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푸드 돌풍과 중소기업의 반란
무명(無名)의 반란이 시작된 걸까. 최근 인기를 얻은 요리 프로그램에서 ‘흑(黑)수저’로 불리는 이들은 자기 이름을 숨겨야 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셰프 ‘백(白)수저’들과는 달리, 한낱 무명이라는 이유로 저마다 별명을 지어야만 경쟁에 나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름 석 자 없이도 리소토를 볶아내고 티라미수를 뚝딱 만들어내는 숨은 실력자를 보며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미슐랭 셰프를 당당히 꺾으면서 “이젠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셰프’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시리즈가 완결된 지금, 이들이 연 식당에는 11만명 넘는 이용자가 몰리며 서버가 마비되기도 했다.
세계로 뻗어가는 K푸드 시장에서도 무명의 반란은 일어나고 있다. 그 중심엔 대기업의 협력 업체가 아닌, 자생력을 갖춰 재탄생한 중소기업이 있다. 최근 세 달 동안 세계를 ‘K푸드’ 돌풍으로 이끈 중소기업 CEO를 여럿 만났다. 이들은 이름 없는 경영인으로 저마다 굴곡진 인생을 살아오면서도 수년간 전국 각지를 누비고 밤샘 연구를 하며 최적의 레시피를 찾아다녔다. 미국, 독일, 심지어 남아공에서까지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지금의 성과를 이뤄낸 이들이다. 16세에 하반신이 마비됐는데도 ‘냉동 김밥 신화’를 써낸 올곧 최홍국 총괄대표는 10일 본지와 만나 “매주 20㎏ 쌀을 5포대씩 써가며 김밥을 만들었고, 어느 순간부턴 배가 불러 씹고 뱉길 반복할 정도였다”며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도 매년 5만㎞씩 직접 운전하며 냉동 기계 회사는 물론 김 양식장까지도 찾아다녔다”고 했다. 가히 ‘인간 승리’였다.
이름을 찾으려는 무명들의 도전도 이어지고 있다. ‘자체 브랜드’를 만든 것이다. 독자 브랜드를 만들어 해외로 진출하겠다는 분투였다. 떡과 면, 수제비를 지난해에만 75억원어치 수출한 ‘칠갑농산’ 이영주 대표는 “하루는 미국에 나가보니 현지 주부들이 ‘칠갑농산’ 제품을 찾더라”며 “외국에서 소위 더 잘 ‘먹히는’ 브랜드를 새로 만들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젠 칠갑농산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고 나니 수출에도 자신감이 붙었다”고 했다. 브랜드의 힘일까. 40여 년 전 아버지가 시작한 토종 브랜드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30국까지 진출했고, 지금도 직접 매년 20~30개씩 신제품을 만들 정도로 브랜드를 키워가는 중이다.
이름 없는 이들도 자기 이름을 만들고 찾아가는 시대다. 무명 ‘흑수저’들의 식당에 예약이 빗발치고 있듯 최근 무명 중소기업 앞에도 미국, 멕시코, 독일 등 해외 주요국의 바이어들이 줄을 서고 있다. 실제로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수출하는 중소기업은 9만4635개로, 1년 만에 2187개(2.4%) 늘었다. 10년, 20년 뒤 세계로 뻗어나가려는 중소기업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을 누비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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