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극우의 나라", 주사파는 극우세력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39회>
한국 헌정사의 “진보” 세력은 진정 누구?
한국 정치에서 “진보(progress)”란 단어는 주술적 마력을 발휘한다. 누구든 진보의 날개를 다는 순간 정치적 면죄부를 얻는다. “진보”란 말 속엔 역사적으로 시대에 앞서며,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심지어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우월하다는 의미까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 “진보”란 무엇인가? 세계사의 큰 흐름에 맞춰 역사 발전을 앞당긴다는 의미가 아닌가?
지난 100여 년의 인류사를 살펴서 역사적 진화의 지표를 꼽자면, 개인적 인권 신장, 경제적 자유화, 민주주의 확산, 법치 확립, 권력 분립, 경제적 통합, 문화적 혼융, 범인류적 연대 등을 꼽을 수 있다. 돌려 말하면 집단주의의 퇴조, 전체주의의 몰락, 독재 권력의 파멸, 고립 노선 폐기, 국수주의 퇴출이 세계사적 진보의 큰 흐름이었다.
그런 거시적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한반도에 최초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운 이승만 정권, 급속한 산업화를 달성하고 수출형 개방경제로 전 세계를 향해 뻗어나간 박정희 정권이야말로 역사의 진보 세력이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에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진보라 여기는 사람은 드물다. 진보의 이름을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반대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죄악시하고, 북한 정권과 얼싸안고 “우리민족끼리”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선점했기 때문이다.
“극우(極右)의 나라” 북한
어느 나라에서나 낡은 이념에 집착하는 집단은 수구적(守舊的, reactionary)이라 한다. 어느 시대에나 세계사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는 세력은 퇴행적(退行的, regressive)이라 한다. 희한하게도 대한민국에서만 가장 수구적이고 퇴행적인 세력이 “진보”라 불리는 아이러니가 펼쳐지고 있다.
공산정권들이 줄도산하던 1980년 말까지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빠져서 대한민국의 체제 전복을 시도하던 집단, 북한식 통일 노선에 부화뇌동하여 “양키 고 홈!”을 외치던 세력,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조선 노동당 선전물을 암송하던 부류까지 한국에선 모두 “진보” 세력으로 분류되었다. 유수 언론들이 주저없이 그들을 “진보”라 불러주니 대중은 그들을 진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한민국에서는 왜 그렇게도 기묘한 언어 착란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단순한 개념 혼동인가, 음험한 정치 공작인가? 정치 공작이라면, 과연 누구의, 어떤 세력의 정치 공작일까? 정치 공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이유로 한국인들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무리까지도 “진보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선 브라이언 마이어스(Brian R. Myers) 교수의 ‘가장 순결한 인종: (The Cleanest Race: How North Koreans See Themselves and Why It Matters)’(Melville House, 2010)을 정독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은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시그마북스, 2011)이다. 번역본의 제목이 말해주듯 마이어스는 오늘날의 북한은 공산주의 정권이 아니라 인종주의적 극우 정권일 뿐이라고 말한다.
1945년 이래 조선노동당의 선전물을 분석해 보면 오늘날 북한은 극단적인 외국인 혐오증, 배타적 인종주의, 순혈주의적 민족지상주의에 매몰된 극우(extreme right) 파시스트(fascist) 정권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198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민족 해방의 장군님”으로 추종하는 주체사상파(主體思想派, 이하 주사파)가 학생 운동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당시 북한식 순혈주의가 남한 사회에도 먹힐 수 있었음을 증명한다. 당시 널리 불리던 운동가요의 노랫말, “쪽발이 양키놈이 남북을 갈라 매판 파쇼 앞세우는 수탈의 나라”에는 북한식 핏줄 민족주의의 선전과 반일·반미 인종주의의 편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사에선 과연 언제부터 그런 순혈주의적 민족의식이 형성되었을까?
