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경제

중국정부분석 한국독립운동 분열 4가지

太兄 2023. 4. 17. 20:20

중국정부분석 한국독립운동 분열 4가지

2017-09-09 11:36:00


중국정부가 분석한 한국 독립운동 분열의 4가지 원인

한국 독립운동도 당파싸움처럼 분열

 

임시정부나 독립운동단체들이 미국과 중국의 승인을 받지 못한 이유는?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3·1운동 후 상해·연해주·한성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통합된 직후인 1919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상해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왼쪽에서 넷째가 안창호, 둘째 줄 오른쪽 끝이 김구이다.

이승만 정부는 전승국의 대일 전후처리를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참가 자격을 얻기 위해 미국측에 적극적을 교섭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참가 자격은 부인되었다. 미국측의 인식은 다음과 같았다.

[대한민국의 대일강화조약 참가에 대한 조사보고서] - 미국 국무부 극동조사과 1949.12


"교전 당사자 지위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한국민들이 제시한 증거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한국측 주장에 대한 반대 증거가 보다 더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인다.(여기에서는 한국의 법적 지위와 관련된 정보가 제시되고는 있지만, 한국의 법적 지위를 확립하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둔다)

조약에 의한 1910년 일본의 한국병합은 미합중국을 포함한 거의 모든 국가들에 의하여 승인되었으며 1948년이 돼서야 한국이라는 국가 혹은 정부에 대한 국가 승인이 이루어졌다. 한국 내에서 일본 통치에 대한 저항은 국지적이거나 단기간의 소요(騷擾)에 국한되었고, 마지못하긴 하였지만 한국민들은 대체로 일본 총독부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대부분 제1차 세계대전 후에 경쟁적으로 국외에 형성된 한국 민족주의자 단체들은 어떠한 국제적 승인도 정식으로 받지 못했고 모국 내에 거의 군사력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The evidences advanced by the Koreans to support their claim of belligerent status are not without merit, but the evidences against the claim appear to be even stronger. (It should be noted that no effort is here made to establish the legal status of Korea, even though information bearing upon its status is presented. )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by treaty in 1910 was recognized by almost all countries, including the US, and no general recognition was given any Korean state or government until 1948. Resistance to Japanese rule within Korea was restricted to localized or brief disorders; the people generally, albeit grudgingly, accepted the rule of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the rival Korean nationalist organizations outside Korea, most of which were established after World WarⅠ, were not given any formal international recognition and appear to have had very little force in the homeland)."

 

미국을 비판하는 것은 자유이나, 여타 전승국을 포함한 미국의 인식은 그랬다.
임시정부가 승인을 받지 못한 이유는 복합적이었을 것이다. 기록을 보면 미국은 일본과 전쟁에 돌입하자 중국 내 한국 저항단체들의 승인 문제에 관심을 둔다. 주중대사가 이 문제로 중국과 협의도 하고 보고서도 올리고 한다. 그러나, 결국 중국 내의 어떠한 항일단체도
미국, 영국, 중국 등 연합국의 승인을 받지 못한다.

그들의 속사정은 복잡할 것이나, 표면적 이유는 항일단체들의 분열이었다. 장개석은 임정을 후원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장개석조차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는 다음과 같은 국민당 정부의 인식이 깔려있었다.

1939년 8월 말 중국 사천성(四川省) 기강(綦江)에서 열린 한국혁명운동통일7단체회의(韓國革命運動統一7團體會議, 이른바 ‘7당통일회의’)에 대한 중국정부의 분석과 평가 자료가 이 자료집의 내용과 성격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먼저 회담의 실패원인으로 단결정신의 부족, 구심점 역할을 할 중심인물의 부재, 독립운동의 중심사상 결여, 각 세력 간의 심각한 시기와 반목 등을 지적하였다. 

중국정부 인사들은 “거슬러 올라가 1919년 3 · 1운동이 발생한 이래, 해외 혁명단체는 누차 통일과 역량의 집중, 공동 타도 일제를 외쳤다. 그러나 왕왕 통일은 오래가지 않았다. 눈 깜박할 사이에 분열을 고하였다. 심지어는 통일한 후일지라도 그 마찰의 상처가 깊어 증오는 더욱 심해졌다. 이 때문에 혁명 20여 년 이래 한낱 당파의 분쟁만을 드러냈고, 성과 있는 표현은 드물었다. 집안싸움으로 탄식은 더욱 깊어졌다”고 지적하였다. 한인세력 간의 갈등과 분열이 장기간에 걸쳐 누적 · 심화되어 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다음의 회의 결렬 원인에 대한 지적들은 한인독립운동의 상처를 날카롭게 들추어 내고 있다.

