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조선 왕 호칭의 조(祖)와 종(宗), 알고보니 아첨의 결과였다고?
사실상 원칙 같은 건 없었다, 그때마다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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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27명의 임금 중에서 어떤 이는 ‘조(祖)’, 또 어떤 이들에겐 ‘종(宗)’이라는 칭호가 붙습니다. 도대체 무슨 차이이고, 또 왜 그런 칭호가 붙는 것인가? 이것을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학교 선생님과 전문가 등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또 물어봤습니다만 번번이 만족스런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야 속시원히 그 의문이 풀리게 됐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연구편찬실장과 사료조사실장을 역임하고 한국고지도연구학회장을 맡고 있는 이상태 박사의 신간 ‘여기가 서울 거기야’를 통해서였습니다.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조금 더 조사해 봤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나라를 세우거나 거기에 준하는 업적을 쌓은 사람은 ‘조’, 그렇지 않은 다른 임금은 ‘종’이라 불리는 것으로 막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태조(太祖)는 나라를 세웠으니 당연히 ‘조’가 되겠죠. 그런데 7대 세조(世祖)는 왜 ‘조’인 거지? 그래서 ‘나라에 큰 변란이 있었거나 변란 수준의 일을 자기가 벌인 왕’에 ‘조’자를 붙인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14대 선조(宣祖)가 ‘조’인 것은 그런대로 이해가 갔습니다.
그런데 16대 인조(仁祖)는 왜 또 ‘조’인가요? 병자호란을 극복했으니 ‘조’인가요? 만약 광해군을 내쫓아 망할 뻔한 나라를 재건했다는 논리라면 11대 중종(中宗)이 ‘종’인 것과는 형평성이 어긋난 것이 아닙니까. 뭐, 인조도 그런대로 이해를 하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21대 영조(英祖)와 22대 정조(正祖), 23대 순조(純祖)가 잇달아 ‘조’인 것은 누구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영조는 자기 아들을 죽인 변란이 있어서라고 누군가는 말했는데, 그러면 정조는? 그리고 그 아들 순조는? 영·정조는 그렇다고 쳐도 순조는 대체 뭘 했기에 나라를 재건하는 수준의 업적을 쌓았다는 말인지?
정리를 해 보자면 고려의 경우에는 34명의 왕 중에서 초대 태조(왕건) 말고는 ‘조’자를 붙인 예가 없지만, 조선은 27명의 왕 중에서 태조(이성계) 말고도 세조(7대), 선조(14대), 인조(16대), 영조(21대), 정조(22대), 순조(23대)까지 ‘조’를 붙인 임금이 6명이나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실제로 왕노릇을 한 적이 없는 추존왕 중 장조(사도세자), 문조(효명세자)에게도 ‘조’가 붙습니다.
자, 알고보니 사실은 이랬습니다.
원칙대로 하자면 고려와 같이 하는 것이 맞습니다. 창업 개국한 임금과 (실제로는 왕위에 오른 적이 없는) 그의 4대조까지만 ‘조’자를 붙이는 게 원칙이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목조(穆祖), 증조부 이행리는 익조(翼祖), 할아버지 이춘은 도조(度祖), 아버지 이자춘은 환조(桓祖)로 추존됐습니다. 이 네 명에 이성계를 포함해 ‘조’가 다섯 명. 여기에 세종 때 지은 ‘용비어천가’는 세종의 아버지 태종까지 여섯 명을 칭송하며 첫 문장을 리드미컬하게도 ‘해동 육룡이 나르샤’로 썼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후의 임금은 쫓겨나서 ‘군(君)’으로 격하되지 않는 한 모두 ‘종’자를 붙이는 게 맞을 터겠죠. 그러나 또 다른 원칙이 있었습니다. ‘유공왈조(有功曰祖) 유덕왈종(有德曰宗)’이라는 것이죠. 나라에 공이 많으면 ‘조’, 나라에 덕이 많으면 ‘종’자를 붙인다는 겁니다. 이것을 줄여서 ‘조공종덕(祖功宗德)’이라고도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죠. 돌아가신 전하께서 공이 있었던가 덕이 있었던가? 이것은 대단히 애매하고 주관적인 기준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조’가 ‘종’보다 좀더 명예로운 호칭이라고 여겨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럼 태조가 아니면서 가장 먼저 ‘조’자가 붙은 임금인 7대 세조는 왜 ‘조’라 불리게 됐나 살펴보겠습니다. 세조의 묘호는 당초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 중에서 하나 골라 선택하기로 했었는데(지금 솔직히 저 神자와 聖자를 보니 대단히 역겨워집니다), 세조의 차남으로 임금이 된 예종이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행 대왕께서 국가를 재조(再造)한 공덕은 일국의 신민으로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묘호를 세조라고 일컬을 수 없는가?”
