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경제

왜 정권 바뀌자 '없던 간첩'이 계속 잡힐까

太兄 2025. 3. 8. 20:02

[박정훈 칼럼] 왜 정권 바뀌자 '없던 간첩'이 계속 잡힐까

문재인 정권의 간첩 검거 실적은 역대 최저였다
간첩이 진짜 없던 게 아니라 없는 척하며 안 잡은 것이다

입력 2025.03.08. 00:05업데이트 2025.03.08. 00:27
지난해 11월 간첩 혐의로 기소된 민노총 전직 간부의 1심 선고 공판이 열린 수원지방법원에서 민주총 관계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와 공안정국 조성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뉴스1

12·3 계엄 정국은 잊고 있던 여러 사람의 과거를 소환했다. 대표적인 것이 박선원 민주당 의원이었다. ‘체포 명단’을 폭로하고 군 사령관들을 압박하며 내란 프레임을 만드는 데 앞장선 그는 종북 용공 단체 출신이었다. 연세대 ‘삼민투’ 위원장이던 1985년, 미 문화원 점거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징역형을 살았다. 이후 영국 유학을 다녀와 노무현 청와대의 행정관으로 공직에 입문한 뒤에도 천안함 폭침이 북 소행임을 부인하는 등 종종 논란을 일으키곤 했다.

특히 주목받은 것이 그의 국가정보원 이력이었다. 문재인 정권은 집권 이듬해 그를 국정원장 특보로 기용한 뒤 4년 내내 기조실장·1차장에 앉혀 놓았다. 그 많은 전문가 중 하필이면 종북 이력의 국가보안법 사범을 간첩 잡는 국정원 수뇌부에 포진시켰으니 핀트가 안 맞는 ‘안보 어깃장’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박선원이 재직하던 동안 국정원은 역대 정권 중 가장 초라한 간첩 검거 실적을 남겼다. 방첩(防諜)이 주 임무인 국정원이 북한과 대화·협력하겠다고 나설 지경이었다.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자 갑자기 간첩단 사건이 봇물 터지듯 꼬리 물었다. 창원에선 북 공작원에게 공작금을 받고 충성 서약을 한 ‘자통 간첩단’ 4명이, 제주에선 북 지령에 따라 이적 조직을 결성하려 한 ‘ㅎㄱㅎ 간첩단’ 3명이 검거됐다. ‘블랙 요원’ 신상 정보를 중국에 넘긴 정보사 기밀 유출 사건, 중국인 3명이 미 항공모함을 드론 촬영한 사건 등도 적발됐다. 그중에서도 충격적인 것은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 6명을 검거한 사건이었다.

국정원의 민노총 간첩 수사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았다. 민노총 조직쟁의국장이던 석모씨와 공범들은 2017년 이후 캄보디아·중국·베트남에서 북 공작원과 수차례 접선해 대면 지령을 받았다. 국정원 요원들은 이들의 동선을 추적해 세 번의 접선 장면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빼도 박도 못할 물증을 확보한 것이었다.

국정원이 법원에 제출한 베트남 동영상엔 이런 장면이 찍혔다. 2019년 8월 오전 9시 55분, 접선 장소인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의 동상 오른쪽 계단에 민노총 간부들이 나타난다. 10시 정각, 사전 약속대로 석씨가 생수병 물을 마시며 신호를 보내자 근처에 있던 북한 공작원은 선글라스를 벗어 닦는 동작으로 응답한다. 서로를 확인한 양측은 접선 후 호텔로 이동한다. 이 모든 상황이 미행하던 국정원 요원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암호 해독 과정도 드라마틱했다. 국정원은 석씨의 PC를 확보했지만 암호 코드를 못 찾아 한 달 반을 허비했다. 어느 날 새벽까지 씨름하던 요원이 문서 파일을 살펴보다 ‘rntmfdltjakfdlfkeh…’라고 적힌 글자열에 주목했다. 키보드 자판을 한글로 바꿔 놓고 영문 글자를 입력하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문장이 나왔다. 열쇠를 찾아낸 순간이었다. 국정원은 북한이 기밀을 이미지 등에 숨겨 보낸 스테가노그래피까지 뚫는 데 성공했다.

암호 해독을 통해 드러난 90여 건 지령문은 충격적이었다. 북한은 청와대 등 국가기관 송전망 체계, 화성·평택 군사기지, 발전·에너지 시설 등의 기밀을 수집할 것을 지시했다. 민노총 건설산업연맹의 노조원들을 포섭해 자료를 얻으라며, 수집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시국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정치적 지령도 내려왔다. 후쿠시마 오염수 사태 때는 “반일 민심을 부추겨 일본 것들을 자극할 것”을, 이태원 참사 때는 “세월호처럼 분노 분출의 계기로 만들 것”을 지시했다.

석씨 등은 김정은에 대한 충성 맹세문도 5차례 작성해 북한에 보냈다.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로 지칭하며 ‘수령님과 장군님의 사상을 빛나게 계승’하고 ‘대를 이어 결사 옹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에 있어야 할 주체사상의 노예들이 거대 노동단체 속에 숨어 스파이로 암약하고 있었다. 문재인 정권의 방관과 견제 속에서도 끈질기게 추적한 국정원 요원들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밝혀내지 못했을 일이었다.

정권이 바뀌자 없던 간첩이 갑자기 생겨났을 리 없다. 간첩이 없는 게 아니라 안 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문 정권 시절, 국정원에선 일선 요원들이 간첩 수사 보고서를 올리면 간부들이 휴가 등을 핑계로 결재를 피하는 일이 잦았다는 증언이 나와 있다. 결정적 대목을 삭제해 수사를 막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민주당은 국정원의 대공(對共) 수사권을 박탈하는 법안까지 강행했다. 만약 그 법이 몇 년만 더 빨리 시행됐다면 민노총 간첩이나 창원·제주 간첩단은 영원히 묻혀 버렸을지도 모른다.

계엄을 대한민국 파괴 범죄로 규정하며 헌법 수호를 내세우는 민주당이 이상하게도 간첩 문제 앞에선 흐물흐물해지곤 했다. 탄핵 정국의 와중에 새삼 민주당의 ‘과거’를 떠올리게 됐다는 사람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