙을 지배한 기록들이다(위키백과)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절에는 강한병사가 1백만명이나 되어 남쪽으로는 오월을 침범하였다. <삼국사기> 최치원전
*금주, 의주, 애훈 등지가 모두 백제이다. <만주원류고>
*백제는 후에 점점 강하고 커져서 작은 나라를 병합하고 그 나라가 본래 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 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고 백제 역시 요서.진평의 2군을 점령하고 백제군이다. <양서> 백제전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함께 있었으며 그 후 고구려는 요동에 있었으며 백제는 요서에 있었고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불렀다. <송서>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백제 동성왕 488년,490년에 후위後魏의 기병 수십만이 백제가 통치하는 대륙의 영토을 침략했다가 크게 패하고 돌아갔고 〔十年 魏遣兵來伐爲我所敗〕,수훈을 세운 백제 장수들이 광양태수,대방태수,광릉태수,청하태수,낙랑태수,성양태수,조선태수등을 제수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남제서 백제전). 백제가 한수 이남의 작은 나라였다면 위나라 기병 수십만이 위쪽에 강력한 고구려가 버티고 있는데 그곳을 통과 하여 백제와 싸움을 할 수 있었겠는가.
백제는 단군조선과 북부여 이후 무려 340년이 넘는 오랜 기간에 중국동부 해안지역을 지배했다. 그런데 백제와 고구려가 대중국 투쟁을 벌이며 대륙 해안선을 따라 경쟁적으로 획득한 영토는, 안타깝게도 신라가 반민족적 망국통일을 하면서 고스란히 당나라에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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