마이어스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사에서 북한식의 순혈주의적 민족지상주의와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의 인종주의가 형성된 결정적 계기는 일제 식민 지배였다. 구한말까지도 조선 사대부들은 순혈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소중화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반도를 접수한 일제는 제국적 통합을 위해 인종적 순혈주의를 내세워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치 선전을 벌였다. 일제가 내건 내선일체의 구호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은 한 조상에서 내려온 같은 혈통의 형제들이며, 이 두 민족은 세계 다른 모든 민족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이에 맞서 조선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단군신화를 되살려 일본 민족과는 다른 조선 민족의 독자적 기원을 강조했지만, 1930년 말부터는 민족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좌익계 지식인까지도 일제 군국주의의 대합창에 동조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조선의 작가들은 천황을 찬양하는 한편 동포들을 향해선 조선 문화를 소중히 여기라 촉구하는 기묘한 “친일 (조선) 민족주의”의 경향을 보였다. 연약한 일본 여인과 강인한 조선 청년의 연애담, 징병 가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배웅하는 갓 쓴 조선 선비 등의 이미지가 당시 일제에 부역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조선인의 이중적 정신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제 치하에서 내선일체의 정치 선전에 적극 참여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제 패망 후에는 일본을 배제한 조선 민족만의 순혈주의 담론을 이어갔다. 특히 북한의 민족주의 담론은 반미·반일의 정치 선전과 뒤섞이면서 극단적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과 순혈주의적 민족지상주의 이데올로기로 발전했다. 지난 70여 년 대한민국에서도 순혈주의적 민족주의는 국민을 하나로 묶는 가장 강력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남북한 모두 순혈주의적 단일민족의 신화에 사로잡혀서 있었기에 615공동선언 제1조에는 “우리 민족끼리”의 원칙이 들어갈 수 있었다. 같은 민족이 “통일 조국”을 이뤄야 한다는 발상 밑바탕엔 민족이 체제나 이념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놓여 있다. 물론 대한민국은 전 세계로 활짝 열린 활달한 개방 체제이므로 남한의 민족주의는 북한의 광적인 민족지상주의와는 엄연히 다르다. 북한의 순혈주의적 민족지상주의에 대해서 마이어스는 말한다.
“북한 이데올로기를 한마디로 요약하면······'조선인들은 혈통이 지극히 순수하고 따라서 매우 고결하기 때문에 어버이 같은 위대한 영도자 없이는 이 사악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인종에 기반을 둔 북한 세계관을 굳이 전통적인 좌우 스펙트럼상에 위치시켜야 한다면 극좌보다는 극우 쪽에 놓는 게 더 합당하다.”
게르만족의 인종적 순혈성을 지상의 가치로 내세웠던 독일 제3제국 나치 정권이 “극우”였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마찬가지로 김일성 민족의 순혈성을 선양하는 북한 정권은 “극우”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북한의 김씨 왕조가 극우 정권이라면 1980~1990년대 김일성을 추종하던 주사파는 극우세력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주사파들은 주체사상에 대충 공산주의를 버무려서 스스로 극우가 아니라 극좌의 코스프레를 했고, 냉전의 이분법 속에서 한국 언론은 주사파까지 진보 세력으로 분류하는 언어적 오류를 범해왔다.
마이어스는 바로 그러한 언어적 착란을 교정하려 한다. 영어권에서 맹활약하는 친북 성향 수정주의자들이 오늘날 북한의 이념적 뿌리가 공산주의와 신유학이라며 김씨 왕조를 옹호해 왔기 때문이다. 2007년 제1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을 받은 미국 시카고 대학의 명예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금도 극단적인 쇄국주의의 덫에 빠져 핵무장에만 혈안이 된 북한 정권을 미국발 전쟁을 막으려는 합리적 행위자라 옹호하면서 조선 신유학을 끌어와서 북한의 이데올로기를 긍정해 왔다. 그는 북한 인민의 “어버이 수령”을 자처하는 김일성이 신유학의 가부장적 군주라는 엉성한 논리를 펼쳐 왔다. 심지어 그는 북한 정권의 이데올로기가 “공산주의라는 병 속에 담긴 신유학(Neo-Confucianism in a Communist bottle)”이라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았다.
