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鐵腸石心
철장석심이란
굳센 의지나 지조가 있는 마음을 비유하는 말로 일편단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말 못하는 짐승도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 판국에 시시비비를 떠나 소위 조직의 리더라고 자처했던 자들의 조변석개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며 측은함을 넘어 처참해지는 작금의 시국에서 조선시대 세조를 향해 '나으리'라 불렀던 만고의 충신 성삼문과 낙락장송이 떠올라 몇 자 적어봅니다.
북풍한설에도 끄떡없는 낙락장송 소나무는 늘 푸른 모습을 띠는 것에서 굳은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사람의 됨됨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
우리 한민족은 소나무를 무척이나 좋아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국보180호로 지정되어 있고,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은 낙락장송의 '절의가'를 읊었습니다.
또한 ,
나무 중 단연으뜸으로
흔히
松壽千年·
松栢不老 長壽의 상징으로 불리우며, 두 개의 잎은 낙엽이 되어 떨어질 때도 서로 하나가 되어 부부애의 상징으로 비유되곤 합니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생을 마감한 성삼문은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 출신으로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실로 다양한데도 사육신이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충신과 지사로만 평가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종이 정음청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부터 참여하여 한글문화 창달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성삼문은
단종 복위에 앞장섰으나 발각돼 38세를 마지막으로 처형되었는데, 거사실패로 잡혀 고문을 받을 때 거취를 분명히 하라며 세조가 묻습니다.
그러자 성삼문은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라고 답해버립니다.
세조는 죽기를 각오한 성삼문의 의지를 알게 됐고 세조가 직접 심문할 때도 끝내 왕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 라고 불렀습니다.
세조가 다시 묻습니다.
"네가 나를 나으리라고 하니 그럼 내가 준 녹봉(급여)은 왜 먹었느냐?”
그러자 성삼문은 *상왕(단종)이 계시는데 어찌 내가 나으리의 신하인가?
당신이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내 집을 수색해 보라*고 합니다.
세조가 명하여
집을 수색하니 .
즉위 첫날부터 받은 녹봉에 어느 날 받은 녹이라고 표시를 해 전부 그대로 보관돼 있었답니다.
이런 태도에 화가난 세조는 쇠를 불에 달궈 담금질로 성삼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지졌으나 "쇠가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 오라." 추상같이 말합니다.
국문을 마치고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가면서도 성삼문은 한 수의 시를 읊습니다.
擊鼓催人命
격고최인명
回頭日欲斜
회두일욕사
黃泉無一店
황천무일점
今夜宿雖家
금야숙수가
"북소리 둥둥 이 목숨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는 서산을 넘네. 저승으로 가는 길엔 주막도 없다는데
이 밤은 어느 집에서 쉬어 갈 수 있으리오?"
돌아보니 어린 딸이 울면서 따라옵니다. 이에 성삼문은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살겠구나" 하면서 목이 메어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합니다.
비록 죄인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언정 끝까지 지켰던 지조와 절개는 작금의 대혼돈의 시대에 이합집산을 넘어 한낱 금수만도 못한 위정자들이 갖추어야할 최소한의 덕목이 아닐런지,
과연 어디다 울분을 토해내야 할지 개탄스럽기만 합니다.
세상천지 부끄러운 망국의 시대, 성삼문의 지조와 절개를 닮은 정치 지도자가 너무도 그리운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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