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일반상식

- 홍범도 장군은 살아계신다! -

太兄 2024. 8. 24. 16:49

- 홍범도 장군은 살아계신다! -

 

지난해 홍범도 장군에 대한 매도가 한창일 때,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격노하였다. 그때 예지력이 있던 국힘당 정치인 하나가 이를 염려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총선을 치른다면, 국힘과 윤대통령은 필패할 것이다."

당시 민심은 국민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돌아서고 있었다. 특히 독립투사들이 많은 경상도 분위기는 험악했다.

 

홍범도는 무패를 자랑하는 대일본제국 군대에게 최초로 패배를 안긴 민족의 영웅이다. 유격활동이나 할 줄 알았던 독립군이 일본정규군을 상대로 승리한 봉오동전투는 청사에 길이 빛날 업적이었다. 그후 청산리 전투가 있었고, 이 또한 잊어서는 안되는 우리 역사에 새겨진 영광이었다. 일본은 이 두 전투를 패배한 뒤 일본군은 25,000명에 이르는 부대를 꾸려 독립군을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립군을 지원한 인근마을 동포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의 목을 베고, 목을 들고 자랑스럽게 웃는 장면과 부녀자들의 치마를 벗기고 손가락으로 성기를 쑤셔대는 일본군을 찍은 사진이 있었다. 무기를 나르고 전투지역까지 찾아와 주먹밥을 던져주던 부녀자들. 간도 인근 지역 동포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변()을 당하였다.

 

깊은 산골 지형을 이용한 의병들의 신출귀몰한 활약에 어려움을 겪던 일본군은 회유 작전을 병행하기로 하였고, 전향하면 귀족 지위와 돈을 주겠다고 의병들을 회유하는데 이때 "가족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일본군은 홍범도 장군의 부인과 큰아들을 납치하여 전향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이때 홍범도 장군의 부인 이옥녀 여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끝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설혹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내 남편은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버티던 이옥녀 여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철창 안에서 사망하였다. 아들 홍양순은 아버지의 의병 대열에 합류했다. 함흥신성리전투,통패장 골쇠점거리전투, 하남안장터전투, 갑산간평전투, 구름을령전투,괴통병어구전투,동사다랏치금광 전투등에 참가했으나, 그러나 홍양순은 1908616일 정평바맥이 전투에서 전사한다. 노년이 되어서도 홍범도 장군은 아들을 잃은 그 전투를 잊지 못했다.

 

"정평바맥이에서 500명 일본군과 싸움하여 107명 살상하고,내아들 양순이 죽고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자가 8명이 되었다. 그때 양순이는 17살이었고 중대장이었지.“

 

일본은 독립군( 3000)을 소탕하기 위해 25,000명이라는 대부대를 동원하는 동시에, 소련의 레닌과 협상을 맺는다. 그리고 봉오동전투 1년 후 1921 6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다. 당시 자유시로 독립군을 모이게 한 것은 레닌이었다. 단일단체를 만들어 독립군 지원을 원활하게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나, 그 이유로 인해 독립군의 무장해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자들은 오하묵을 시켜 사살하도록 명령하였다. 이것이 자유시 참변이다. 이후 오하묵은 소련군 대좌에 오른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독립군 일망타진을 계획했던 일본이 짠 음모였다.

 

홍범도는 3일 후 현장에 들어갈 수 있었고, 김좌진 장군은 참변을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이어 일본의 뜻대로 독립군은 와해되었고, 홍범도는 스탈린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간다. 아마도 공산당에 가입한 까닭으로 목숨만은 살려뒀는지 모른다. 그리고 1943년 그토록 그리던 조국산천에 오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고로 자유시 참변은 독립군 섬멸을 계획한 일본과 적백내전에 승리하기 위해 일본의 도움을 필요로 한 레닌이 합작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 이후 홍범도 장군은 경멸받는 볼세비키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레닌이 준 권총을 찼다고 민족배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계획한 음모의 마지막 순서는 홍범도와 김좌진의 제거였고,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간 뒤, 김좌진 장군은 고려공산당원 청년 두 명에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일본은 복수를 완성시키기 위해 연해주 인근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다.

 

그리하여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스탈린은 그 이유를 조선인고 일본인이 비슷하게 생겨서 구별이 안된다는 말로 핑계를 댔지만, 이 또한 일본이 제안한 일이었다. 만약 조선인들이 연해주에 남아있게 된다면, 조선인들의 지원을 받아 다시 독립활동이 벌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7 6월 독립군은 보천보를 습격하여 독립군이 아직 건재함을 알린다. 일본은 다시 독립군을 추격하여 전설적인 장군 김일성을 사살한다. 그리고 보천보 습격시 김일성부대에 합류한 김성주가 후일 김일성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이다.

 

하와이 진주만 습격과 남양군도 일대를 장악할 때, 승전분위기에 휩쓸린 조선사람들은 너나없이 징병과 징용에 앞다퉈 나갔다. 다만 장준하 같은 뜻있는 애국열사들만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들어갔다. 춘원 이광수도 대일본제국을 위해 정신대며 징병에 나갈 것을 독려하였다. 사회지도층에 있던 대부분의 인사들이 일본에 적극 협조하였다.

 

지금 그 후손들이는일본이 국적이었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안다. 설령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의 국적이 일본이었다 할지라도, 일본국적이 자랑스러울 수는 없다. 부끄럼없이 말하는 자를 볼 때마다 그가 친일파라는 생각이 굳어진다.

 

그러나 민족반역자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은 다른 길을 걷는다. 그는 6.25 전란통에 귀국하여 대한민국 농업을 부흥시킨다. 그뿐인가. 친일파 가문에 태어났어도 당당하게 독립투사의 길에 들어선 분도 계신다. 그분은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친일파 조부였지만, 사람들은 그 죄를 자손들에게 묻지 않았다. 오히려 애국의 길에 들어선 그분의 행적을 기리고 있었다.

 

친일파는 대부분 민족의 피를 빨아 그 후손들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좋은 교육을 시킨 것으로 안다. 경성제국대학부터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친일가문에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계층이 되었다.

 

지금 홍범도 장군을 볼세비키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무리들이 있다. 그들은 독립운동 전 과정에서 일본이란 존재를 잊고 있었다. 필자가 홍범도 장군의 아내와 자식의 최후를 상세하게 밝힌 까닭이 있다. 그분들이 그렇게 돌아가실 때, 천황의 은사금과 작위를 받아 호의호식한 자들은 무엇이겠는가를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백여년이 지났어도, 홍범도 장군의 독립정신은 더욱 빛나고 있다. 이분의 이름을 모르는 국민이 누가 있겠는가. 결국 2024년 대한민국 총선은 홍범도를 매도한 국힘당과 친일파의 패배로 끝났다. 그리고 필자는 수많은 지인과 페친들 중 홍범도 장군을 비난한 자들과 모든 인연을 끊었다. 친일파? 그들은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본질이 잘못된 자들이었다. 그리고 일본에 대항하여 싸운 항일투사들은 모두 반일종족주의자가 되었다.

 

결국 이 문제는 차기 대선에 이르러 다시 불거질 것이다. 뉴라이트계열의 보수주의자들이 반역 빨갱이들의 집합인 더불어민주당에 기회를 준 꼴이 되었다. 우리는 친일파의 과거에 죄없는 그 후손들의 이름을 덧칠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라를 삐앗긴 자의 슬픈 숙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지금 빨갱이들이 날뛴다고 해서 반역친일파들의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김형석을 독립기념관장으로 앉힌 윤대통령의 업보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

 

2024. 8. 24.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