신하들도 모두 찬성해 ‘세조’가 됐다는 것입니다. 아하, 불과 14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던 예종이란 임금이 한 일이라곤 남이를 죽인 일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하나 더 있었군요. 정말 기가 찬 일이라고밖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턴 별로 어렵지 않은 법입니다. 14대 선조는 임진왜란의 책임을 물어 오히려 군으로 강등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처음엔 선종(宣宗)이었다가 아들 광해군이 ‘선조’로 개칭했다는 것입니다. 왜? ‘나라를 빛내고 임진왜란을 평정해 전에 없던 큰 공을 세웠으므로 마땅히 조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16대 인조는 처음부터 ‘조’였습니다. 묘호를 열조(烈祖)라고 했는데 ‘덕을 지키고 업(業)을 높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중국 오대십국 중 남당(937~975)의 창업 군주의 시호가 열조여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인조’로 바꿨다는 것입니다(그냥 자결해서 ‘열사’가 됐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가만히 보면 전란이 일어나 나라가 거의 멸망에 이를 뻔했던 임금들이 ‘그래도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잖느냐’는 이유로 ‘조’가 된 셈이어서 실로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이렇게 따지자면 IMF 위기를 가져왔지만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던 대통령은 ‘삼조(三祖)’라 부르고, 나라의 공산화 위기와 에너지 위기를 가져왔지만 그래도 나라가 아주 망하지는 않았던 대통령은 ‘인조(寅祖)’라 불러야 하는 것인지 원…
그러면 영조와 정조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두 임금은 원래 영종(英宗)과 정종(正宗)이었습니다. 이건 19세기 말까지도 계속 그렇게 불렸던 호칭이었는데, 영종은 1889년(고종 26년) 봉조하 김상현의 상소를 계기로 ‘영조’로 묘호를 바꿨습니다. 왕계(王系)의 정통성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정조는? 1897년 대한제국이 건립된 뒤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었습니다.
대한제국이란 나라가 새로 세워진 셈이니 이번에도 위로 4대를 ‘조’로 격상시켜야 되겠죠? 그래서 고종이 의붓아버지로 삼은 효명세자(순조의 아들)는 당초 추존왕 묘호 ‘익종(翼宗)’에서 ‘문조(文祖)’로, 문조의 할아버지 정종은 ‘정조’로, 그 아버지 사도세자는 일단 ‘장종(莊宗)’으로 추존됐다가 ‘장조(莊祖)’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고종 위로 4대까지 ‘조’로 바뀐 것입니다. 대한제국 수립 이전에 바뀐 영조까지 포함하면 고종 위로 5대까지 ‘조’가 됐습니다. 아래 조선 후기 왕실 가계도를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종은 당연히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자신의 묘호에도 ‘조’가 붙으리라 여겼겠지만 죽기 전에 나라가 망해버렸으니… 그럼 24대 헌종과 25대 철종은 왜 그냥 ‘종’으로 남은 것일까요? 헌종은 문조(효명세자)의 친아들이었고, 철종은 순조의 의붓아들로 입적됐으므로 문조의 의붓동생이 된 것이었습니다. 고종은 문조의 의붓아들로 입적된 것이니 고종 입장에선 헌종은 형, 철종은 숙부가 됩니다. 직계 조상이 아니니 굳이 ‘조’로 격상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남은 사람은 23대 순조 한 명입니다. ‘아, 순조도 대한제국 때 순조로 격상됐나보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니었습니다.
순조는 그 이전부터 이미 순조였던 것입니다. 네? 뭐라고요? 아니, 순조라는 임금이 도대체 뭘 했다고…
순조의 묘호는 처음엔 분명 순종(純宗)이었습니다. 그런데 1857년(철종 8) 지돈녕 벼슬의 이학수란 사람이 이렇게 상소했습니다.
“순종 대왕은 사교(邪敎)를 막고 홍경래 난을 평정하는 등 국가에 공이 많았으므로 ‘조공종덕’의 원칙에 따라 묘호를 순조로 바꿔야 합니다. 조는 공로(功勞)요 종은 덕화(德化)로서 두 가지가 모두 성대하고 아름다워서 조가 반드시 종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고 종이 반드시 조보다 깎이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당면한 시기에 의해 그 칭호를 달리했을 뿐입니다.”
이어서 이런 말도 했습니다.
“우리 세조 대왕과 인조 대왕께서는 계통을 이은 임금으로 조라고 일컬었으며, 선조 대왕은 종계를 바르게 밝혔고 왜란을 평정했기 때문에 조라고 일컬었으니, 이는 참으로 우리 선군들께서 이미 시행했던 전례였고 우리나라의 예제(禮制)에도 역시 마땅했습니다.”
참으로 ‘K사회생활’의 진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건 그냥 고도의 아첨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순조의 계비인 순원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생존해 있었을 때였으니 잘 보이기 위해 아첨을 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반대하는 신하가 없는 상황에서 묘호는 순조로 바뀌었습니다.
이학수의 상소 중에서 ‘사교’란 천주교를 말하고, ‘사교를 막았다’는 것은 즉위하자마자 일어난 1801년의 신유박해를 말합니다. 이 임금을 ‘순조’라고 부르는 것에는 천주교인들이 흘린 피도 함유돼 있는 셈입니다.
이제 조선시대의 ‘조’와 ‘종’은 과연 어떻게 다른가 정리해 보면, 한마디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조를 제외하면, 별 원칙 없이 그때그때 정치적 상황에 의해 ‘종(宗)’이거나 종이었어야 할 임금 몇 명이 ‘조(祖)’로 바뀌었다.”
진상을 알고 나니 속이 좀 쓰라린 것 같기도 합니다. 세조, 선조, 순조의 경우엔 이미 조선시대에도 ‘조’로 바꾼 것이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됐다고 합니다. 결국 그런 식의 ‘묘호 인플레’는 아첨의 결과였다는 것이죠.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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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보여서 요약을 해 보겠습니다.
[요약] 조(祖)는 종(宗)과 달리 창업자 수준이거나 나라에 공이 있는 군주에게 붙이는 칭호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말고도 6명 임금의 묘호에 ‘조’가 붙었다. 세조, 인조, 선조, 영조, 순조는 후대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조’가 된 경우고, 정조는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때 창업자인 고종의 4대 위까지 ‘조’가 되는 관례 때문에 ‘조’로 바뀌었다. 이때 추존왕인 장조(사도세자)와 문조(효명세자)도 ‘조’가 됐다. 그러나 정작 고종은 죽기 전에 나라가 망해 ‘조’가 되지 못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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