문제는 신유학의 정치적 이상에는 북한식 인격 숭배나 순혈주의적 민족지상주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점이다. 전혀 다른 시대의 다른 이념을 같다고 주장하는 커밍스를 향해서 마이어스는 북한 정권이 나치식 극우 성향이라고 말한다. 마이어스의 주장이 학술적으로 훨씬 더 타당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19세기 이래 공산주의는 민족의 단합이 아니라 무산계급의 연대를 추구하는 국제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마지막에서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부르짖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 점에서 “민족”을 지상의 가치로 떠받드는 북한의 이데올로기는 정통 공산주의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나치식 극우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수정주의자 커밍스의 북한 옹호론
2020년 6월 29일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커밍스는 1980년대 자신이 펼쳤던 수정주의 이론이 여전히 건재하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북한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한 후에도 오래도록 존속해 왔습니다. 북한도 함께 무너졌더라면 [한국전쟁에 관한] 나의 [수정주의] 작업은 이미 폐기됐겠지만, 북한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혁명적 민족주의와 반제국주의가 북한 존속의 핵심임을 보여줍니다. 물론 중국, 베트남, 쿠바 역시도 그러한데, 이 나라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공산국가들입니다. 북한은 2차대전 이후 전개된 동아시아 혁명의 일부였지, 결코 소련의 피조물이 아닙니다.”
세 가지 이유에서 커밍스의 발언은 인류의 보편 상식과 학계의 일반론을 크게 벗어난다. 첫째, 소련과 동독이 이미 30여 년 전에 무너졌음에도 북한은 지금껏 존재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상식적으로 북한과 같은 공산 전체주의 병영국가는 “혁명적 민족주의”나 “반제국주의” 등의 정치적 구호나 체제선전용 이념이 아니라 전체주의적 감시 체제, 전제주의적 공포정치, 군사주의적 중무장으로 유지된다.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마오쩌둥 사상” 따위 이념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라 핵무장에 성공한 군부의 강력한 군사력으로 지탱됐던 것과 같다.
둘째, 북한을 중국, 베트남과 한데 묶일 수 없다. 중국은 1978년 이후부터, 베트남은 1980년대 후반부터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갔다. 반면 북한은 2020년대 중반까지도 개혁개방을 거부하고 대신 핵무장으로 국제적 고립화를 자초했다. 그 결과 북한의 인민은 1990년대의 대기근을 겪어야 했으며 그 후로도 빈곤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북한 정권이 핵무장이 “혁명적 민족주의”의 발로인가? 그러한 북한 정권의 고립주의가 반제국주의 투쟁인가?
셋째, 중국의 마오쩌둥이나 베트남의 호치민과는 달리 1945년 해방 전의 김일성은 한반도 내에서 혁명의 근거지를 갖고 있지 못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김일성은 이후 당적을 박탈당했다. 북한 정권은 지금도 1937년 스물네 살 나이로 김일성이 200여 명의 유격대원과 이끌고서 보천보 전투를 벌였다고 선전하지만, 실상은 기껏 일본경찰서 한 곳을 기습한 작은 사건에 불과했다. 게다가 1940년 10월 김일성은 아무르강을 넘어서 소련군에 투신했고, 소련 붉은 군대의 훈련을 받으면서 1945년까지 8월 15일 일본 패망 때까지 소련군에 복무했다. 1941년 4월 13일 소련-일본 중립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때문에 김일성이 속한 소련군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실제로는 단 한 차례 일본군과 무력 충돌을 벌이지도 않았다.
요컨대 북한 정권은 반자유적, 반민주적, 반인류적, 반혁명적 세습 왕조이자 전체주의 폭압 정권이다. 마이어스의 지적대로 북한은 인종주의적 극우 정권이다. 그럼에도 북한의 존속 이유가 “혁명적 민족주의”와 “반제국주의”라고 말하면서 수정주의가 건재하다는 커밍스의 주장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지금 다시 커밍스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가 1980~90년대 주사파 운동권의 정신적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수정주의는 미국에서 생산된 세련된 반미주의의 이념적 상품이었다. 그 상품을 소비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스스로 “진보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커밍스의 수정주의에 매료되어 북한을 추종하던 세력은 절대로 진보가 아니었다. 마이어스의 주장대로 북한의 이데올로기가 인종주의적 극우 이념이라면, “극우의 나라” 북한을 맹종했던 남한의 주사파는 논리상 극우세력이 아닐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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