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초 꾼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진 약초꾼 영감님이 개울가로 내려와 떠내려오는 단풍낙엽을 걷어내고 두손으로 개울물을 떠 올려 벌컥벌컥 세번이나 마시고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과 목덜미를 씻어냈다.
“영감님, 월천 좀 해주시구려.”
약초꾼이 뒤돌아 올려다 보니 어떤 젊은이가 사모관대에 가죽신을 신고 백옥같은 준수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행색이 초라한 약초꾼은 두말없이 첨벙첨벙 젊은이에게 다가가 등을 구부렸다.
젊은이가 영감님의 땀에 전 옷이 비단관복을 더럽힐세라 엉거주춤 어부바를 해서 손을 뻗쳐 영감님의 어깨를 잡았다.
몇번이나 기우뚱거리며 월천을 했다.
“영감님, 기운이 좋습니다. 연세가 얼마나 되시는지?”
“연세랄 거는 없고 쉰이 조금 넘었소이다.”
젊은이가 이어 물었다.
“영감님, 혹시 이 고을에 궁궐에서 도승지를 하시다가 낙향하신 윤 대감 댁이 어딘지 아시는지요?”
“따라 오시오.”
약초꾼 영감님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하곤 길을 나섰다.
약초꾼이 앞서고 젊은이가 뒤따랐다.
영감님이 물었다.
“젊은 분은 어디서 오시는 뉘시오?”
“한양에서 내려오는 길인데 윤 대감님을 찾아뵐 일이 있어서요.”
약초꾼 영감님이 흠칫 놀라는 기색이다.
“영감님, 혹시 이 근방에 주막이 없소?”
젊은이가 묻자 약초꾼 영감님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막고개를 넘어오셨으니 시장하시겠구려.
소인도 배가 등에 붙었소.”
산허리를 돌자 동네가 나타나고 잔칫집이 보였다.
“염치 불구하고 들어가 요기나 합시다.”
드넓은 기와집 안마당, 바깥마당에 차양이 드리워 있고 쇠고깃국 끓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혼주인듯 넓은 갓을 쓴 어른이 직접 나와 사모관대 젊은이를 모시고 사랑방으로 들어가 떡 벌어진 진수성찬 한상을 차려 오고 청주를 따랐다.
약초꾼 영감님은 사동의 지시에 따라 마당 구석 멍석 위에 앉아 개다리 소반에 국밥 한 그릇과 탁배기 한 잔을 받았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요기를 하고 일어서자 집주인이 사모관대 젊은이를 대문 밖까지 배웅했다.
잔칫집 동네를 빠져나와 다리를 건너고 고개를 넘자 조그만 강변마을이 보였다.
“저기 감이 주렁주렁 달린 초가집이 윤 대감 댁이오.
그런데 윤 대감은 왜 찾는 거요?”
약초꾼 영감님이 젊은이에게 묻자 젊은이가 영감님을 뚫어져라 보더니 대답했다.
“주상 전하께서 윤 대감님께 귀한 약재를 하사하시라고 해서요.”
약초꾼 영감님이 성큼성큼 걸어가 감나무집으로 들어갔다.
젊은이가 영감님을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와 엉거주춤 서 있자 집사가 나와 안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젊은이를 앉혔다.
급하게 멱을 감고 사모관대를 차려입은 윤 대감이 나왔다.
젊은이가 기절초풍을 하고 벌떡 일어났다.
바로바로 그 초라하던 약초꾼 영감님이 윤 대감이다.
사모와 감색 관복에 관대를 두르고 가죽신을 신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오더니 상 위에 올려진 임금님의 서찰과 하사품인 경면주사, 우황, 사향을 향해 꿇어 앉아 절을 하고는 눈물을 쏟았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윤 대감은 도승지를 십이년이나 하면서 임금이 고뿔이 걸려 누워 있을 때 곁을 지키며 모친상 부음을 접하고도 자리를 뜨지 않아 나중에 임금님의 질책을 받았다.
부친이 병석에 눕자 주상의 윤허를 얻어 낙향한 지 삼년이 되었다.
임금님의 명을 받아 윤 대감을 찾아온 신참 승지는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었다.
윤 대감이 젊은 승지에게 술 한잔을 따라주며 점잖게 말했다.
“어젯밤 꿈 속에서 주상 전하를 뵈었지 뭔가. 곧 이어 황룡이 가르쳐준 곳에 가서 백오십년된 산삼 세 뿌리를 캤네. 주상께 가져다 드리게.”
“대감 나으리, 소인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요.”
젊은 승지는 엎드려 일어날 줄 몰랐다. 이끼로 겹겹이 쌌지만 산삼이 마를세라 승지는 일어섰다.
윤 대감은 승지를 배웅해 이런저런 궁궐 소식을 들으며 고개를 넘고 산허리를 돌아 그 잔칫집까지 오니, 날이 저물고 배가 꺼져 또 다시 들어갔다.
주인장이 나와 사모관대 젊은 승지와 윤 대감을 정중하게 모시고 사랑방에 좌정했다.
윤 대감이 소피를 보러 간 사이 젊은 승지가 이 잔칫집 주인 황 진사에게 윤 대감이 누군지 귓속말을 해줬다.
황 진사도 고개 넘고 강 건너 마을에 도승지 윤 대감이 낙향해서 살고 있다는 소식은 들어 언젠가는 한번 인사를 올리러 가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 발로 찾아오셨으니 감개무량이다.
윤 대감이 자리에 앉자 주인 황 진사가 큰 절을 올리고 꿇어 앉아 칠년 묵은 감로주를 한잔 따랐다.
윤 대감은 술을 마시지 않고 비단관복에 쏟아부었다.
‘나를 대접하는 게 아니라 이 사모관대를 대접하니 당연히 이 비단관복이 술잔을 받아야지요!’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물취이모(勿取以貌)!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판단해선 안된다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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