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정치, 우매한 군중… 판화로 보는 세상의 흑백
[아무튼, 주말]
[최은주의 컬렉터&컬렉션]
판화·삽화 전문 미술관 세운
선박 기업 창업주 해리 루텐
해리 루텐(83)씨는 해운업계에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다. 그가 세운 회사 트랜스페트롤에서 건조된 대형 선박들이 지금도 세계의 바다를 누비고 있는 까닭이다. 1980년대부터 저돌적으로 사업을 개척해 선박 재벌의 반열에 오른 자수성가형 기업가. 조선 강국 한국에 애정이 큰 지한파(知韓派)이기도 하다. 얼핏 보면 날씬하고 세련된 유럽 할아버지 같지만, 악수를 하려고 손을 맞잡으면 ‘아! 이 사람 뱃사람이구나’ 단박에 느낄 만큼 거친 손을 지녔다.
그런 그가 오랜 세월 집착한 건 그림이었다. 그중에서도 삽화와 판화. 미술 관련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던 뱃사람이 거창하거나 과시적인 대작(大作)이 아니라, 작고 내밀하며 오래 들여다봐야만 그 테크닉의 진면목을 알게 되는 장르에 집중해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아무리 큰 유조선도 대양 위에선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일까? 그의 컬렉션은 작지만 의미 있는 장면, 인간성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대형 선박처럼… 더 많은 사람 위한 판화
네덜란드 네이메헌에서 태어난 해리 루텐은 암스테르담으로 가 스페인 문학을 공부했다. 다만 대학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1년 반 만에 학교를 중퇴하고 곧장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1960년대부터 오일과 선박을 관리하는 회사에서 일했고, 벨기에로 넘어가 1980년 트랜스페트롤사(社)를 설립했다. 회사 이름처럼, 기름을 나르는 배를 만드는 사람이 된 것이다. 10여 년 전 한국에 온 그가 직접 자신의 사업 스케일을 설명한 적이 있다. 길이 250m, 폭 40m, 높이 21m의 거대한 LPG선 두 척을 울산항에서 진수하면서 “배 한 척을 만드는 일은 서울 고층 아파트 몇 동을 한 공간에 집적시키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물론 기술적인 디테일은 훨씬 더 섬세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그런 그가 돋보기를 갖다 대야 보일 정도의 미세한 선으로 제작된 판화와 삽화에 매료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대답은 “Poor man’s art(가난한 사람의 예술품)”였다. 너무 직설적이기는 하지만, 유화나 조각에 비해 큰돈 없이도 구매할 수 있던 미술품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 둘 모으다 보니 조금씩 작품의 예술적 수준을 감별할 수 있는 수준이 됐고, 보는 재미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그림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판화와 인쇄술의 방식이 그를 자극했다. 세상의 천태만상이 이 작은 그림 속에 집약돼 있음을 간파한 그는 친한 지인과 정보를 나누고 재단(Transpetrol Foundation)까지 설립해 적극적으로 작품을 모았다. 그는 현재 600여 점의 판화와 삽화를 소장하고 있다.
◇루벤스의 고향에 세운 미술관
미술관이 필요했다. 자신의 컬렉션을 영구히 보존하고 대중에게 선보이기 위해 2017년 벨기에 항구도시 안트베르펜에 미술관을 세웠다. 미술관 명칭은 ‘뮤지엄 드 리드’(Museum de Reede). 리드는 ‘배의 닻을 내리는 곳’이라는 의미다. 안트베르펜은 미술사(史)에서도 매우 중요한 도시다.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1577~1640)의 삶과 예술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16세기부터 인쇄술과 판화가 발달한 도시, 평생 배를 만들어 온 자신의 인생과 컬렉션을 내려놓을 장소로 이곳을 낙점한 이유다.
역동적인 구도와 화려한 색감으로 유럽 최고 예술가로 추앙받은 루벤스는 판화 작업에도 열중했다고 전해진다. 루벤스는 판화 작업을 위한 드로잉은 모두 직접 그렸으며, 인쇄 작업은 전문 기술자에게 맡겨 제작했다. 그의 판화는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안트베르펜 지역 외곽에 있어 루벤스의 그림을 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다소 용이하게 구할 수 있는 판화를 통해 루벤스 특유의 역사화·종교화·인물화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곳 도시 중심가를 걷다 보면 루벤스의 판화를 판매하는 상점을 볼 수 있다.
