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양

약 초 꾼

太兄 2024. 8. 3. 18:28

                  약 초 꾼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진 약초꾼 영감님이 개울가로 내려와 떠내려오는 단풍낙엽을 걷어내고 두손으로 개울물을 떠 올려 벌컥벌컥 세번이나 마시고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과 목덜미를 씻어냈다.

​“영감님, 월천 좀 해주시구려.”

​약초꾼이 뒤돌아 올려다 보니 어떤 젊은이가 사모관대에 가죽신을 신고 백옥같은 준수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행색이 초라한 약초꾼은 두말없이 첨벙첨벙 젊은이에게 다가가 등을 구부렸다.

젊은이가 영감님의 땀에 전 옷이 비단관복을 더럽힐세라 엉거주춤 어부바를 해서 손을 뻗쳐 영감님의 어깨를 잡았다.

몇번이나 기우뚱거리며 월천을 했다.

​“영감님, 기운이 좋습니다. 연세가 얼마나 되시는지?”

​“연세랄 거는 없고 쉰이 조금 넘었소이다.”

​젊은이가 이어 물었다.

​“영감님, 혹시 이 고을에 궁궐에서 도승지를 하시다가 낙향하신 윤 대감 댁이 어딘지 아시는지요?”

​“따라 오시오.”

약초꾼 영감님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하곤 길을 나섰다.
약초꾼이 앞서고 젊은이가 뒤따랐다.

영감님이 물었다.

​“젊은 분은 어디서 오시는 뉘시오?”

​“한양에서 내려오는 길인데 윤 대감님을 찾아뵐 일이 있어서요.”

​약초꾼 영감님이 흠칫 놀라는 기색이다.

​“영감님, 혹시 이 근방에 주막이 없소?”

​젊은이가 묻자 약초꾼 영감님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막고개를 넘어오셨으니 시장하시겠구려.
소인도 배가 등에 붙었소.”

​산허리를 돌자 동네가 나타나고 잔칫집이 보였다.

​“염치 불구하고 들어가 요기나 합시다.”

​드넓은 기와집 안마당, 바깥마당에 차양이 드리워 있고 쇠고깃국 끓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혼주인듯 넓은 갓을 쓴 어른이 직접 나와 사모관대 젊은이를 모시고 사랑방으로 들어가 떡 벌어진 진수성찬 한상을 차려 오고 청주를 따랐다.

​약초꾼 영감님은 사동의 지시에 따라 마당 구석 멍석 위에 앉아 개다리 소반에 국밥 한 그릇과 탁배기 한 잔을 받았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요기를 하고 일어서자 집주인이 사모관대 젊은이를 대문 밖까지 배웅했다.

​잔칫집 동네를 빠져나와 다리를 건너고 고개를 넘자 조그만 강변마을이 보였다.

​“저기 감이 주렁주렁 달린 초가집이 윤 대감 댁이오.

그런데 윤 대감은 왜 찾는 거요?”

​약초꾼 영감님이 젊은이에게 묻자 젊은이가 영감님을 뚫어져라 보더니 대답했다.

​“주상 전하께서 윤 대감님께 귀한 약재를 하사하시라고 해서요.”

​약초꾼 영감님이 성큼성큼 걸어가 감나무집으로 들어갔다.

젊은이가 영감님을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와 엉거주춤 서 있자 집사가 나와 안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젊은이를 앉혔다.

급하게 멱을 감고 사모관대를 차려입은 윤 대감이 나왔다.

젊은이가 기절초풍을 하고 벌떡 일어났다.

바로바로 그 초라하던 약초꾼 영감님이 윤 대감이다.

​사모와 감색 관복에 관대를 두르고 가죽신을 신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오더니 상 위에 올려진 임금님의 서찰과 하사품인 경면주사, 우황, 사향을 향해 꿇어 앉아 절을 하고는 눈물을 쏟았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윤 대감은 도승지를 십이년이나 하면서 임금이 고뿔이 걸려 누워 있을 때 곁을 지키며 모친상 부음을 접하고도 자리를 뜨지 않아 나중에 임금님의 질책을 받았다.

​부친이 병석에 눕자 주상의 윤허를 얻어 낙향한 지 삼년이 되었다.

임금님의 명을 받아 윤 대감을 찾아온 신참 승지는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었다.

윤 대감이 젊은 승지에게 술 한잔을 따라주며 점잖게 말했다.

​“어젯밤 꿈 속에서 주상 전하를 뵈었지 뭔가. 곧 이어 황룡이 가르쳐준 곳에 가서 백오십년된 산삼 세 뿌리를 캤네. 주상께 가져다 드리게.”

​“대감 나으리, 소인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요.”

​젊은 승지는 엎드려 일어날 줄 몰랐다. 이끼로 겹겹이 쌌지만 산삼이 마를세라 승지는 일어섰다.

윤 대감은 승지를 배웅해 이런저런 궁궐 소식을 들으며 고개를 넘고 산허리를 돌아 그 잔칫집까지 오니, 날이 저물고 배가 꺼져 또 다시 들어갔다.

주인장이 나와 사모관대 젊은 승지와 윤 대감을 정중하게 모시고 사랑방에 좌정했다.

​윤 대감이 소피를 보러 간 사이 젊은 승지가 이 잔칫집 주인 황 진사에게 윤 대감이 누군지 귓속말을 해줬다.

황 진사도 고개 넘고 강 건너 마을에 도승지 윤 대감이 낙향해서 살고 있다는 소식은 들어 언젠가는 한번 인사를 올리러 가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 발로 찾아오셨으니 감개무량이다.

​윤 대감이 자리에 앉자 주인 황 진사가 큰 절을 올리고 꿇어 앉아 칠년 묵은 감로주를 한잔 따랐다.

윤 대감은 술을 마시지 않고 비단관복에 쏟아부었다.

​‘나를 대접하는 게 아니라 이 사모관대를 대접하니 당연히 이 비단관복이 술잔을 받아야지요!’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물취이모(勿取以貌)!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판단해선 안된다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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