 

첫째, 민족성에 단결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한국민족은 개성이 너무 강하여 스스로를 너무 높게 보고, 연소자는 나이가 많은 사람을 우둔하고 무능하다고 본다. 또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청년들을 유치하여 무지하다고 본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마음이고 정신이 이완되어, 의견이 갈라지고 당파(黨派)는 마치 마(麻)가 얽히듯이 나뉘어져 있다.

둘째, 위대한 지도역량을 갖춘 인물이 없다. 한인세력의 지도적 인물로서 명성과 인망이 있어 여러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인물은 김구(金九)와 김원봉(金元鳳) 두 사람이다. 전자는 도덕성망(道德聲望)과 과간정신(苦幹精神)을 갖추어 충분히 혁명을 이끌 수 있으나, 정치적 · 현실적 능력이 다소 부족하다. 후자는 정치적 · 현실적 능력은 조금 낫지만, 도덕성망이 전체 한인세력을 이끌기에는 부족하다. 두 사람은 각기 결점을 갖고 있어, 한인세력의 절대적인 복종을 이끌어내기는 역부족이다. 이번 통일회의에서도 각 세력간 태도의 번복이 무상하였는데, 회담이 결렬된 이유 역시 김구와 김원봉 두 사람이 전체 한인세력을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 중심사상이 부족하다. 한인들의 혁명역사는 이미 20년이나 흐른 오랜 시간이다. 대부분 민족사상을 표방함으로써 군중을 불러 모으지만, 주도집단들에 있어서는 하나의 구체적인 중심사상이 수립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외부로부터 각종 사상이 침투해 와도 이를 제어할 수 없다. 주의와 파벌이 형성된 이후에는 당이 같아도, 파벌이 달라 집안싸움을 하였다. 이번 통일회의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의 두 공산주의자 단체가 먼저 퇴장해 버린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넷째, 각 당파간의 시기(猜忌)가 너무 심하다. 각 세력은 선천적으로 불건전하여, 그 행동 역시 일정치 않아 변화가 심하였고, 번복이 무상하다. 어떤 때에는 합작하고, 어떤 때에는 분열하여 상호 신뢰가 없다. 이번 통일회의의 시대적 상황은 이전과 달리 성과를 거두도록 요구하고 있고, 한인세력들 또한 성의있는 합작을 공언하고 있다. 하지만 각 세력은 자신의 권리가 침탈당하거나 지위가 남에게 배제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서로 경계하고 양보하지 않는다. 각 당의 감정이 이와 같으니, 진정한 통일은 어려운 일이다.

다음으로 국민당정부 측 인사들은 “과거 한당(韓黨)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보조주의(輔助主義)’를 채택하여, 각 당의 자유로운 토론의 진행을 듣고, 이로써 각파가 포기할 수 없는 의견에 다다름으로써, 끝내 원만한 결과에 이르기 어려웠다. 때문에 금후에는 마땅히 ‘적극적 · 주동적태도’로써 그들에게 절실하고 구체적인 주장을 표시함으로써, 통일운동의 조속한 실현 여부를 추구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통제와 지도의 리더십을 행사하겠다는 의지가 읽혀진다. 이는 중국정부의 실망감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후 한인독립운동 정책에도 그 파장이 미쳤다. 그 결과, 중국정부는 한인진영 내부의 자율적인 조정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종래의 지원정책을 재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타협과 절충의 여지가 실종된 ‘7당통일회의’는 중국정부의 인식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끈 꼴이 되었다. 중국정부는 한인세력의 파벌 상황을 전제로, 임정 및 한인세력에 대한 방침을 수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자료집 25권 해제(解題))

언제 건국했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다. 또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건국 또는 대한민국의 존립은 스스로의 의지나 의욕만으로 보장되거나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 어디에도 그런 나라는 없다.

역사로부터 긍지와 자부심을 이끌어내는 것은 좋으나, 빛과 그림자를 균형 있게 보지 않으면, 역사로부터 진정한 교훈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감정에 치우친 자기중심적 민족주의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스스로에게는 타락이요, 남으로부터는 비웃음이다.

자기 자신과 살짝 거리를 두고 타자화도 해보고 객관화도 해보면서 조금 담담하게 스스로의 역사를 조망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한다. 그렇게 된다면 그게 일본이건 미국이건 중국이건, 주변국가들을 향해 그렇게 손가락질하고 미워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