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두 여인의 공로
미모가 출중한 여인들로 인해 한 왕조나 가문 그리고 개인이 화를 당하거나 멸망한 사례를 우리는 역사에서 허다하게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말희(하,걸왕), 달기(은,주왕), 포사(주,유왕), 서시(오,부차) 같은 미색에 빠진 왕들 때문에 하, 은, 주, 오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조선왕조에서도 장녹수 (연산군)나 장희빈(숙종), 김개시(광해군) 같이 한때 왕의 총애를 받아 세도를 부리다가 비극으로 끝낸 여인들도 있다.
반대로 에스더(히브리성경)나 잔다크(프랑스) 처럼 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여인들도 있다.
광복이후 해방 정국에서 이 나라 건국에 숨은 역할을 한 숨겨진 두 여인이 있다. 모윤숙(1910.3- 1960.9)과 임영신(1899.11- 1977.2) 이다.
이승만이 모윤숙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밤이 우리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니 어떻게 해서든지 메논을 이리로 데려오라”
이에 모윤숙은 드라이브를 빙자해 금곡릉으로 달구경 가자고 메논을 끌어내고 이화장에 가 인삼차 한 잔들고 가자며 강권해 이화장으로 데려갔다
메논은 누구인가? 신생국 한국의 운명을 거머 쥔 그는 '유엔임시 한국위원단'의 단장이었다. 1948년 1월 유엔총회의 총선거 결의를 실행하기 위해 한국에 온 8개국 대표단장이었다.
단장 인도의 메논, 부단장 시리아의 무길, 그리고 카나다, 오스트랄리아, 프랑스, 필리핀, 중국, 엘살바도르 대표였다.
서울에서는 대대적으로 그들을 환영했다. 그런데 그로미코 주 유엔 소련 대표가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한다는 성명을 냈다.
북한에서 선거를 하게 되면 이미 만들어진 소비에트정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해체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좌파와 좌우 협상파들, 김구, 김규식도 선거를 반대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렇게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자 메논이 유엔으로 돌아가 다시 훈령을 받기로 한 것이다.
이날 밤 이승만은 모윤숙과 함께 남북을 통한 총선거가 불가능하면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하여 정부를 세우게 해달라는 호소문 과 자신을 지지하는 정치지도자 60명의 서명록을 제출했다.
일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미소공동위원회가 몇 차레 모여도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고 결국 시간만 끌다가 좌우합작 정부 수립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어 미소가 물러나면 그 길로 공산화가 될 것으로 확신한 이승만이 고심 끝에 군정장관 하지도 모르게 미국으로 건너 간다.
한국의 독립문제는 미소공동 위원회가 아니라 유엔이 맡아서 유엔 감시하에 자유 총선거를 실시해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처음에는 미국이 반대했다. 그러나 그 무렵 동유럽과 이란에서 세운 좌우합작 정부가 얼마 있지 않아 공산화되는 것을 보고 소련의 팽창 야욕을 감지한 투르만 대통령이 그 동안 2차 대전의 연합국 동지였던 소련에 대한 유화정책을 버리고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엔에서 다루기로 한 것이다.
유엔총회가 1947년11월 14일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도록 결의했다.
그리고 8개국 대표단이 서울에 오게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국인 북쪽과 남쪽 일부에서 이런 반대 여론이 나왔으니 단장이 다시 유엔으로 가게 된 것이다.
유엔 소총회인 정치위원회에서는 이 문제를 갖고 토의를 벌였다. 회의장 밖에서 임병직과 임영신이 설득작업을 벌렸다.
미국이 남한이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니 대표성이 있다고 남한만 의 선거를 통과시키자는 안을 내자 캐나다와 오스트랄리아는 그것이 분단을 고착시킬 것이라고 반대했다.
논란끝에 표결에 부쳐 찬성32 반대2(캐나다와 오스트랄리아) 기권11표 (공산권)로 통과되었다.