◇고야·뭉크·롭스… 당대의 증언
해리 루텐이 평생 모은 판화 컬렉션은 스페인 낭만주의 거장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와 인간 내면의 불안과 공포를 표현해낸 노르웨이의 국민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 19세기 세기말적 퇴폐 미학를 추구한 벨기에 화가 펠리시앙 롭스(1833~1898)가 핵심을 이룬다. 해리 루텐은 이 세 예술가가 “자신들의 시대에서 인간의 조건을 형상화한 천재들”이라고 생각했다.
고야가 1799년 제작한 판화집 ‘카프리초스(Caprichos·변덕)’는 특히 통렬하다. 그중 한 작품을 들여다보자. 책상에 잠든 남자의 뒤에서 박쥐와 올빼미가 날아오른다. 책상에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는 글씨가 적혀 있다. 보는 이의 정신을 번쩍 일깨운다. 동판화 중에서도 애쿼틴트(aquatint) 기법으로 제작한 이 판화 연작에서, 고야는 가톨릭 성직자들을 괴물이나 악마로 묘사했고 우매한 군중의 모습도 신랄하게 풍자했다. 스페인 왕가의 무능과 부패와 전쟁의 참혹을 경험한 고야, 청력까지 잃은 거장의 눈물겨운 외침.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목소리. 해리 루텐은 ‘카프리초스’ 전작을 보유하고 있다.
뭉크의 판화 컬렉션도 일품이다. 뭉크의 고향 노르웨이를 제외하면, 해리 루텐이 가장 많은 뭉크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 뭉크 역시 많은 수의 판화와 삽화 작업을 남겼다. 귀를 틀어막고, 입은 크게 벌리고, 거의 흘러내릴 듯 서 있는 해골 같은 인간. 뭉크의 대표작 ‘절규’에 등장하는 만화적 인물은 1898년 노동자 신문 ‘사회민주주의자’ 1면에 삽화로 재현되기도 했다. 무의식적이라 더욱 무서운 불안과 공포. ‘마돈나’ ‘병든 아이’ ‘흡혈귀Ⅱ’ 등의 걸작이 미술관에서 사랑과 파국, 삶과 죽음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충격을 선사한다. 45점의 뭉크 작품이 해리 루텐의 컬렉션에 담겨 있다.
롭스의 주요 작품 48점도 보유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고 부르주아와 성직자의 도덕적 경직성에 맞서 싸웠던 롭스는 직접 주간지를 창간해 삽화가 경력을 시작했다. 정치적이고 예술적인 캐리커처를 다수 발표했지만, 자신의 무명(無名)을 소중히 여겼고 유명해지기를 원치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그림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이미지는 ‘팜파탈’(Femme Fatale·남자를 파멸하게 하는 악녀)이다. 롭스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제작한 ‘창부 정치가’(Pornocratès·1896)는 그 대표작이다. 벌거벗은 풍만한 창부가 눈을 가린 채 돼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다. 정치의 맹목성, 군중의 우매함을 상징한다. 그 끝은 뻔할 것이다.
◇예술, 대양을 가르는 배처럼
당대를 증언하는 그림, 색채보다 선과 질감으로 더 어둡게 인간의 내면을 상상하게 한다. 당대의 폭력과 광기를 판화로 재현했던 화가들이 그러했듯, 해리 루텐이 자신의 컬렉션으로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지속하려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인간을 중심 모티브로 한 예술을 모든 사람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사명을 세웠습니다. 보다 인간적인 세상에 기여한다는 이 사명에 대한 믿음만이 우리의 활동을 정당화합니다.” 이 작은 미술관을 찾는 방문객이 매년 2만명이 넘는다.
그의 열정은 대양을 가로지르는 배처럼 멈추지 않는다. 종종 그의 컬렉션은 각국으로 나들이를 한다. 한국에서도 그의 컬렉션이 소개된 적이 있다.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롭스와 뭉크’ 전시는 7만5000여 명이 관람하는 성공을 거뒀다. 해리 루텐은 “친구의 나라에서 여는 첫 전시”라며 운송비·보험료 등 전시 비용 대부분을 부담했다. 다른 미술관과 컬렉터에게서 전시 작품을 빌리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고 한다. 2년 전에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빛의 화가 렘브란트(1606~1669)의 동판화 작품 110여 점을 대구미술관에 들여오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렘브란트 순회 재단을 설득한 그의 노력 덕에 국내 전시는 성사될 수 있었다. 그는 “좋은 게 있으면 친구와 나누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으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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