이런 결정이 났는데도 서울의 유엔임시한국 위원단은 자기들이 전권을 부여 받았다며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4일간의 격론을 벌였다.
8개국 대표 가운데 미국이 낸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안을 확실하게 지지한 나라는 중국 필리핀 엘살바도르뿐이었다.
단장인 인도의 메논은 후일 소련 대사를 오래 동안 지낼 정도로 친공적인 성향이었다. 부단장인 시리아의 무길도 미국과는 이스라엘 건국문제로 껄끄러운 사이였다.
오스트랄리아, 카나다, 프랑스도 당시 그들의 정부가 좌익 또는 좌우합작 정부였기 때문에 소련측에 동조했다.
5대 3의 반대로 가결되면 유엔 감시하의 남한만의 자유선거는 물건너 갈 운명이었다.
격론끝에 3월12일 다시 표결에 부쳐 찬성 4표 반대 2표 기권 2표로 가까스로 통과된 것이다.
찬성이 4표로 1표 늘어난 것은 메논이 찬성으로 돌아서고, 카나다와 오스트랄리아가 반대, 시리아와 프랑스가 기권을 했기 때문이다.
부결되었으면 선거는 불가능했다. 만약 그랬다면 그뒤 이 나라는 어떤 길로 가게 되었을까?
8명이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이승만, 김성수, 조병옥, 장택상 등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로 환영위원회를 구성하고, 환영만찬과 환영음악회 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모윤숙이 메논을 만나 문학얘기로 친밀감을 조성하게 되고 미모와 특유의 친화력으로 메논을 설득하여 한국의 현실을 이해시키는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지금 좌파들이 올린 글을 보면 "이승만이 이화여대생들을 모아 섹스클럽을 만들어 성접대를 했다. 모윤숙은 갈때까지 간 X"이라고 악의에 찬 비방을 하고 있다.
기독신자인 이승만이 기생들은 안된다. 교양이 있고 영어가 능숙한 이화여전 출신 여류들이 모여 이들이 외국 귀빈들 방문시 에스콧해 주고 우리나라 사정도 알려주는 낙랑클럽을 만들도록 주선했는데 이것을 그렇게 폄훼 한 것이다.
남한만의 자유선거는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여기서 영어에 능통하고 미모와 지성을 갖춘 시인겸 수필가 모윤숙과 임영신
두 여인의 나라사랑, 건국과정의 그들의 큰 역할과 기여는 올바르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좌파들은 한국시인협회장, 국제펜클럽 한국지부장을 지낸 시인이자 수필가인 모윤숙, 유엔총회 한국대표단장, 2대 국회의원, 중앙대학 총장을 지낸 임영신 등을 창녀들로 매도한다.
소련 비밀문서를 통해 밝혀진 사실로는 45년 8.15 해방 두달 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북조선 인민위원회라는 공산 단독정부를 세우라는 지시를 내린다.
다음해 2월에 사실상 공산주의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47년 2월에 실질적으로 공산당 정부를 만들고 군사조직도 발족했다. 미국만 물러나면 남쪽으로 밀고 내려올 준비를 왼료하였기에 총선거를 반대한 것이다.
그러한 소련의 야욕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순수한 애국심으로 조국의 통일을 이루려는 생각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한 김구를 민족의 영웅 으로 추앙하고,
반면 국제정치학 박사로 국제정치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국익을 위해 미국 등과도 당당히 맞서면서 온갖 어려움을 압도해 이 나라를 건국한 이승만은 분단의 주범이며 민족반역자로 몰아가고 있으니 이런 역사왜곡이 어디 있는가?
모교 프린스턴대학에서는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했는데 우리는 우리가 건립한 동상까지 철거하니 이건 무슨 창피인가?
해방정국에서 70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좌파들이 설쳐대고 역사를 왜곡하고, 좌파에게 휘둘리는 현실, 서글픈 대한민국, 배은망덕의 나라. 하기사 김일성의 입장에서 보면 '다 된 음식에 코 빠트린' 이승만이 불구대천지수라고 생각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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